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랑 콤플렉스 -2-
사랑 콤플렉스
고후 2:7-8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조지 스위팅 박사가 사랑장(고전13)의 교훈을 요약하면서 “인생-사랑=제로”라는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사람 보기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으로 자기 삶을 불태우는 것이 없었다면 하늘나라에서는 아무것도 기억, 기록되는 것도 없고 가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죽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제로다.”
사랑은 목적으로 추구하고 은사는 수단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과 영혼들을 더 효과적으로 섬기려고 하니까 도구가 필요합니다. 섬기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은사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에 사랑을 따라서 은사를 구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고, 섬기기를 원하면 은사를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아무 은사도 없는 사람보다 성령의 은사 아홉 가지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을 더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은사보다도 더 중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왜 사랑이 제일인가 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요? 그 다음에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에 사랑이 없으면 가짜 믿음이고 그 믿음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고 하셨지요. 우리 속에 사랑이 있어야 믿음이 작용, 역사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믿음은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그래서 사랑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언하는 것은 쉬운데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타락한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믿는 것은 쉬운데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깨닫고 믿는 사람 중에 사랑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지 않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아는데 자기를 살펴보니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너무 작고 초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때문에 시달리고 사랑 콤플렉스를 심하게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그랬습니다. 최근에도 저 자신을 살펴보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속에 어디 있나, 정말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한 사랑이, 영혼들을 사랑한 사랑이 내 속에 어디 있나?” 이것을 생각하니 심각하게 부끄럽고 얼마나 절망적인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제가 저를 보니까 있어야 할 사랑이 100이라면 제게는 1% 정도 되는 사랑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강대상에 서니 부끄러워서 지난 4주간 죽을 썼습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 원고를 봐도 제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합당하지 않고 이렇게 무익한 종이며, 죄인 중에 대괴수인데 설교, 메시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떤 설교를 봐도 영혼의 불이 댕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대상에서 죽을 썼습니다. 제 영혼 속에 주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랑에 불타서 그 사랑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야지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고 그 사역이 진짜 사역이 될 텐데 사랑에 대한 부족함을 현저하게 느끼니까 어떤 설교를 하려고 해도 설교 원고들이 다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4주 동안 설교할 때 더듬거리고 진땀을 흘리며 “내가 누구를 가르치며, 누구에게 설교하겠는가, 과연 내가 목사로서 강단에 설 자격이 있는가?” 사랑 콤플렉스가 무지하게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택 거실에서 있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단순한 메시지를 제게 주셨습니다. 사랑에 대한 메시지인데 제가 고민하고 있는 사랑 콤플렉스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사랑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구나. 네가 사랑 콤플렉스가 해결되지 않으면 네 자신이 괴롭고 떳떳하지 못해서 강대상에서 설교할 수 없다. 네가 사랑하기를 원하고 사랑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사랑을 부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해도 해결이 안 되는데 사랑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새로운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네가 진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네 사랑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아주 단순하게 가르쳐주신 후에 “이번 주일에는 이것을 설교하라.”고 하셔서 설교를 굉장히 쉽게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나누겠습니다.
1. 사랑 충만을 구하는 기도에는 한계가 있다.
저는 오랫동안 사랑 충만을 구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사랑을 부어달라고 나름대로 절규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을 구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달라져야 되는데 아직도 사랑이 없어서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좌절이 되고 설교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며, 우리가 반드시 맺어야 할 열매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응답된다고 했는데 응답이 잘 안 되잖아요. 내가 정말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데, 정말로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는데 그 사랑이 쉽게 오는가? 제가 그날 알게 된 첫 번째가 이것입니다. “사랑은 기도만으로는 안 된다. 사랑은 사랑을 중요시여기고 구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정말로 우리 속에 사랑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도만 해서는 안 되고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가르쳐주신 메시지입니다. 사랑을 구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2. 사랑은 이미 우리 마음에 부어져 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 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이냐,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부어진 것이냐?” 하고 고민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 <은혜론>에서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 이 구절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면 사랑의 조그만 불꽃도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다는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그 사랑입니다.”
