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로마서 9장 1~18 절 말씀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
2008. 2. 3.
살전 1:1~7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무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성경에 예정(豫定)이란 말이 나옵니다. 예정은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 ―무조건적인 예정이라고도 합니다.―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이 있고, 또 하나는 예지(豫知) 예정이 있습니다.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의도적으로 예정을 예지 앞에 두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정을 예지 앞에 두어야 무조건적인 예정이 되는 것입니다. 예정을 예지 앞에 두어야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의 교리를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예정을 예지 앞에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순서가 반대입니다. 성경은 항상 예정보다도 예지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는 예정보다 예지를 앞세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여기 보면 예정보다 예지가 먼저 나옵니다. 예지에 근거해서 예정이 이뤄졌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역시 예정보다 예지를 앞세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예지이지요?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예정입니다.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예지를 예정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예정론은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예정론은 예지 예정론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택하시고 정하셨다.” 예지 예정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을 거부하고 예지 예정을 믿었습니다. 위대한 부흥을 일으킨 찰스 피니는 장로교 설교자이지만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을 거부하고 예지 예정을 믿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우리는 예정의 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정의 교리는 때로는 잘못 설명되고 걸림돌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예정의 교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장래 일들을 현재 일처럼 밝히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방향에 따라 우리를 다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나 만일 우리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피로 사신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받게 되는 운명을 주십니다. 예정이란 특별히 새롭고 특이한 하나님의 통치 계획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바 복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충분히 계시된 계획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영이 이 계획을 만드신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주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면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범죄하면 그에게 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십시오. 사람의 선택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시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주를 주시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을 버리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미래를 내다보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딤전 2:4) 그런 하나님께서 일부만 예정하신다는 것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기를 원하시는데 그분이 일방적으로 예정하신다면 100% 예정해서 100% 천국에 보내시지. 그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온 세상 죄를 담당하시고 온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온 세상 죄를 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이 다 확보되어 있는데도 뭐 때문에 일부만 예정해서 일부만 천국에 보내겠습니까?
그래서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론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또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이 준비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지만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 마음이 없고, 이래서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믿지 않는 사람이 있고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전부 아시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배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때 제대로 반응해서 회개하고 믿고 거듭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영원 전부터 알고 계십니다. 미래를 완전히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계획을 세우실 때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세 전부터 그들을 아시고 선택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론이고 이것이 예정의 원리입니다.
데이비드 포슨도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란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정은 미리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정은 이후에 있을 사건을 미리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누가 후에 회개하여 믿을 것을 아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구원을 받아들일 어떤 이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처음은 아니지만 알미니아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취하였다. 어거스틴을 비판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비평가들도 수 세기 전에 이와 같은 견해를 취하였었다.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근거가 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시고’ 예정은 특별한 것이라 하기보다 일반적이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는 모든 개개인을 예정하셨다.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의 범주에 속한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교회 안에는 예지 예정보다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을 믿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목회자를 보나, 교회를 보나, 성도를 보나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을 믿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앙을 고백하지요. 그리고 예배참석하고 있지요. 설교자도 그렇고 청중들도 그렇고 자신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들이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이 선택된 자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설교자들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면 온 성도들이 “아멘”합니다. 그렇게 간주하는 것입니다. 여기다가 “구원 받은 사람은 절대로 버림 받을 수 없다.”는 교리를 믿으니까 거기 모여 있는 전체 회중이 갑자기 도매금으로 완전히 안전한 단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제는 지옥에 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운명적으로 필연적으로 천국에 갈 수 밖에 없이 확정된 존재로 갑자기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기만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미혹입니까? 이것이 실상과는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여러분, 저는 심지어 전에는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도 않고 술과 도박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과거에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 받았고 선택 받은 자이고, 선택 받은 자는 절대로 버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는 천국에 간다는 광신에 빠져 있는 사람을 봤습니다. 이런 성경에 근거 없는 광신적인 믿음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꼭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극단적인 케이스는 아니더라도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은 예정된 사람, 선택된 사람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 참석한다고 다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교회는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 참석해도 그 안의 많은 사람들이 외식자들입니다. 그 안의 많은 사람들이 또한 명목상의 신자입니다. 가짜 신자들이 그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는 것은 사실과는 동떨어진 것이고 이것은 위험스러운 착각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 예정된 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도매금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고백하고 예배 참석한다고 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중에는 선택한 백성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앉아 있습니다. 왜? 지옥 갈 사람들이 더 많이 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선택 받은 사람인지 선택 받지 않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이것을 과연 알 수 있는가, 이 문제가 먼저 대두 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인지 아닌지 이 땅에서 아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왜 가능합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요. 본문 4절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이 알 수 있다면 우리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빌립보서 4장 2, 3절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것이 표현만 다르지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예정되어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는 세 가지 시금석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세 가지 단서, 방법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타난다.” 본문 1~4절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말했습니다. 목회자가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생각할 때 가슴이 쓰리고 염려스럽고 답답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선택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그 성도들을 생각할 때 정말 마음에 기쁨이 오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면 오늘 본문처럼 그런 성도들의 절대 다수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에 감사가 넘쳤을까요?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보여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것은 선택 받은 자들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 특징이 나타나는 사람은 선택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아무리 교회 다니고 신앙 고백을 해도 이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선택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 차원에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미래 차원에서는 모릅니다. 가봐야 압니다.
