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론」은 성경적인가?
몇 년전부터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이윤호목사 저)라는 책이 한국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자라도 유전인자를 통하여 가계에 저주가 흐른다는 것인데, 어느 교회에서는 오히려 권할만한 책에 추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윤호목사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1999)라는 책을 발행하기 이전에, 이미 메릴린 히키라는 사람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1997. 1998)는 책을 발행하였고, 데렉 프린스는 [축복이냐 저주냐 당신이 선택하라](1999)라는 책을 발행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
그 책들이 주장하는 요지는 "조상의 죄가 유전되어진다"는 것과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끊어버리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견해가 성경적인가?
▶ "가계에 흐르는 저주"란 무엇인가?
이윤호목사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으라"라는 책의 서두는 1986년 가을에 일어난 그의 여자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자신의 깊은 묵상으로 시작되었다고 언급한다.
그 자매는 저자와 대학시절 함께 선교활동도 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불신자가 아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해외 근무를 하던 남편을 따라 피지 섬에서 살던 그 자매는 "백혈구와 적혈구 수의 균형이 갑작스럽게 깨어지는 어떤 병에 걸려 죽었는데, 그녀의 남편을 만나 위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목사는 불현듯 "그 병의 원인이 가계를 통한 유전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p.17)이 들었다고 한다. 그 친구의 가계에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그 때부터 저자는 그 집안에 내려오는 "이런 질병의 저주"를 끊었더라면, 내 친구는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즉 가계저주론은 이윤호목사의 개인적인 추측과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질병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계저주론이 문제가 되자, 교회와 신앙의 기자가 이윤호목사를 취재한 일이 있었다.
이윤호목사는 "가계저주론의 성경적인 근거"을 묻는 그를 취재한 교회와 신앙지의 기자에게 "가계저주론에 대한 구체적인 성경적인 증거는 없다"고 답변하였다.
이러한 이윤호목사에게 교회와 신앙의 기자는 "조상죄의 회개"에 대해서 다시 질문을 한다.
기자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죄에 대해서 내 자신이 회개를 해야하는가"라고 질문을 하자, 이목사는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기자는 계속하여 "그러면 할아버지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해야하는가, 아니면 나를 용서해달라고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자, 이윤호목사는 "둘 다 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계속해서 기자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알지도 못하는 죄를 어떻게 회개하는가"는 연속된 질문에, 이윤호목사는 자리를 들썩거리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때는 일반적인 죄에 대해 회개하면 된다"며 얼버무린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모두 회개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여태까지 조상의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가계에 저주가 흘렀다는 결론이 된다. 즉 조상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방법이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성경에는 왜 조상의 죄를 회개하여야 가계의 저주가 풀린다는 구체적인 구절이 없을까?
즉 이윤호목사는 자신도 자세히 알수 없는 개인적인 추측과 주관적인 견해로서, 성경적인 근거도 없이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역대의 조상의 모든 죄 때문에 우리는 저주와 질병을 받게 되는 것일까?
역으로 저주와 질병을 갖지 않는 자는 역대조상들의 죄가 없어서 일까?
그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조상의 죄는 후손에게 유전된다.
2.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유전된다.
3. 유전적 죄는 죄의 뿌리를 끊지 않는 한, 가계를 타고 계속 내려간다.
이윤호목사는 자신의 책 151쪽에서 그는 심지어 “당신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해서 당신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릇된 인간론뿐 아니라 심각한 구원론의 오류까지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 가계저주론의 오류
과연 "가계 저주론"은 성경적인가?
이윤호목사는 가계저주론(Generation Curse)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책 88-91쪽에서 하나님이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서 찾는다는 것을 지지하는 성경구절들을 몇 개 열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민 14:18),
"아비의 죄악을 그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렘 32:18)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윤호목사는 이 인과응보의 법칙이 "하나님이 정한" 법칙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이전과 이후의 모든 인간의 모든 행위에 예외 없이 적용된다고 주장한다.(pp.140-14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몇가지의 심각한 오류를 갖고 있다.