제가 이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케네스 해긴 목사님께 영향을 받아서 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 이 구절에 관해서 이런 말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벌써 우리 심령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고백하고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사랑 없는 자처럼 생각하지 말고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고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함으로써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을 자라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간증을 소개했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어느 곳에서 집회를 하는데 젊은 목사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사모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오늘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해긴 목사님이 “사모님이 여기 오기 전부터 사모님 속에 혼란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모님이 혼란 가운데 있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목사님이 요한일서 3장 15절 말씀을 통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다. 살인하는 자 속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며 그 사람 속에는 영생이 거하지 않는데 자기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사람 속에도 영생이 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설교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우리 시어머니가 너무 싫습니다.”
이때 해긴 목사님이 그 말을 들으면서 사모님이 실제로는 자기 시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모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대신에 자기 인간적인 이론, 육신이 자기를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 있고 나는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그냥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어떤 기억이나 나쁜 감정 밖에 없는 줄 알고 거기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자기를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시어머니를 미워한다면 당신은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당신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생명이 당신 속에 있다면 하나님의 본성이 당신 안에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모님, 제 눈을 똑바로 보고 이런 말을 고백해 보세요. ‘나는 나의 시어머니를 미워합니다.’ 그러고 당신의 영 속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가를 살펴보세요. 사모님의 영에 어떤 반응이 있었습니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리낌이 옵니다.” 그러니까 해긴 목사님이 “그것이 당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당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주의를 끌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사랑에 자신을 양보하고 내어드려야 하는데 그 대신에 자신의 마음이 멋대로 활동하도록 내버려두어서 육신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듯이 행동하십시오. 거듭난 당신 속에는 이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당신은 영으로는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육신을 따라 살기 때문에 참 많은 경우에 우리가 실제로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 혼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영이며 혼을 가지고 있고 몸 안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만일 당신을 영적인 존재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좀 더 영적인 것들을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 당신에게 좀 더 실질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당신이 실제로 큰 소리로 ‘나는 영이다. 육체를 가지고 있고 몸 안에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심령, 즉 우리의 영에 부어져 있습니다. 몸에 부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영이고, 혼을 가지고 몸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몸이나 혼, 즉 지식, 감정, 의지에 부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성령이 내 영에 오면서 내 영에 부어져 있습니다. 영에 있는 것들은 주목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있는데도 거기에 주의하지 않으면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느낌이나 사랑의 감정이 없다고 자기에게는 사랑이 없다고 착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몸이나 혼이 아니라 내 영 속에 사랑이 부어져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 사모님이 해긴 목사님과 시어머니를 자기 집에 초청했습니다. 사모님이 해긴 목사님을 한 곳에 데리고 가서 “목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게는 원래부터 시어머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발견해야 할 위대한 진리요, 진실은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기도만 되풀이하지 말고 자기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부어져 있음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일서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사랑한다.” 거듭난 자 속에는 반드시 사랑이 부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것이 확실하다면 여러분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느껴지든 느껴지지 못하든 여러분의 가슴 속에는 사랑이 영혼 속에 부어져 있습니다. 내 영 속에 부어져 있는 사랑을 말씀을 기초해서 믿으면, 그때는 혼도 느껴집니다. 내 영 속에 실제로 사랑이 있는데 이것을 작동시키고 사용해야 합니다. 일깨워야 합니다. 무조건 하늘로부터 사랑을 더 부어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사랑을 깨우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 영 속에 사랑이 있는 것을 알고 이 사랑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내 가슴에도, 내 몸으로도 사랑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것이 비결입니다.
