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규의 이단적 구원론
박 천규 전도사가 올린 “변승우의 이단적인 구원론”(2013.11.22. 17:57)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박전도사가 이단적인 구원론이라고 한 변 승우 목사의 구원론은 성경과 일치하고, 오히려 박 전도사의 구원론이 성경과 달라서 “박천규의 이단적 구원론”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박 전도사는 이 글에서 변 승우 목사의 구원론은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이단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구원론에 대한 박 전도사 본인의 이해 부족과, 성경 말씀에 대한 불신, 그리고 성경 말씀에 대한 왜곡된 해석으로 인해 정상적인 변 목사의 구원론을 이단적 구원론으로 정죄하는 악을 범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저는 공청회를 수락하고, 참여할 패널로 20년 이상 목회 경력이 있는 분이나, 신학대학교 정교수나 부 교수로 제한을 두자고 했는데, 바로 이 점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성경지식이 부족해서 말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자신의 지적 능력의 결핍으로 인해 올바른 이론을 오히려 이단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를 오늘 박 전도사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박 전도사의 글에서 이단적 구원론을 가진 이는 박 전도사 자신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박 전도사가 그의 글에서 변 목사를 이단적 구원론을 가졌다고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 변 목사가 “죄를 하나라도 끊지 않거나, 하나라도 죄를 회개하지 못하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하기 때문이며, 둘째, 변 목사는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 전도사의 이 주장은 사실과 다른 거짓말로 변 목사를 모함하여 말하며, 오히려 박 전도사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1. 박 천규는 거짓말쟁이요 이단적 구원론을 가진 자
박 전도사는 변 목사가 한 말을 자기 입맛에 맞게 살짝 변조시키고, 그 변조시킨 내용을 가지고 변 목사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웁니다. 그 증거는 이것입니다. 앞서 올린 박 전도사의 글 “변승우의 이단적인 구원론”에서 박 전도사가 한 말과 변 목사가 한 말을 그대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변 목사의 말 :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기서 손, 발, 눈 즉 여러 가지 죄를 지어야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끊지 못한 죄가 있다면 그 죄와 함께 지옥에 던져진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 그대로 회개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 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죄를 다 회개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27-28p).
박 전도사의 말 : 그러나 변승우 목사가 구원의 취소를 주장하는 경우는 첫째, 죄를 하나라도 끊지 않는 경우이고 둘째, 하나라도 회개하지 못하면 구원이 취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위 두 글에서 밑줄 친 부분은 얼핏 동일한 것 같지만, 박 전도사는 변 목사의 말을 살짝 변조시켰습니다. 즉 변 목사는 “천국에 가려면... 단 한 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고 하여, 회개를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라고 말하는 반면, 박 전도사는 회개를 구원 받은 사람이 멸망하는 ‘구원의 취소’와 관련시켜 말합니다. 이 변조를 통해 일어난 차이는 아주 큰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남자는 복음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 남자는 그날부로 술에 취해 퇴근해서 아내와 자녀에게 행패를 부리는 죄를 끊었습니다. 더럽고 악한 말도 끊었습니다. 도박을 하던 죄도 끊었습니다. 그는 모든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전부터 아내 몰래 사귀던 여성과 만나는 것은 끊지 못하고 계속했습니다.
물어보겠습니다. 이 남자는 죄에서 구원 받았을까요? 여전히 죄의 종일까요? 예수 믿었으니 구원받았다고요? 미안하지만 그는 여전히 죄의 종입니다. 참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변 목사가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 그대로 회개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 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죄를 다 회개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런데 박 전도사는 이 말을 묘하게 변조시켜서 엉뚱한 주장을 이끌어냅니다. 그의 말을 보겠습니다. “변승우 목사가 구원의 취소를 주장하는 경우는 첫째, 죄를 하나라도 끊지 않는 경우이고 둘째, 하나라도 회개하지 못하면 구원이 취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변 목사는 회개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해 박 전도사는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박 전도사의 이 말 속에는 그의 이단적 구원론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증거는,
첫째, “하나라도 회개하지 못하면 구원이 취소가 된다는 것입니다.”란 말에서 보듯, 변 목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는 조건으로 회개를 말하고 있는데, ‘구원의 취소’란 말에서 보듯 박 전도사는 죄를 끊지도 않은 사람을 이미 구원 받은 사람으로 단정했음을 봅니다. 앞의 예에서 보듯, 그 남자가 모든 죄를 끊었으나 한 가지 죄를 남겨둠으로 인해 그는 여전히 죄의 종이요 구원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박 전도사는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박 전도사가 이단적 구원론을 가졌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변 목사는 “천국에 가려면 단 한 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죄가 전혀 없어야 혹은 죄를 전혀 짓지 않아야 구원받는다는 것과 다릅니다. 그것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모든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전혀 안 짓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는 죄와 영원히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는 죄와 몸부림치고 싸웁니다. 자주 실패하긴 하지만 호흡이 붙어 있는 한 신조를 굽히지 않고 무기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비록 온전히 거룩하지 않아도 이런 자는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자이며 천국에 갈 사람입니다(큰믿음교회에 대한 말말말들과 진실, p.28-31)."
