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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실 때 - 폴 케인

하늘감동 2007. 10. 12. 22:12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같을 때에,  다시 말해서  그가 그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을 때에 명백히  사라지시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서  그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을 경험해왔다.


수년 전 내가 처음으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에  수천의  사람들이  나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오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년 안에 우리는 로스엔젤레스  26번의  치유 은사 부흥 집회를 개최했고,  사람들은  아주 좋은 말들로  나에 대해서 칭송을 했다.


그러한 칭송들이  나의 겸손에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말들에 개의치도 않았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겸손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한 예배 시간에 수백명의 사람들을 위해 잠을 거의 자지 못하거나  전혀 자지 않으면서도 기도하곤 했다. 또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물도 음식도 먹지 않고  금식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밤에  나는 나의 분별력의 정확성에 대해서  교만스럽게 자랑하면서,  " 나는  당신 모든 사람들 각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자녀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당신들이  하나님과 어떤 수준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지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거듭났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 당신이 영적인 일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뉴에이지에 속한  사람인지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 라고 말했다.


사람들일 줄을 서서 기도 받기를 원했을 때에,  나는 첫번째 여자에게  "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 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기름부음이 떠나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나에게서  숨기셨고,  이 일은 나에게 끔찍스러운 것이었다.  기도 받기 위해서  줄서있는 굶주린 영혼들을 바라본 후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여러분! 내가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저도 떠나겠습니다. 그 분이 돌아오시면  저도 내일 밤에 다시 오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오시지 않으면  당신들은 저를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


나는 밤새도록 주님을 찾았다.   하지만 그 분은 나에게서  그의 친밀한 현존을 거두어 가셨고,  그것과 함께  그분이 나에게 주었던 엄청난 확신과 능력까지도  거두어 가셨다.


그 분은 거기에 계셨다.  하지만  나는 그의 현존을 알고 느끼는 유익을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죤 뉴튼(John Newton) 이 다음과 같은 찬송을 가사를 썼을 때에 이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 내가 예수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할 때에 시간은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지.  달콤한 경치와, 달콤한 새들과,  달콤한 꽃들이 나에게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네."



나는 너와 함께  있다 !


성서적 용어로 하나님 얼굴의 숨기심은 그의 의식적인 현존을 거두어 가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 45 :15 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 다윗은 시편 13 :1 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여화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구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   또한 시편 10 : 1 절에서는 이와 같이 고백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 시편 44 :24 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어찌 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재를 잊으시나이까."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수 없을 때에, 우리를 지지해주는 가시적인 것들이 없을 때에, 그리고  우리의필요들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명백히  볼 수 없을 때가 바로 우리가 즐거워할 때이며, 이 때가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을 드러내실 때에는 훨씬 더 위대한 능력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기회라고 고백할 때이다. 그러한 경우들에도 주님은 거기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단순히 우리가 그 분을 볼 수 없다고 해서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그러한 때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한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음으로 그 분이 " 우리 각자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행 17:27)발견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 분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계속 더듬어 찾으려 할 때에 우리는 반드시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서 항상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  노력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리는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로부터  숨기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보기 위해 시험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히 13: 5 ).  우리가 하나님의 달콤함을 느낄 수 없고, 볼 수 없고, 맛 볼 수 없을 때에도  그 분은 여전히 그 곳에 계신다.


여호수아 1장 5~6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하나님은 그의 약속들과, 그의 능력 혹은 그 자신을 결단코  우리에게서 거두어 가지 않으신다. 단지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이 사라지셨다고 느끼게 하실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분이 거기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을 때에도 그 분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


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에  종종 " 자정의 시간 - 한 밤중의 노래" 라는 프로를 듣곤 했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방을 가득 채우곤 했다.  그러한 사건들은 나에게  다윗이 시편 77장 7-9에서 말한 것을 상기시켜주는 굉장한 느낌이었다.


"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의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이에 대한 대답은 No 이다.  우리의 느낌이 아무리 좋지 않을지라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분은 어느 곳에나 계신 분이다. 즉 그 분은 여기에, 저기에, 모든 곳에 동시에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주었을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 (민6:24-26)


" 하나님의 얼굴 " 은 미소, 승인, 혹은 그의 현존 의식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여  있는 것 같지 않을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가 비록 그 분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분이 거기에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거두어진 것 같을 때에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이유들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왜 우리에게  그러한 경험을 하도록 허락하시는지  알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보이실 때


우리의 바램은 그의 임재가  계속해서 거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의 임재와  능력이  임할 때에  그것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은  가치가 있다.  그의 임재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나타내셔서  자신을 보이실 때는 성령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로 결심하시고  오순절에 강림하신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 때에 제자들은 함께 모였고,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행2:1-2절 참조)


사도 행전  3장에는 날 때부터  절름발이였던 남자가 나오는데, 사람들이 그를 성전 미문에 데려다 놓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보이시기로 결심했을 때, 그 분은 치료하셨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사람은 펄쩍펄쩍 뛰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소리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이름을 높여 드렸다.


굽어 고착되었던 몸이 즉시 펴졌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시기로  결심하실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경고가 고린도 후서 7장 19-20 절에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이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숭배하면 내가 저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 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리니 ."


우리가 명백한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이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죄를 지을 때에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원하면  우리는 회개하고  우리의 등을 죄에게서 돌려야 한다.



시련과  실망스러운 일들이 임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은 시련들을 통과해 나갈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3: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  그는 또 빌립보  1: 29절에서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라고 썼다.   하지만 모든 시련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왜냐하면 모든 시련은 정해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 11)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인내 하실 수 있는지를 알고 계신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0: 13절에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주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사랑이 풍성한 분이시다.  그 분은 항상 자신을 숨기시지 않으시며  노를 항상 품지도 않으신다. (시103 : 8-9)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을 결코 나타내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련과 어려움들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위해 자비를 품고 계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 (시103 : 13-14)


많은 사람들은 재미와  영의 양식과  교제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광명만을 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행복하고 즐겁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때, 때로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어려운 시기를 통과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정직했으면 좋겠다.  시련과  실망스러운 것들이 올것이만, 예수님은 항상 우리 곁에서  도와줄 준비를 하고 계신다.  우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에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 너의 어깨는 네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를 너를 위해 이것을 메어주마. 내가 너의 문제들을 떠 안아줄께.  내가 너의 짐들을 떠맡아서 대신 지어줄께 ."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에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순신간에 모든 것이 변한다.


우리의 아버지는 자비롭고  사랑스러우신 분이시다.  "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 : 5)


"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시 126 : 6)  예수님을 바라보면 영혼의 깊은 밤과 고통과 시련들과 같은 우리가 겪었던 모든 것들이 매우 가치 있는 것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시련들과  고통들이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이 마지막 시기에 우리가 주이시며 구세주인 주님을 만날 때에 무수한 배당금을 우리에게 지불해 줄 것이다.


우리는 고통의 시기와, 그의 임재를 즐기지 못해던 시기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시기들에 대해서 기쁨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당연시하면서  우리가 항상 즐거워야 한다거나  혹은 둔한 순간들이  우리의 삶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을 때, 우리는 잘못 키워진 아이들처럼 버릇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시기나 순간들에 대해서, 그리고 기쁨이 솟아 나오지 않고  행복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는 때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인생 여정의 끝에 이를 때에 우리는 뒤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한 시기들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다 목적을 가지고 있었구나. 모두 다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 었구나.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구나 ."

출처 : 큰믿음교회
글쓴이 : 묘지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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