3. 우리는 우리 속에 부어져 있는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굉장히 단순한 얘기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구하는 기도만으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사랑하라고 했지 사랑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을 구하는 기도만 하려고 합니다. 내 영에 사랑이 부어져 있는데 내 영을 의식하지 않고 자꾸 자기 혼을 살핍니다. 지식, 감정, 의지를 살피니까 내게 사랑이 없는 것 같아 끊임없이 사랑을 구하기만 하고 사랑을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거듭난 사람이라면 가슴으로는 못 느낄지라도 그의 영 속에는 사랑이 와 있습니다. 내 속에 사랑이 있으니까 그걸 사용하는 것입니다. 딴 사람은 볼 수 없으니까 내 속에 있는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을 나타내고 작동시키기 바랍니다.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 사랑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는데 거기서 세 대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사랑이란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상태이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좋아한다는 것이나 애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사람들 모두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덕이 아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듯이 이 본성적인 좋아함도 죄도 아니고 덕도 아닌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행하는 일이 악이 되거나 덕이 된다.”
좋아하는 것하고 사랑하는 것이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괜히 좋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괜히 싫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기호에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은 이 사람이 내게 좋게 느껴지건 싫게 느껴지건 상관없이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친절하고 관대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고 의지입니다. “난 저 사람이 좋다.” 이게 덕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나는 저 사람이 별로 안 끌리고 싫다.” 이것이 미움이 아닙니다. 어떤 음식은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가 좋을 수도 있고 싫을 수도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죄도 아니고 덕도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 어떻게 느껴지든지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사람을 다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다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도 꿀꺽 삼키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의 유익을 위해서 그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에게 관심을 주고 사랑하듯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앉아서 사랑의 감정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들 중에는 선천적으로 냉정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위장이 좋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듯 선천적으로 냉정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를 위한 규칙은 단순하다.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는지 여부로 근심하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사랑하듯이 행동하라. 그렇게 행동하는 순간은 우리는 지극히 위대한 비밀을 발견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다 보면 곧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세속적인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친절하게 대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사람들을 더욱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심지어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들조차도 좋아하게 된다.”
의지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감정적인 사랑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의지적으로 먼저 사랑하면 감정적인 것이 옵니다. 자꾸 내가 “좋다, 싫다” 여기에 매이니까 사랑이 발휘되지 않는 것입니다. “좋다, 싫다” 이런 감정이나 느낌, 모든 것을 초월해서 내 속에 사랑이 있는 것을 믿고 의지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나쁜 감정은 다 사라지고 좋은 감정이 옵니다. 느껴지는 사랑도 옵니다. 이것이 영적인 순서입니다. 느낌이 먼저 오는 게 아닙니다. 의지적인 실천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란 문제로 근심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지만 자기 안에서 전혀 그런 감정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앞에서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듯이 행동하라. 가만히 앉아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고 자신에게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행동하겠느냐고 물어라. 그리하여 대답을 발견한 후에는 그대로 행해라. 사람은 누구나 항상 헌신적인 감정들을 소유하지 못한다. 혹시 우리가 헌신적인 감정을 소유할 수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감정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거나 인간을 향한 것이거나 기독교의 사랑은 의지의 행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사랑하는 듯이 행동하세요. 누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시무룩하게 보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그 사람을 향해서 표정을 밝게 갖고 웃으세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말을 바꾸세요. 퉁명스럽게 말하지 말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세요. 행동을 바꾸세요. 가서 손을 잡아주시고 표현하세요.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이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손으로 무엇을 잡고 힘쓰면 근력이 자라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사랑을 사용함으로써 사랑이 자라나는 것이지 하늘에서 사랑이 팍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주어진 사랑을 자꾸 사용함으로써 키워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속에 여러분이 거듭날 때 주어진 사랑을 일깨워 사용해서 그 사랑을 자라가게 하시기 바랍니다.
