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는 지혜를 모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흥설교)
우리는 지혜를 모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006. 1. 15.
전 10:3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14) 우매자의 특징은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말이 많은 사람은 우매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말이 많으면 미련한 소리가 나옵니다.
지혜는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직접 주시는 지혜도 있지만 지혜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배우는 것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지혜는 모으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지혜는 모으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여럿인 것처럼, 좋은 기독교 서적의 저자가 여럿인 것처럼, 또 그들이 다루고 있는 분야가 각기 다른 것처럼, 지혜는 이 하나님의 사람, 저 하나님의 사람, 이 책, 저 책을 통해서 모으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교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꾸 남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족들 간의 교제나 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는 제게 있는 권한을 넘어서서 누구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권위를 부여한 자리에서만, 제게 권위를 부여한 사람에게만, 제 권위 아래 있는 사람에게만 이야기를 하지 다른 어디에 가서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말을 할 때가 있고 잠잠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잠잠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말해야 할 장소가 있고 잠잠해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이요 교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운 자리 혹은 하나님께서 나의 권위 아래 두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 지혜대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르치고 말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모든 자리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말하지 않고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워지는 비결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에 관한 남다른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보통 다른 목회자들보다는 훨씬 많은 말씀에 관한 이해와 지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을 통해서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귀를 열고 계속해서 배운 결과로 축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제게 주신 영적인 감각과 직관적인 분별력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들으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압니다. 책을 읽거나 세미나를 참석하거나 거기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아는 직관적인 분별력을 하나님께서 제게 주셨습니다. 그냥 많은 정보만 모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분별력을 발휘하면서 계속해서 듣고 읽고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게 말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게 주신 말씀의 은사 때문에 오늘날 제가 하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서 저의 설교가 나온 것이냐? 그것은 끊임없이 배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말하려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들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집회 참석해서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들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축적되면서 분별력이 더해지고 지식과 지혜가 더해지고 그것이 계속 집대성되면서 제 설교가 나온 것입니다.
카페에 실려 있는 즉흥설교는 제가 들어도 기가 막힙니다. 방금 제가 한 설교를 제가 넋을 잃고 한참동안 듣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참 신통방통하게 말도 잘한다.’ 그러면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끊임없이 읽은 데서 들은 데서 배운데서 받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축적이 된 것입니다. 제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지 않아도 성령은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말씀의 은사가 뭐냐 하면 보고 들어서 축적한 것을 창조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세미나 참석해서 들은 것을 그냥 그대로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창조적인 재료가 되는것입니다. 그것들을 사용해서 또 다른 것들을 깨달을 수 있는, 혹은 더 깊은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그런 능력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메시지들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혜자가 되려면 잠잠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지혜자가 되려면 말을 해야 할 때와 잠잠해야 할 때를 분별해야 합니다. 말을 해야 할 사람과 잠잠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 앞에서는 말해야 하고 어떤 사람 앞에서는 잠잠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친구 목사님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목사님과 그 교회 교인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지혜자 앞에는 잠잠한 것이 지혜다.” 이 한 마디만 하고 본인도 잠잠하고 또 교인들에게도 잠잠하라고 하였습니다. 잠잠히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지혜자 앞에는 잠잠한 것이 지혜다.” 명언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담하러 와서 자기 이야기만 실컷 하고 가는데 그 사람은 무지하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상담 받을 때 자기 문제를 어느 정도 알리는 것이 필요하지만 알리는 것 이상으로 듣는 것이 배나 더 필요합니다. 내가 말해야 할 사람이 있고 들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말해야 할 시간과 장소가 있고 내가 들어야 할 시간과 장소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겸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이 겸손한 자는 지혜를 얻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과 지혜를 연관시킨 것입니다.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교회 안에서도 지혜로운 사람들은 설교를 잘 듣습니다. 설교를 써먹으려고 듣는 것이 아니고 들으려고 듣습니다. 그러면서 그들 속에 점점 지혜가 쌓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언가 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제를 위한 말은 괜찮습니다. 너무 말이 없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꾸 참견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자꾸 건의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로워지려면 잠잠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지혜로워지려면 들음으로써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워질 수 있는 비결인 것을 알고 여러분이 겸손한 자가 되어서 야고보서에 나오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말씀처럼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말씀 듣기를 원했던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 좋은 편이 무엇인가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음식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그것보다 훨씬 좋은 것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대접보다 더 귀한 대접은 대접을 잘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목회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데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영의 식사를 대접합니다. 영의 식사 대접은 잘 받지 않는 성도가 식사 대접하는 것을 목회자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무엇이 주님을 위해서 올바른 선택인지, 무엇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올바른 선택인지 마리아에게는 그것을 알 수 있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지혜가 어디서 왔습니까? 말씀을 사모하고 겸손에서 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나중에 옥합을 깨서 장사를 예비하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예비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도 몰랐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에게도, 다른 사도들에게도 없던 지혜가 마리아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런 지혜가 왔습니까? 바로 듣는 겸손에서 그것이 온 것입니다. 지혜는 듣는 것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마리아 같은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절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많은 사람들이 우격다짐으로, 힘으로 성공하려고 합니다. 큰 돌을 옮기는데 지렛대를 사용해서 옮기면 쉬운데 힘으로 옮기려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공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성공하게 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라.”