첫째, 출애굽기20장5절만을 부분적으로 보지말고,계속되는 6절까지를 살펴보자.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이 출20장5-6은 우상숭배에 대한 십계명의 기록이다.
만일 죄가 아비로부터 자식에게 삼사대를 이르게 한다는 것을 성경적인 기록이라고 인정한다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성경적인 기록도 인정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던 사람의 경우에는 자자손손 천대까지 환난도 질병이 없는가? 혹은 그 자손들은 예수를 안믿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인가?
만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조상의 죄를 대대로 계승하여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의 후손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후손 대대로 계승하여 천대까지 은혜를 받는다는 것도 인정하여야만 할 것이 아닌가?
둘째, 이윤호목사는 왜 신약성경을 인용하지 못하고, 구약성경만을 인용하고 있는가?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선언한 것,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왜 인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바울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한"(2:15) 사건이라고 말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13)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가 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우리의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오셔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조상의 죄와 저주를 계속 승계받아야만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불완전한 승리였다는 것인가? 우리가 저주에서 풀리는 방법은 예수 십자가 대속이 아니라, 조상의 죄를 회개하는 방법이었단 말인가?
셋째, 이윤호목사의 책 189페이지를 꼼꼼히 읽어보자.
"나에게 가계치유를 받은 환자들은 '가계치유 기도를 한 번만 받으면 충분할까요?'라는 질문을 종종 던진다.… 나는 '당신이 아플 때, 언제까지 병원에 갑니까?' 라고 반문한다. '치료될 때까지 가지요.' 가계치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문제의 근본 원인을 나무의 뿌리에 비교한다면, 가계치유를 통해 문제의 뿌리를 절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를 완전히 절단할 수는 없다"(p.189).
여기서 이윤호목사는 그의 독자들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완전히 끊을 수 있다는 낙관주의에 빠질 기회를 결코 주지 않는다. 그가 책의 본문 여러 곳에, 또 부록에 따로 실어놓고, 독자들에게 사용하라고 강권한 ‘가계치유 기도문’은 별 신통력이 없는 주문(呪文)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한 번 외웠다고 해서 안심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189쪽 이하의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이 땅 위에 저주를 면하는 기독교인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가계의 저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도 없다는 절망적인 메시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윤호목사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방법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데, 한번의 효과도 아니라 계속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지속적이며 인위적인 방법에 의하여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끊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을 잘 들어보면, 그것은 주술에 가깝다.
왜 그러한 기도가 주술적인 방법이 되어지는가를 살펴 보자.
(1)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가계의 저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이 저주로부터의 해방에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가 되어진다.
(2)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일반적으로 드리는 기도 외에, 저주를 끊는 기도가 특별히 계속하여 필요하다는 주장은 곧, 일상적인 회개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어떤 특별한 방법의 기도 - 어떤 주술적인 의미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3)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대하여 잘몰랐던 그리스도인들 - 그리스도인과 조상들의 죄에 대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던 기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역대 조상들의 죄에 대한 저주를 받았는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론」은 매우 문제가 많다.
"가계 저주" 주창자들의 이론은 처음부터 성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담소를 찾아온 극단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나온, 임상적인 경험의 결과에서 내린 결론이다. 그 후에 그 결론을 지지하는 듯이 보이는 성경 구절을 그 증거로 제시하였는데, 상당히 많은 경우 성경을 자의적(恣意的), 부분적으로 해석한 것들이다.
일반적인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은 보편적인 성경의 기록을 근거로 주장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모든 이단적인 주장은 항상 주관적이거나 체험적인 주장을 먼저 세우고, 나중에 그 주장과 견해에 대한 성경을 부분적으로 제시한다.
예를 들면, 이윤호목사는 시편 51:5의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의 뜻을 "다윗 어머니의 성적 범죄의 가능성"을 주장했다고 델리취의 견해를 들먹이더니, 신디 야곱스를 인용하여 다윗 조상 중의 라합이 기생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다윗이 잉태할 때 죄인이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읽어보아도 다윗의 범죄가 조상 탓이라는 암시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 추측이 분명하다. 즉 전혀 근거가 없는 주관적인 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다윗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는 것은 인간이 누구나 죄가 있다는 의미를 반영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며 논리적이다.