릭 조이너가 쓴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을 보면 한 번은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을 때 유명한 종교개혁자와 기독교 저술가와 대형교회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이분들이 제일 작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릭 조이너가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니까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는 천국에서 큰 자, 왕 노릇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 무리 가운데 사도 바울이 있고 또 그 가운데 자기가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릭 조이너가 최초에 본 환상 속의 사람이었는데 실존 인물이었습니다. 릭 조이너는 세계적인 선지자인데 하나님께서 릭 조이너에게 환상 속에서 두 사람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사람은 아주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교회 안에서 쉬지 않고 사람들을 심방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은사와 사랑으로 충만했고 헌신적이고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거지고 방랑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데 이 사람 앞에 새끼 고양이가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새끼 고양이를 죽일 듯이 차려고 하다가 자기를 억제를 하더니 퉁명스럽게 새끼 고양이를 발로 옆으로 밀어버리고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릭 조이너에게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나를 더 기쁘게 하고 있느냐?” 그러니까 릭 조이너가 첫 번째 사람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아니다. 두 번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대대로 예수님은 믿은 훌륭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뜨겁게 예수님을 믿는 부흥하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주 훌륭한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100이라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75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25개 사랑은 잠재적으로 파묻어놓고 사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태어날 때 귀머거리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대를 받고 춥고 어두운 골방에 갇혀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8세 때 당국에 의해서 발견이 되어 이 기관에서 저 기관으로 옮겨 다니다가 귀머거리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놀림 받고, 얻어맞고 그 기관에 있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쫓겼습니다. 그래서 걸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는 이것을 극복하도록 3개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 분노심이 가득한데 앞에 새끼 고양이가 뛰어 들어와서 발로 차서 죽이고 싶었지만 받은 3개의 사랑을 전부 사용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퉁명스럽게 새끼 고양이를 옆으로 밀었습니다. 그런데 릭 조이너가 천국에 갔더니 그 거지가 바울과 같은 수준의 영광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옆에 수많은 천사들이 그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안젤로는 내가 그에게 준 적은 것에 너무나 충성했기 때문에 사랑 셋을 더 주었다. 그는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 다 되었지만 내가 준 사랑을 모두 사용하여 자기 것이 아닌데 손을 대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는 빈병을 모으고 가끔씩 잡일을 시키는 사람을 찾아가 생기는 돈으로 먹을 것을 샀다. 그는 들을 수는 없었지만 글 읽는 법은 배웠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복음전도지 한 장을 보냈었다. 성령이 그의 마음을 열어주었고 그는 자기의 생애를 내게 전부 바쳤다. 나는 다시 그에게 나의 사랑을 갑절을 더 주었고 그 후 그는 모든 것을 충성되게 사용했다. 그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비록 빈곤 속에 있었지만 그가 번 돈의 절반을 사용하여 길모퉁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세 개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는 그걸 다 사용하여 분노심을 죽이고 새끼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 개의 사랑을 더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전부 사용해서 배고파서 굶어죽을 지경이었지만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또 그에게 사랑을 더 주셨습니다. 그는 그 모든 사랑을 전부 사용해서 자기도 먹을 것이 없었지만 자기 수입의 50%로 전도지를 만들어서, 길가에서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사랑 충만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실천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부어달라고, 달라고 하지만 사랑도 공짜가 아닙니다. 은사가 공짜가 아닌 것처럼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요구할 것이요, 적게 맡긴 자에게는 적게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눅12:48) 은사만 달란트가 아니고 사랑도 달란트입니다. “너는 사랑을 끊임없이 구하는데 사랑이 충만한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네게 이미 주어진 사랑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네 속에 있는 사랑을 파묻어두지 않느냐? 그 사랑을 사용해라. 그 사랑을 나타내라. 내게 와서 ‘더 많은 사랑을 부어주소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더 뜨겁고 충만한 사랑을 부어주소서.’ 기도할 게 아니라, 네가 거듭날 때 네게 부어진 사랑이 있지 않느냐? 그 사랑을 어떻게 했느냐? 그 사랑을 지금이라도 사용해라. 그 사랑을 지금이라도 일깨워라.” 은사 뿐 아니라 사랑도 달란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구해서 충만하게 받았느냐? 이것 가지고 내가 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사랑을 얼마나 충실히 사용하고 얼마나 작동하고 얼마나 그 사랑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나타내느냐 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안젤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릭 조이너가 주님께 “안젤로는 몇 사람을 주님께 인도했습니까?”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바울과 같은 영광을 누리는 천국의 왕이라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전도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한 사람이다. 나는 그를 격려해주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 한 사람을 그에게로 인도해주었다. 