믿음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참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가? 참 믿음의 특징은 믿는 것도 아니고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 출석하는 것도 신앙 생활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 믿음의 특징은 역사하는 것입니다. 거짓 믿음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지식이 아니고 거짓 믿음입니다. 거짓 믿음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주여”(마 7:21) 이런 식으로. 거짓 믿음도 교회 다닐 수 있습니다. 목사도 총회장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믿음이 할 수 없는 것은 뭐냐? 참 믿음은 역사하지만 거짓 믿음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참 믿음은 어떻게 역사하느냐? 참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짜 믿음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복음에 대한 지식, 정보하고 거기에 대한 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고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래서 복음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믿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의 핵심에는 뭐가 있느냐?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진짜 믿음은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다른 믿음은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과 정보와 거기에다가 확신이 더해지고 거기에다가 고백이 더해지는 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짜 믿음은,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한다.” 이것은 믿음이 역사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추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진짜 믿음은 역사하는데 믿음이 역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왜냐하면 사랑하라는 계명 속에 다른 계명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게 된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역사한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종, 행함입니다. 그것이 역사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거짓 믿음은 역사하지 않지만 참된 믿음은 역사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러분, 역사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뭘 이해하고, 뭘 믿고, 뭘 고백하고 교회 다니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행함으로, 순종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역사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선택의 증거입니다.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다니고, 중직자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역사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선택 받지 않는 자, 가짜입니다. 여러분이 역사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수고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제가 볼 때는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 같습니다. 완전히 종살이고 노예 생활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엄마가 얼마나 수고하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엄마를 좋아할까요?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엄마를 좋아합니다. 엄마에게 푹 빠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악질적인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덜 좋은 여자라도 자녀에 대해서 모성애가 발동하기 때문에, 모성애 때문에 아빠가 못하는 일들을 합니다. 아버지가 못하는 일을 하고 아버지가 못 주는 사랑을 합니다. 엄마는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아버지가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을 아기에게 계속합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그것이 축적되어 가지고 아이들이 엄마를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엄마를 좋아하고 엄마라는 존재가 우리 가슴 속에 그렇게 비중 있게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모형입니다. 사랑의 한 폭의 그림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사랑은 말만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3장 18절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수고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고 시도 아니고 노래도 아닙니다. 사랑은 수고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이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말로, 입술로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어린 양을 먹이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고백에 만족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여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쳐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라헬에 대한 사랑 때문에 7년 간 양을 쳤지만 7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사랑은 힘입니다. 어머니들에게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직장 생활을 하라고 하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수고할 수 있는 힘입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수고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선택 받은 사람은 사랑의 수고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선택 받은 사람은 봉사하고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세 번째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여기서 소망의 인내는 꿈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인내와는, 일상적인 인내와는 다릅니다. 쥐구멍에 볕 뜰 날을 기다리면서, 혹은 내 소망, 내 소원이 이뤄지는 때를 참고 기다리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본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1:3)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망은 다시 오실 예수님,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복스러운 소망(딛 2:13)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망은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냥 참고 기다리는 것이 인내가 아닙니다. 여기서 인내는 씨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말씀처럼 인내로 말씀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또 “참고 선을 행하는 것”(롬 2:7)을 말합니다. 인내로 말씀을 지키는 것,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다시 오시는데 그냥 오실 것만 기다리면 안 됩니다. 춘향이가 이(李) 도령을 기다리면서 변(卞) 사또의 수청도 다 들면서 기다린다면 그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춘향이가 이 도령을 기다리면서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지키면서 기다렸습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이 소망의 인내는 정확히 그런 것을 말한 것입니다. 신랑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부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망의 인내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선택 받은 자들에게는 소망의 인내가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것이 소망의 인내입니다.