▶ 가계저주론의 성경적인 근거를 살펴 보자.
① 잠언 26:2 "까닭 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짜맞추기식의 주석학적 배경이 없는 성경해석은 치명적인 오류를 초래한다. 대부분의 오류는 본문을 그것이 등장하는 문맥과 상관없이 읽고 해석한 데서 발생한다.
"까닭 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은 내가 받는 저주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뜻이 아니며, 더욱이 조상의 죄 때문에 저주가 일어났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성경본문은 "나에게 저주가 이르렀을 때에 그 저주는 반드시 까닭이 있다"는 수동형의 뜻이 아니다.
그 성경본문은 "이유없이 상대방을 저주하면 안된다"는 능동형의 뜻인 것이다.
[공동번역] 참새가 떠돌듯, 제비가 날아 가듯 까닭없는 저주는 미치지 않는다.
[표준새번역] 까닭없는 저주는 아무에게도 미치지 않으니, 이는 마치 참새가 떠도는 것과 같고, 제비가 날아가는 것과 같다.
[현대인의성경] 이유 없는 저주는 날아다니는 참새나 제비처럼 상대방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잠언 26:2은 가정에 닥친 저주나 조상의 죄 때문에 받은 저주의 근거를 제시하는 구절이 아니며, 남을 이유없이 저주하지 말라는 뜻이다.
② 예레미야 31:29; 에스겔 18:1-32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죄의 유전적인 전승을 주장하기 위해 든 성경 중에 많이 사용되는 것이 위의 두 구절이다.
이윤호목사보다 먼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책을 발행한 메리린 히키는 예레미야 31:29인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는 부분만을 인용하여 "에서가 야곱과 그의 자손들에게 원망과 분노의 쓴 뿌리를 품게 되었을 때, 그의 자녀들과 야곱의 자손들에게 쓴 뿌리를 품게 되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182쪽)
성경은 이렇게 부분적으로만 인용하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본문을 보자.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렘31:29-30)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2-4)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정반대적인 내용이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죄가 승계되지 않으며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윤호목사와 메릴린 히키는 성경말씀이 본 뜻과 다른 이스라엘의 속담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24:16)
이는 본문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의 성경해석의 위험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이다.
잠언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시킬 것을 약속하신 본문이다.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죄로 인하여 뽑으셨던 것처럼, 이번에는 다시 씨를 뿌려 그들을 세우고 심으실 것이라는 소망을 주는 맥락이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셔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그 동안 이스라엘 사이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여 자기들이 당하는 환난을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 즉 자기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어 그런 속담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직접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조상 대대로 쌓여온 죄악 때문에 자기가 불행을 겪게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연대적인 책임, 집단적인 책임으로 돌리는 불신앙이다. 지금 유대인들이 이렇게 생각하여 "아들이 이가 시린 것이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속담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한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짊어지는 일이란 없다.
"범죄하는 영혼"이 그가 지은 죄악으로 죽는 것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 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20)
③ 출애굽기 20:4,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가계저주에 대한 주창자들이 하나같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성경구절이 이 본문이다. 가계 저주 주창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이 성경구절에 맞춘다.
앞에서 설명한 성경 구절에서도 보았듯이 죄에 대한 책임과 의를 행한 공로는 항상 개인이 하나님과 관계한다. 그러면, 출애굽기 20:4, 5에서 말하는 아비의 죄를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구절은 반드시 그 앞에 조건으로 달려 있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라는 말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 이 두 문구는 서로 동떨어져 생각할 수가 없는 말들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십계명의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20:4)
그렇다면 계명을 지킨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왜 문자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에 대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들은 사람의 질병이 어떤 직접적인 원인, 특히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렇다면 원인이 된 죄의 장본인은 누구냐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당대 랍비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죄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생기는 법이라는 논리에 의거해, 날 때부터 지체 장애아인 경우에는 부모가 죄를 지어 자녀가 질병에 걸렸든지, 또는 아예 태아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태아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경우가 있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이러한 의견을 결정적으로 부인하신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2-3)
또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해를 받아 죽음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과 망대가 무너져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많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1-5)
▶ 가계에 흐르는 저주 '끊는 법'은 무엇인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끊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그들은 제안한다. 이윤호목사는 책의 제목부터 "방법"이라고 초점을 맞추었다.