둘째, 자신이 이단이라는 말에 아마도 박 전도사는 펄쩍 뛸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여기서 죄는 구원 받은 사람이 잘못해서 범죄한 것을 말하고, 그렇게 범죄한 것을 하나라도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박 전도사의 말은 변 목사가 한 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변 목사가 이단적 구원론을 가진 자라면, 박 전도사도 이단적 구원론을 가진 자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박 전도사는 이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억울하다고요? 변 목사도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보고 있는 나도 펄쩍 뛸 일이어서 이렇게 분개하고 있는데, 본인이야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단테가 쓴 『신곡』에 지옥 맨 아래 칸에 가룣 유다와 브루투스가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아래 칸에 그보다 더한 한 층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이단사냥꾼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틀린 생각이겠죠?
사람이 구원 받으려면 모든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회개). 그렇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는 죄 용서를 받고(칭의), 거듭날 뿐만 아니라(중생), 죄에서 벗어납니다(자유). 하지만 이렇게 구원 받은 사람도 범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확한 구원론이겠죠. 변 목사가 바로 이것을 외칩니다. 그런데 “죄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끊는 것이 참된 회개이며, 그런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변 목사의 지적은 현대 교회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의 죄도 남기지 말고 모든 죄로부터 돌아서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취해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흔히 놓치고 지나갈 수 있는 회개의 중요성을 되살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얼마나 예쁘게 보이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멋대로 글을 변조시켜 곡해하고, 그렇게 허구한 날 죽이려 드는 박전도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보지 않습니까? 회개하세요.
2. 성경에 대해 무지한 박 전도사
박 천규 전도사는 변 목사를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 혹은 행위구원론자라고 정죄합니다. 박 전도사는 변 목사를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율법의 의를 지켜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율법주의”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갖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뭐가 필요해요? 너희 의가 필요하다고 그랬어요. 잘 들으세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믿을 때 받는 그 의가 아니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의입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너희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변승우 목사, 2004년 5월 27일 S교회 집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사실 이것은 박 전도사가 처음 한 말이 아니고, 전 ㅊㅅ 대학교 교수를 지내고 현재 대구 D교회 담임목사인 권00 목사가 어떤 신자의 상담에 답하는 중에 한 말입니다. 권 목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값없이 얻는 의, 즉 전가되는 의가 올바른 답이며,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라고 해석하는 변 목사는 율법주의자, 혹은 행위구원론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 인규 권사와 박 전도사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고, 옳거니 하며 이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전가되는 의라고 하는 해석은 성경해석에 무지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변 목사가 주장한 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가 옳은 해석입니다.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니지는 권위 있는 학자들의 해석을 읽어보시면 곧 알 수 있습니다.
수고를 덜기 위해 제가 몇 자 적겠습니다. 게오르크 슈트레커는 『산상설교-그 신학적 해석』(대한기독교서회, 1992, p.16-26)에서 산상설교 해석 유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율법과 복음으로서의 산상설교. 바울과 루터적 해석 유형인데, 루터는 산상설교는 인간이 죄를 인식하도록 이끄는 그리스도의 율법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 의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결코 사람이 자기 의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겠죠.
2)성취 가능한 요구로서의 산상설교. 이는 문자 그대로 성취해야 할 말씀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는 열광주의의 해석인데,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가 취한 입장이고, 실제로 그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3)마음 자세의 윤리로써의 산상설교. 이것은 산상설교를 행동 윤리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현재를 위한 마음 자세나 양심에 대한 호소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자유주의적 해석 유형인데, 마르부르크의 조직신학자 헤르만이 대표적입니다. 산상설교를 ‘불가능한 가능성의 윤리’라고 정의한 미국의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도 이 범주에 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4)역사학적 해석 유형.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종말에 일어나는데, 산상설교는 현재의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말의 표시 아래 있는 소수 사람들의 암호’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앨버트 슈바이처입니다.
5)변증법적 신학의 영향 아래서의 산상설교. 이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는 칼 바르트와 본 훼퍼입니다. 이에 의하면, 산상설교의 윤리적 요구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순종을 보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를 따름으로 성취된다는 입장입니다. 본 훼퍼의 “나를 따르라”는 책은 이를 잘 대변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믿음에 의한 의요, 문자 그대로를 성취한 의입니다.