그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어 다른 영혼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길모퉁이에서 몇 년이라도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 전체가 내게 그를 이곳에 데려올 것을 간청하고 있었고 나도 그가 자신의 보상을 받기를 원했다.” 릭 조이너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왕이 되기 위하여 그가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충성하였다. 그는 나와 닮게 될 때까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결국 순교자로 죽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극복하였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순교자가 되었습니까?” “그는 나의 사랑으로 세상을 이겼다. 그토록 적은 것으로 그렇게 많이 이겼던 사람은 너무 적었다. 나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한 세기 전만 해도 왕들도 부러워했을 만한 편한 집에 살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반면 안젤로는 추운 밤 종이 상자 하나를 너무 감사한 나머지 그것을 내가 임재하는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과 한 개를 가지고도 내 백성 중 어떤 사람이 진수성찬에 대하여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즐거워하였다. 그는 내가 그에게 준 모든 것에 충성하였다. 그것이 비록 내가 너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에게 준 것에 비하면 너무 하찮은 것일지라도”
릭 조이너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는 추위 속에 의식을 잃고 있었던 한 늙은 주정뱅이를 살리려다가 동사하였다.” “주님, 저는 그가 진정한 승리자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가 여기 온 것은 공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도 순교자로 간주됩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안젤로에게는 그가 살아왔던 매일, 매일이 하나의 순교였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겨우 생존할 정도만 유지하였고, 그의 생명을 필요로 하는 친구를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하였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3) 그러나 네가 사랑으로 네 자신을 주게 될 때 그것은 많은 것이다. 안젤로는 매일 죽었다. 그는 그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을 때 그는 언제나 자신을 성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로 여겼으나 실상 그는 가장 큰 자 중에 하나였다. 네가 이미 배운 대로(편집자 주: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에 나옵니다.) 스스로를 가장 큰 자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자로 여김을 받는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안젤로는 한 교리나 그의 증언을 위해서도 죽지 않았으나 나를 위하여 죽었다.”
은사, 능력을 얼마나 받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크게 쓰임 받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안젤로는 가장 적은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너나 다른 사람들에게 비해서는 하찮은 것이 그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충성했다. 모든 것을 사랑했고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완전히 남을 위해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천국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진짜 야망을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시기하고 무엇 때문에 욕심 부리고 무엇 때문에 남과 비교합니까? 자기의 부르심에서 만족하세요. 사람과 견주어서 큰 자가 되거나 위대한 자가 되려고 하지 마세요.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여러분이 부르심 받은 데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을 다 사용하세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세요.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을 다 사랑하세요. 그것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비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안젤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얼마나 충만히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얼마나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물론 사랑을 구하는 기도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끊임없이 실천하면서 해야 합니다. 한 달란트를 파묻어두면 한 달란트 그대로 있습니다. 두 달란트를 장사하면 네 달란트가 됩니다. 다섯 달란트를 장사하면 열 달란트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 달란트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을 구하지 말고 그 사랑을 드러내십시오. 그 사랑을 사용하세요. 내게 주어진 사랑을 충실히 사용하면 내 속에서 사랑이 커 가게 됩니다. 내 속에서 사랑이 자라가게 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기 원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만 있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영 속에만 있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디도서 3장 3-5절에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하는 자이었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는 하나님의 나타난 사랑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전 절인 디도서 3장 2절에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 우리가 구원 받았다.” 이 말을 쓴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사랑을 나타내라고 그렇게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낸 것이 너희의 구원이 되었다면 너희도 이제 하나님처럼 너희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자들이 되라.” 이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에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소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하늘에 기록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때 보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사랑을 부음 받았고 여러분 속에 얼마나 사랑이 충만하였는가. 주님은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하면 여러분이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을 나타냈나, 안 나타냈나 입니다. 그 사랑을 얼마나 나타냈는가.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사랑을 나타내서 얼마나 사람들을 섬겼나, 얼마나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고, 따뜻한 말을 했는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얼마나 다른 사람의 아픈 문제를 가지고 같이 기도해줬는가? 