즉 그의 설명에 의하면, 원인 추적(87-106), 걸림돌 제거(121-136),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방법(적용편 1, 2)(149-187), 자유를 향한 전진(189-202) 등이다.
데렉 프린스도 '저주에서 해방되는 일곱 단계'라고 소개한다(축복이냐, 215-230).
전제가 잘못되었으므로 방법론 문제도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는 조상의 죄로 인하여 후손이 저주를 받는다는 구절이 없다. 그런데 그러한 잘못된 전제조건으로 어떤 방법론이 나올 수 있는가?
그들이 제안하는 저주 끊기의 실제적인 방법은 기독교의 경건의 방법인 기도를 "특별하고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내용"과 혼합시켜 경건한 기도를 다른 종교의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이윤호의 [이렇게] 182쪽에는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동시에 죄 용서를 구하고, 조상의 저주에서 해방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린 후, "사술과 사탄적인 어떤 것과 접촉된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끊어버리노라"고 선언하고,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예방 차원(?)에서 "만약 내가 죄를 갖고 있다면 나 자신이 그것을 파기할 것을 결심하노라"는 결단을 표출하고, 심지어 자기가 "사탄이 나와 나의 가정을 공격할 수 있는 사탄의 권한을 박탈한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저주의 쇠사슬을 끊어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을 선포"까지 한다. 거기다가 기도 중에 귀신이나 사탄을 꾸짖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흡사 부적과 같은 요소나 자기의 해방을 선언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도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그 기도가 의로운 기도인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눅 18:14).
기도 중에 자신이 가계의 저주에서 풀려났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저주가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조상의 죄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저주에서 풀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기도를 저주를 푸는 방법과 같은 의미의 주술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미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기도의 본연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며, 기독교의 고유한 특성을 왜곡한 것이다.
이윤호목사의 저주론은 이런 성경의 저주론과는 너무너무 거리가 멀다.
잘못된 저주론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여기 저기서 몇 구절을 인용하여 적당하게 부분적으로 짜맞추기로 설명한다고 성경적인 저주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저주와 은혜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이해하면서도 가계저주론이 가능할까? 미리 말하지만 저주와 은혜를 하나님의 사역으로만 바로 이해했어도 가계저주론 및 가계치유론을 생각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저주를 하는 분이 아니라, 은혜를 내리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히12:9)이시며, 우리에게 영혼(spirit)을 주시는 분(전12:7, 히12:9, 눅12:20)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저주가 남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족한 것이며, 불완전한 것인가?
은혜와 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저주를 내리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저주가 없어지며,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하는 어떤 특별하고 이상한 기도를 하여야만 저주가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왜 모르는가?
죄가 유전되어진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와 그 조상의 죄도 유전받았어야만 하므로, 그의 무죄성을 증명할 수가 없다.
그분은 참하나님이시지만, 역시 그분은 참사람이었기 때문이며,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그대로 보존한 연합된 본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죄가 유전되어진다면, 의도 유전되어져야만 하는데, 조상의 믿음으로 그 후손이 구원을 받을 수는 있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으며, 어떠한 죄인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에,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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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저주'에서 자유함을 얻으십시오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이르면서 촉발된 '가계의 저주'와 관련된 주제는 지금까지도 많은 성도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특별히 이 책이 목회자들에게도 널리 읽혀지고 또 추천되면서 그 열기는 전혀 식을 줄을 모른다. 거기에다가 '찰스 크래프트'와 '이윤호 선교사'로 이어지는 '가계 저주' 시리즈는 잘 팔리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말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있는 것일까?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들어와 있는데도 가계 저주는 흐르고 있는 것일까? 많은 성도들이 불안해 하기도 하고, 지금의 온갖 좋지 않은 일들이 결국 가계 저주로 인함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팔리는 책인 '가계 저주' 시리즈가 그토록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런데 얼마전에 또 "가계에 흐르는 저주, 성경적인가?"(소재열 지음, 말씀사역 간)라는 책이 나와 '메릴린 히키'와 '이윤호'의 주장을 통렬하게 반박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월간 '교회와 신앙'에서는 본격적으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대한 비성경적인 면과 그 이단성을 공격하고 나섰다. 거기에다가 옥한흠복사까지 '가계 저주'에 대한 비판에 가세했다. 도대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그동안 현혹당해 왔단 말인가?