해석학적인 면에서 드러난 유형 중에 그 어느 것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전가되는 의’라고 해석하는 것은 없습니다(현대 교회의 목회자들의 다수가 권00 목사처럼 전가되는 의라는 입장을 갖고 있지만). 웨슬리는 그의 표준설교집 상권에 실린 “산상설교(Ⅴ)”(유니온출판사, 1983, p.318-335)에서 마태복음 5장 17-20절을 본문으로 설교하는 중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모든 계명을 다 지키고 중히 여기고 금 은 보화보다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율법의 정신적 내적 순종도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능력을 주시는 이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양용의 교수도 그의 탁월한 저서인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05, p.105)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양적 향상을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그 질적 차이에서 발견된다.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한, 그리고 그것에 의해 계시된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웨슬리나 양용의 교수는 모두 변 목사가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라고 한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웨슬리나 양용의 교수가 이단이라는 뜻입니까? 성경 해석에 이토록 무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남을 판단한다고 하는지, 무식한 자가 비범한 자를 판단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겨우 신대원생이 목회 경력이 25년이 넘고 신도 수 15,000명이나 되며, 그것도 신학생부터 지금까지 구원론 방면의 책을 거의 섭렵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목사를 자기 멋대로 판단하여 이단적 구원론이라고요?
지난 번 이인규 권사도 변 목사를 이단적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그 근거로 마태복음 5장 20절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변 목사가 대속에 의한 의가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 제가 변 목사의 해석이 정확하다면서 올렸던 글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라고 한 변 목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20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라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후, 20절 이후의 21-48절까지에서 여섯 개의 죄에 대하여 각각의 명제와 반명제를 사용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그 여섯 개의 죄는 다음과 같습니다. 살인에 대하여(21-26절), 간음에 대하여(27-30), 이혼에 대하여(31-32절), 맹세에 대하여(33-37절),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에 대하여(38-42절), 이웃과 원수에 대하여(43-48절). 그 중 첫 번째 가르치신 살인과 관련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가를 보겠습니다.
명제- (21)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반명제-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살인과 관계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명제에 나타난 대로 모세의 율법을 좇아 살인치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 명제에 나타난 대로 그들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하시며 그 의가 무엇인가를 말씀합니다.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 ‘형제에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 바보라는 뜻-라 하지 말라.’ ‘미련한 놈이라 하지 말라.’ 만일 이를 어길 시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에 관한 의에 있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는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고, 욕하지 않고, 미련한 놈이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범하면 지옥에 가고, 지키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을 최초로 한 이는 다름 아닌 열두 제자입니다(마 19:25).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갖도록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마 19:26-29). 웨슬리나 본 훼퍼, 그리고 양용의 교수나 변 승우 목사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대속에 의한 전가되는 의라고 해석하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정죄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자기 의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 자기 의와 대조되는 다른 의로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데, 마태 역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의 의임을 말합니다(마 19:26). 하지만 대속의 의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행하시는 의인데, 이 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에 행위로 나타나는 의입니다. 우리 교단의 사중복음인 중생과 성결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중생하여 죄를 씻고, 예수를 믿음으로 순간적으로 성결을 체험하여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죄 짓지 않고 사는 삶, 그것을 성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이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입니다. 변 목사는 정확히 이를 지적한 것입니다.
박 천규 전도사는 이제 신대원생입니다. 더 배워야 할 나이이지 누군가를 판단할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장성한 자가 되었음에도 성경을 모른 채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자기의 무식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제야 학문의 긴 여정의 초입에 들어선 박 전도사가 재판자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탁월한 자나 비범한 자는 숨게 되고, 무식한 자들이 힘을 쓰게 되는 세상이 됩니다. 그리하면 의인은 줄어들고 악인이 횡행하는 교계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변 목사처럼 지성이 풍부하고, 영성이 뛰어난 목회자는 현재 우리 한국 교회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부흥을 주도하던 영적 리더들이 사라져가는 이 때 한국 교회는 새로운 리더들을 키워야 합니다. 당장에는 그들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또 무엇을 걸어 변 목사를 이단이라고 하는지 봅시다. 내가 옆에서 지켜본 변 목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평범한 목회자보다 탁월해서 틀리게 보일지 모르지만, 많은 교회가 그의 사역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박 전도사는 변 목사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이단으로 정죄하여 다른 목회자들로 교류를 금지하게 하니, 그 죄의 크기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화창한 젊음의 시절에 왜 하필이면 남을 죽이는 일에 골몰하고 있습니까? 살리는 일에 힘써도 아쉬운 빛나는 인생을 선물로 받아놓고도 왜 보람되게 사용치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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