성공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죄를 떠나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이 일을 하면 성공하고 저 일을 하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살면 잘 되고 저곳에 살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악을 떠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 다음에 진짜 성공할 수 있는 더 놀라운 비결이 무엇인가?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하지만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기심을 버릴 수 있으면 성공합니다. 우리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으면 성공합니다. 우리가 자기 이익, 명예, 자기 왕국을 버리고 정말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면 성공합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 1:18)
우리는 이것을 읽을 때마다 내 기업, 내 부르심인 줄 아는데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업,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나의 부르심을 위해서 사느냐, 예수님의 부르심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사느냐? 나의 기업을 위해서 사느냐, 예수님께 돌아가야할 기업을 예수님께 돌리기 위해서 사느냐? 이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부르심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들의 기업은 예수님의 기업을 위한 기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예수님의 것이고, 주님이 우리를 피로 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고 주님의 기업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이란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성공이란 말이 성경에 있느냐?” 하는데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전 1:10). 성공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공을 목적으로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성공이 예수님을 위한 성공이 될 때, 우리의 성공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공이 될 때, 우리의 성공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성공이 될 때 그 성공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성공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느냐? 자기를 부인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 대해서 죽으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부요하게 되지 못하느냐 하면 이기적이라서 그렇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돈을 원해서 그렇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번영을 원해서, 자기를 위해서 형통과 부를 원해서 그렇습니다. 왜 교회들이 크지 않습니까? 이기적이라서 그렇습니다. 자기를 버리지 못해서, 실제적으로는 자기를 위해서 사역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위하는데 하나님께서 왜 거기 복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뭐하려고 거기에 사람을 보내주시겠습니까?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초월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므로 자기를 버려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잔꾀를 버리십시오. 야곱의 근성을 죽이십시오. 머리 굴리는 것 그만 두십시오. 잔꾀를 가지고 지혜와 은사를 구하고 잔꾀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하는 것 그만 두십시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순수하게 가지십시오. 깨끗하게 가지십시오. 잔꾀를 버린다는 말은 동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내 동기를 정화시키고 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때 하늘의 보고가 그를 향해서 열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이 그를 돕습니다. 그때 진짜 천군과 천사들이 기쁨으로 와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진짜 공급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잔꾀를 가지고 긁어 모아봤자 제대로 모아지지도 않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잔꾀를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십시오. 마음을 하나로, 초점을 하나로 모으세요.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겠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겠다. 내가 무엇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겠다가 아니고 내가 단순히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겠다가 아니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뛰어넘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큰 복이 그에게 임합니다. 그때 진짜 성공이 그에게 물밀듯이 옵니다. 그게 진짜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래야 진짜로 여러분의 생애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안 되면 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이게 되면 성경의 인물들처럼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처럼,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요셉에게 극적으로 복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복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높여주신 것처럼, 그런 삶들이 실제적으로 펼쳐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부요하게 하신 것처럼! 여러분, 잔꾀를 버리시고, 큰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룩하려고 하지 말고 크게 쓰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려고 마음에 소원을 품으십시오. 자아를 버리고 이해득실을 따지지 말고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도록, 주님께 기쁨이 되도록,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그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물론 우리가 심으면 거둡니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초점을 맞추면 잘못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헌금이 상거래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심으면 하나님께서 100배의 축복을 꼭 주십니까? 아니오. 하나님은 그렇게 거래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심으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고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늘에 그것을 기록해 둘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심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른 것을 통해서 갚으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물질적이어서 물질이 중요하지, 물질로 거두지 않으면 거두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진정한 헌금은 단순히 물질이 아닙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진정한 헌금은 마음을 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에게 영적인 것을 거두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를 축복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심는다고 꼭 물질을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꼭 100배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거래로 전락시키면 안 됩니다. 우리가 물질을 심고 물질을 받는 것은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주장해야 할 법칙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나님이 그것을 꼭 물질적으로 갚아야 할 채무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면에서 과도하게 되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12, 13절에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끝은 광패니라.”