본인은 이윤호 목사의 치유사역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바 있다. 그리고 이윤호 목사의 가계 치유 강의 또한 직접 들은 바 있다. 그래서 이윤호 목사의 책을 보지 않더라도 그의 주장이 어떠한 것인가하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관점에서 이윤호 목사의 책을 접했을 때 그래도 현장 강의 보다는 굉장히 순화시키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음이 드러나지만 그 본질이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목격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인은 옥한흠 목사와 소재열 목사의 주장이나 월간 '교회와 신앙'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한다. 즉, '메릴린 히키'나 '이윤호'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비성경적이며 오히려 그 주장을 따르게 될 때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모를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분명히 정죄함이 없다. 우리는 '종의 멍에를지지 않도록 자유함을 주셨다'(갈 5:1)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6)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옥한흠 목사의 말마따나 "불행하게도 주님이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치 죄의 종이나 된 것처럼 허덕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아마도 옛날에 무속신앙에 젖어 있었던 어떤 전통적인 흐름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예수를 믿고도 자유함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무엇인가 늘 끌려다니고 있다. 그리고 억눌리고 어떤 면에서는 고문을 당한 것 같은 심령을 가진 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지적을 우리는 마음 속 깊이 새겨 들어야 한다.
혹시 지금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고난이 가계의 저주때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성도들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핍박을 당할 수도 있다. 주님께서는 그럴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사 43:1-7).
우리가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다 가계의 저주 때문이라면 성경은 결국 거짓말이 되고 만다. 민수기 23:8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그렇다면 우리가 이 고난을 받는 것이 다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라는 말인가? 소재열 목사는 이런 현상들이 "무속 신앙위에 기독교 신앙을 세운 결과"라고 말한다. 다시말해서 "기독교 무당종교"가 바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전파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무당 점쟁이 식으로 믿으려하는데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가계의 저주'와 관련된 주제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화제를 몰고 온것도 따지고보면 이러한 한국적 상황과 맞아 떨어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계 저주'는 속사람까지 완전히 변하지 못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신화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리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저주'라는 신화안에 스스로 안주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혹시 그러한 가계가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 온 그 순간부터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난이 혹시 닥쳐 올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오직 위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간다면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는 주님의 계획과 성취'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계 저주에서 우리는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가계 저주에서 현혹되서는 안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문제는 가계 치유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그러하다. 그래서 이미 여러 상담자들 가운데 '가계 저주'와 관련된 후유증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들이 마련되고 있다.