얼마나 그들을 선대하고 도와줬는가? 그것을 보십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이 중요하다는 얘기만 끊임없이 들으면서 사랑 콤플렉스를 가지고 지음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으니 느껴지지 않더라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영에 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로 여러분 속에 있으면서도 전혀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깨우고 사용하세요. 어떻게 깨웁니까?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세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느낌이 안 와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사람을 쳐다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진짜 거듭난 사람이라면 여러분 속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속의 사랑을 사용하세요. 우리는 이 땅에서 얼마나 사랑을 사랑했나. 이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평가받을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냐가 아니고 주어진 사랑을 얼마나 충실히 사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사랑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천국에 가면 그런 사람이 하나님 노릇하는 겁니다. “너는 얼마나, 몇 명을 전도했느냐? 얼마 기도하고, 얼마 헌금했느냐? 몇 가지 은사를 받았느냐? 환상을 얼마나 봤느냐?”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땅의 관심, 사람들의 관심입니다. 하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몇 명 전도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전도할 때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느냐? 얼마나 헌금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헌금하면서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이끌려서 했느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주님의 새 계명이 사랑이라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주일성수, 십일조하면 뭐합니까? 사랑하지 않고 기도, 전도 많이 하면 뭐합니까? 지금 우리가 왜 숨을 쉬고 사는지 아세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사랑으로 만져주라고.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셨다면 사랑했을 사람들을, 발을 씻겨줬을 사람들을, 섬겼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사랑해라고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도도, 기도도, 십일조도, 예배도 사랑의 수단입니다.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진짜 믿음은 사랑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기름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은 사랑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
우리는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지 않으면 실패자입니다.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기억하시고 은사와 마찬가지로 사랑도 달란트입니다. 많은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하고 100개 받아서 3개 정도 사랑하면 천국에 못 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부어진 사랑을 땅에 파묻어 두지 말고 열심히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주어진 사랑을 성도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목사님을 향해서도 사랑하세요.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선물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 선물 하나를 해도 성도들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정말 목사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드리는 선물은 목회자가 압니다. 그러면 목회자가 선물은 받고 싶지 않는데 그 사람의 마음을 받습니다. 선물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는 사랑을 봅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목회자를 향한 존경심이나 존중하고 감사하는 마음, 사랑을 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을 꼭 선물이 아니더라도 미소, 표정을 통해서 목회자들에게 나타내세요. 설교할 때 찡그리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사랑을 나타내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받지만 말고 사랑을 나타내세요. 집에 가서 남편, 아내, 부모, 자녀에게 사랑을 나타내세요.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원수와 핍박자에게도 우리는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했으니 여러분의 행동들이 사랑의 실천, 사랑의 나타남이 되게 하세요. 우리의 모든 생각, 말, 행동, 돈 씀씀이가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되면, 사랑의 표현이 되면 그런 사람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이 적다는 사랑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 속에 있는 사랑을 다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사랑이 이미 부어져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랑을 구하고만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속에 사랑이 부어진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부어졌고 사랑이 우리 속에 온 것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사랑도 달란트란 것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사랑은 경쟁할 문제가 아닙니다. 몇 달란트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충성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안젤로처럼 적게 받았을지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줄 믿습니다. 아버지, 오늘부터 사랑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목사님에게, 남편과 아내, 부모, 자녀, 형제, 직장 동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열심히 사용하게 해주시옵소서. 안젤로처럼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가 지금 숨을 쉬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숨을 쉰다고 진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있는 것을 믿습니다. 사랑은 살아있는 것이고 삶입니다. 형제, 이웃,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영적인 삶인 줄 믿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