로마서 13장 11~14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것이 소망의 인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택함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그래서 택함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면 거룩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을 보면 더욱 자명해집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처럼 예정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정의 목적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구원해서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정의 목적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만세 전에 우리를 무엇 때문에 택하셨느냐? 거룩하게 하시려고,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예정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결과를 다 내다보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실패가 불가능합니다. 예정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정말로 택함 받은 사람은 거룩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 다니고 신앙 고백한다고 해도 거룩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선택된 사람이 아닙니다. 선택된 사람은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근거해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룩을 택함을 받은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예정의 증거가 무엇이냐,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거룩이다.” 그렇게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증거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토마스 왓슨은 8복 해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거룩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거룩하기 전에는 당신이 택함 받은 아무 표도 보일 수 없고 차라리 마귀의 낙인만 보일 따름이다.” 우리가 거룩하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소유라는 마귀의 낙인만 찍혀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에 의하면 그런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 존 라일은 거룩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예정에 확실하고 유일한 표시이다. 택함을 받은 자의 이름과 수효는 하나님께서 지혜로이 자기의 능력 안에 보존해 두시며 인간에게 계시하시지 않는 은밀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생명책을 펼쳐 우리의 이름을 그곳에 기록되어 있는지 알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정에 대한 분명하고 명확한 말씀이 있으니 즉 택함을 받은 사람은 거룩한 생활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은 거룩하게 하심으로 택하심을 입으며’(벧전 1:2)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며’(롬 8:29)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다.’(엡 1:4)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보고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고 자랑하면서도 고의적이고 상습적으로 죄성(罪性)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다. 물론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는 어려우며 겉으로 경건한 체하는 많은 사람이 마지막 날에는 마음이 부패한 위선자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성화의 외관이 없는 곳에는 택하심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찰스 하지는 프리스턴 채플 노트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선택과 구속 그리고 성화는 불가분리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성부께서 택하시고 성자께서 구속하신 것을 성령께서 성화시키신다. 성령께서는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도덕률 폐기론은 어리석고도 사악한 것이다. 구속과 선택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성화이다. 내가 구속 받았다는 증거, 내가 선택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이냐? 구속과 선택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성화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복음주의자 신학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존 스토트는 에베소서 강해집인 하늘나라의 새로운 사회란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선택 교리는 범죄 구실이 아닌 성결의 동기가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선택 받았다고 해서 당연히 천국 갈 줄 알고 겁 없이 죄를 짓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못된 교리에 속아서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무수할 정도로 많습니다. “선택의 교리는 범죄의 구실이 아니라 성결의 동기가 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 다음과 같이 스스로 말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중에 하나이며 안전하다. 따라서 나는 성결에 대하여 근심할 필요가 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가정은 진정한 선택 교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가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 교리는 죄를 권장하기는커녕 그것을 금하며 우리로 하여금 성결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왜냐하면 성결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선택 받은 사실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거룩한 삶이다.”
지금까지 제가 인용한 글들의 저자들은 다 기독교계에서 정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권위 있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다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이 그것이라면 정말로 선택 받은 자는 거룩해지고 점점 흠 없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택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 한 말씀 더 드려야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 에이든 토저가 이렇게 썼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델 교회였습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 교회 소식을 들을 때 ‘이 세상에 참된 기독교의 교회가 있다면 바로 그 교회다.’라고 말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매우 모범적인 모델과 같은 교회였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이 시대의 모델 교회 중에 하나는 큰믿음교회라고 양심적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제 양심으로, 제 영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큰믿음교회 성도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너무 닮았습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얘기인지 큰믿음교회에 대한 얘기인지 혼동이 될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실제적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제가 이것을 말씀 드리는 이유는, “그런데 택함 받은 모든 자에게 이런 수준으로 그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가 아니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 모델과 같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볼 때 “야,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이고 저 사람들은 정말 구원 받은 사람들이고 저 사람들은 정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렇게 단박에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교회를 볼 때 이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범적인 교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꼭 이 정도 수준이 못된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이 각각에 대해서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수준을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의 역사로 인정하시는지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수준을 사랑의 수고로 인정하시고 소망의 인내로 인정하시는지 그것은 주님만 아십니다. 성경에는 “습관적인 죄가 없는 것이다.” 이런 큰 선의 기준은 그어져있지만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주님만 아십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도 어떻게 보면 저 사람이 천국 갈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저 사람이 지옥 갈 것 같고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아주 모범적이기 때문에 의문이 없는, “아, 저 사람들은 진짜 선택 받은 사람들이야.” 지금 그 기준을 다룬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기준이 되지만 “저 사람들은 정말 선택 받은 사람들이야, 저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이야, 정말 진실한 신앙인들이야.” 그렇게 사도 바울이 단박에 판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꼭 이 수준이 안 되어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꼭 이 수준이 안 되어도 온전히 거룩하지는 못하지만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고민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구원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함으로 인정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봐야 압니다. 심판석에 가봐야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상태가 어느 정도이든지간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좌절하지 마시고 달려 나가시기 바랍니다.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일어서서 앞으로 계속 나가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미래가 달려 있고 영원한 운명이 달려있는 것이니까 불확실한 것보다 확실한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나타냈던 수준으로, 진정한 신자에게는 이 세 가지가 다 나타납니다만 단순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나타냈던 수준으로 믿음의 역사를 나타내게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수고를 나타내게 되시기 바랍니다. 소망의 인내를 나타내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아는 어떤 목회자나 어떤 성도가 보든지 “저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야. 저 사람은 틀림없이 구원 받은 사람이고 틀림없이 천국에 갈 사람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처럼 “너희가 본이 되었는지라.” 그런 본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