그동안의 흐름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은 신학적인 바탕이 서있는 목회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별다른 후유증이 나타나지 않으나, 그렇치 못한 평신도들에게 있어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결국 신학적 기반이 없을 경우에 이 책이 확대 해석되거나 상당 부분 잘못 인식됨으로 인해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게된다는 점에서 여러 상담자들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 분야의 책들이 장기간 동안 평신도부분 베스트셀러를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그 후유증은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가계 치유'로 인해 나타나는 후유증은 과연 무엇인가? 우선 가계 저주를 무작정 확대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 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나타난 현상중의 하나는 인생사의 여러 일들을 반사적으로 가계의 저주로 치부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메릴린 히키'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안경 쓴 것도 조상의 저주 때문이요, 그 가정에 딸만 있는 것도 조상의 저주라고 말을 한다. 그러다보니 인생을 살다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들을 다 조상의 저주 탓이라고 돌려 버린다. 문제는 이렇게 조상의 저주 탓으로 돌려 버릴 때 더 이상 자신의 책임은 사라져 버린다는데 있다. "나는 어차피 이렇게 죄를 짓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야!", "이렇게된게 다 조상의 저주 탓이야! 그러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얼마전 외도를 했던 어느 남자 집사를 상담할 때도 바로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그 남자는 아주 당당하고 떳떳하게 말을 했다. "나는 요, 어차피 외도할 수 밖에 없는 놈이예요. 우리 아버지도 그랬구요, 우리 할아버지도 여자를 서넛이나 두었어요. 우리 조상으로부터 흘러 온 저주의 피가 있는데 난들 어떻게 합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이 지금 외도하고 있는 것은 조상 탓이지 자신의 탓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자신은 앞으로도 외도를 계속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그 죄로부터 끊으려는 생각이나 노력도 전혀 없었다. 그러니 회개는 아예 생각조차도 안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중요한 도구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계 저주'가 그에게는 크리스찬으로서 당연히 느끼게되는 죄책감으로부터 탈출시키는 신나는(?) 회피도구가 된 것이다.
더불어 심각한 문제중의 하나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저주'라는 생각이 오용되고 남용되면서 자신에 대한 책임 회피, 죄악된 생활에의 안주, 죄책감의 사라짐과 회개의 거부,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후유증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계 저주'가 몰고 온 또 하나의 후유증은 '축사 만능주의'이다. '가계의 저주'를 끊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에 모든 관심이 '저주를 끊는 것'에만 집중된다. 그러다보니 '상담적 접근'은 아예 무시해 버린다. 물론 '신앙적인 접근' 역시 부차적으로 몰리고야 만다. 그것도 무리한 축사를 하다보니 그 후유증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미 그러한 후유증들이 몇몇 상담기관에 접수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가계의 저주'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죄를 공중 앞에서 고백하도록 했다. 분위기에 휩쓸린 내담자는 축사 인도자의 강요와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모든 일들을 고백하고야 말았다. 물론 그 자리에 자기 아내와 동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축사 인도자는 '성령의 역사'라고 부추기면서 낱낱이 고백하도록 만든 것이다. 젊은 날의 외도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여자 관계까지 '귀신에게 홀리듯이' 다 말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 결과로 인해 그 부부는 이미 별거에 들어갔고, 아내는 강력하게 이혼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이른바 '축사 중독증'에 걸린 경우이다. 그 자매는 모든 것을 축사로 해결하려 한다. 사사건건 축사 인도자를 찾아가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말을 한다. 감기 들어도 축사요, 아이들이 공부를 안해도 축사, 요즘 잠이 잘 안온다고 축사..... 축사없이는 하루도 안심하고 살 수 없는 그런 현상도 나타나곤 한다. 뿐만 아니다. 축사를 몇번이나 했는데도 차도가 없자, 그 내담자는 금기야 모든 상담까지도 무시해 버리고, 치료 자체를 기피해 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위기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본능이 있다. '가계 저주' 시리즈는 이 본능을 교묘하게 충동질하고 있다. 더불어 '단 번에 뿌리를 뽑으려는' 조급성까지도 '가계 저주'는 제대로 이용하고 있다. 열댓번, 수십번 반복되는 상담과정, 몇 달씩이나 지속되는 부부 훈련 과정보다는 '단 한번에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준다'는 그 속삭임에 많은 성도들이 유혹당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계의 저주'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벧전 1:18)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진리 가운데 순종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깨끗하게 된다(벧전 1:22). 우리가 비록 어둠 속에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에서 불러 내 주신 것이다. 저주의 사슬에서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는 밝은 빛 속에서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벧전 2:9).
다시한번 '가계의 저주'를 생각해 보자.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를 다 벗어 버리자.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속사람까지 거듭났다면 두려울게 무엇이랴! 이 시간, 나는 하나님 안에 살므로 조상으로부터의 모든 저주가 끊어지고 나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자. 그리고 담대하게 선언하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추부길 목사(한국가정사역연구소)
자료출처: 크리스챤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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