지혜는 온유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격하게 말하는 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깡패들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지혜가 없으니까 목청으로, 언성으로, 과격한 말로 상대방을 압도해야 되고 상대방을 제압해야 되고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 있는 사람은 깡패처럼 악쓰고 고함치지 않습니다.
9장 17절에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진정한 지혜는 온유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이 절박함으로 올 때 세례 요한처럼 큰 소리로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매가 아니고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열정적으로 우리 속에 불붙을 때 우리는 외치게 될 수도 있고 울부짖을 수도 있습니다. 큰 소리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큰 소리로 외칠 때 그것이 과격한 것 같아도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큰 소리로 외친다면 그것은 온유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 내 성격이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걸러내고 버려야 합니다.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끝은 광패니라.”
자꾸 말하면서 언성이 높아진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매자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외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꾸 말하는데 자꾸 언성이 높아진다. 그 사람은 우매자입니다. 지혜자는 온유합니다. 여러분, 철저하게 온유한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기질들과 잘못된 성품들을 다 주님의 은혜로 씻어내시고 온유한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16, 17절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에 연락하는 이 나라여 화가 있도다. 왕은 귀족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는 이 나라여 복이 있도다.”
왕이 어린 것이 화입니다. 왕이 어리지 않으면 이런 뒤에 있는 일들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육신의 연령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어른에게도 통하는 것입니다. 나이는 많이 먹었는데 성숙하지 못한 자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왕은 예수님이시지만 여러분 가정에도 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리해서 가정에 가장들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리해서 목회자가 있습니다. 회사에도, 모든 단체에도 나라에도 왕이 있습니다. 그 왕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런 가정이 복이 있고, 그런 교회가 복이 있고, 그런 단체가 복이 있고, 그런 나라가 복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평화가 임하고 번창합니다. 그런 곳이 창대하게 되고 흥왕케 됩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 있는 지도자의 역할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성숙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위치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지혜로워지는 비결은 입을 닫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로워지는 비결은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듣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입을 닫고 듣는 일을 속히 함으로 진정한 지혜자가 되게 해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름대로 각자 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혜를 모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비와 벌이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면서 꿀을 모으는 것처럼 우리는 지혜를 모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한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설교를 들어야 하고 평생 책을 읽어야 하고 평생 좋은 세미나가 있으면 참석해야 하고 평생 지혜의 꿀을 모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영혼에 좋은데 지혜가 바로 그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지혜의 꿀을 모으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말하기는 더디 하고 겸손히 들음으로 지혜의 꿀을 모으는 자들. 지혜를 저장하고 마치 꿀벌집 속에 꿀이 가득한 것처럼 우리의 영 속에 지혜로 가득하게 채우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주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사람들을 붙여주실 때, 말해야 할 때 말해야 할 자리에서 젖과 꿀을 떨어뜨리는 입술이 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우리가 성공을 목표로 살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목표로 살지만 성공을 목표로 사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공보다 더 존귀한 것을 위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공보다 훨씬 초월적으로 위대한 것을 위해서 계획되었으며 창조되었으며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친구로, 신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를 막는 모든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고 그리고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본받아, 주님을 위해서 자아를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위해서 자아를 버릴 때 우리는 하늘과 연결되게 됩니다. 우리 위에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 위에 하늘 보고가 열리게 됩니다.
아버지, 그때 성공이 옵니다. 상대적인 성공이 아니고 절대적인 성공입니다. 극적인 성공, 기적적인 성공입니다. 세계적인 성공이 옵니다. 성공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옵소서.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사온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혜를 가질 때 우리가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성공의 비결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옵소서.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끝은 광패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참된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말의 힘이 음의 높고 낮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혜에 있게 해주옵소서. 부족한 종이 하는 설교의 힘이 웅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표현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깊은 지혜에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온유함으로 그것을 가르치고 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시고 우리의 사역들이 온유와 겸손으로 특징지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온유와 겸손으로 옷 입게 하옵소서.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한 것은 벌거벗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권고대로 온유와 겸손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긍휼의 옷을 입고 사역하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게 해주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사역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