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분별

영분별의 원리 (변승우 목사님)

하늘감동 2011. 3. 12. 12:55

영분별의 원리

2011. 3. 6. 주일 1부

  마 7:15-23

 

  저는 그 강사의 책을 3권 다 읽었는데, 거기에는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이 일부 있었지만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큰 오류들은 없었고 전반적으로 굉장히 은혜로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오셨던 국제적인 강사들마다 다 메일을 보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는 분이 한 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폴 키스 데이비스 목사님이 시드 로스의 프로그램에 그가 출연한 것을 얘기하면서 “시드 로스는 철저하게 영분별하고 믿을만한 사람만 프로그램에 내보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답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정보 내에서는 강사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회 직전에 세 번째 책이 나왔는데 제가 굉장히 피곤한 상태에서 꼬박 하루 반 동안 그 책을 다 읽었습니다. 역시 그 책에도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크게 문제될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은 환상적으로 은혜롭고 좋아서 저는 강사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강사를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알아봤는데도 왜 분별할 수 없었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분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분별에 대해서 쉽게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보고 응답이 오는 대로 판단하는데,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생사람 잡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고, 그것은 양신역사의 주된 패턴입니다. 어떤 저자가 “어느 교회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보니까 어떻더라.”고 하던데 그것은 교만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계시적인 은사가 열렸다고, 기도 잠깐해본다고 해서 전지하신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부분적인 것이지 전지하신 하나님처럼 누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12장에 명시된 것처럼 예언의 은사와 영분별의 은사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가 열렸다고, 기도해보고 응답받았다고 영분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의 은사는 용도가 영분별이 아니고 성도들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기도해보고 누구를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입니다.

 

  영분별은 대부분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봐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만나서 말을 들어봐야 되고, 지켜봐야 되고, 겪어봐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 강사에 대해서 처음부터 분별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무엇이 영분별인가? 인간은 혼을 가지고 몸 안에 사는 영이다. 그러므로 영분별은 바로 사람 분별이다.”-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143p-

 

  영분별은 사람 분별입니다. 그래서 미키 로빈슨은 “분별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특정한 선지자의 삶에 대해서 잘 아는 누군가를 가지는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기도해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데,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강사를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그를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건 신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실수도 아니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영분별이 말씀이나 예언이나 기적의 출처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고, 영분별은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에 대한 분별입니다.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분별입니다. 영분별은 그 사람의 영에 대한 분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강사의 책과 간증을 읽었어도, 그 사람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분별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이것은 분별력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이것을 탓할 수 없습니다.

 

  그 강사를 만난 후에도 집회를 좀 더 빨리 중단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변애경 목사가 받은 계시도 매우 부분적이었고, 그런 부분적인 정보를 가지고 많은 장점과 강점을 가진 상대를 평가하는 것은 절대로 지혜가 아닙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항상 반대편의 가능성이 남아있었습니다. 워낙 책의 내용과 간증들이 엄청났고 일부 메시지는 환상적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강사는 대부흥, 거대한 하나님의 운동을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신중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저를 머뭇거리게 만든 것은 릭 조이너가 지적한대로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서 쓰시는 사람들이 다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점이 보였지만 그 강사가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고 그래서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심사숙고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강대상에서 자기 정체를 드러낸 그날 지체하지 않고 바로 집회를 중단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이번 문제와 결정에 대해서 절대로 여러분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평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욕심을 가지고 이번 집회를 열거나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더 알기 원했고, 주님과 더 가까워지기 원했고, 주님을 사랑하기 원했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결코 인간 능력 한계 밖의 이유로 일어난 일로 우리를 판단하시거나 책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1. 영분별의 원칙은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돈이 목적인가?

  영분별은 사람 분별인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의 동기입니다. 우리는 영분별을 시도할 때 그의 동기가 사랑인가, 탐심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영분별의 가장 중요한 기준과 원칙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여기서 “속에는” 그의 동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숨기고 있는 목적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시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동기, 목적이 무엇인가, 그 사람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강사 뿐 아니라 한국의 적지 않은 부흥사들과 특히 영성운동을 주최하는 상당수의 목사들이 복음사역이 아니라 사실은 복음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목사가 아니라 사업가에 더 가깝습니다.

 

  탐심은 그냥 죄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이 그 속에 있으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돈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에서 너희 주인을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돈을 밝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입니다. (사56:11)

 

  그 강사는 설교할 때마다 헌금 얘기를 먼저 꺼냈습니다. 그의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는 메시지에 관심이 없고 돈을 뜯어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벧후2:1-3) 예수님은 탐심이 가득한 자와 동역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에게 나타난 예수는 가짜 예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성품에 위배됩니다. 예수님은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벧후2:14-16, 유 4, 12)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목회자는 그 강사처럼 호화로운 삶이 필요 없습니다. 제트기 2대나 3억이 넘는 승용차가 필요 없습니다. 거대한 저택이 필요 없습니다.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그는 입만 열면 자랑하고 자기를 높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제게서 많은 돈을 끌어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아첨했습니다.

 

  디다케 12 사도 교훈집이란 문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으로 나에게 돈을 주시오 말하거나 숙식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면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영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이 내게 나타났다. 천사가 내게 나타났다. 이런 계시가 임했다.’ 그러니까 그 강사가 이번 집회에서 한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의 표징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경계하십시오.”

 

  자기가 제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체가 이미 미혹된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심판 전에 그런 것을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교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미혹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좋은 예언을 하다가 그가 원하는 대로 거액의 돈을 지불할 의사가 없자 금방 말을 바꿔서 저주를 퍼붓는 것을 보십시오. 그는 돈을 위해서 예언한 것입니다.

 

  그 강사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 같더니 며칠 지나자 본색이 드러나서 계속 자기를 전했습니다. 계속 자기를 증거하고 높였습니다. 집회 기간 동안에 그 강사가 얼마나 저를 조정했는지 모릅니다. 거액을 자기에게 주기 위해서. 누구든지 예언을 빙자해서 돈을 탐하면 그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분별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설교가 훌륭하냐, 예언이 정확하냐, 기적이 일어나냐? 이런 것을 묻지 않으시고 동기가 사랑이냐, 탐심이냐? 예수님은 이것을 기준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탐심을 영분별의 기준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영분별 해야 합니다.

 

  미혹되는 사람은 좋은 것만 기억합니다. “말씀이 좋고 기적이 일어났는데.” 영분별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분별은 동기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탐심이 있느냐? 예수님이 하셨던 같은 방법으로 영분별 해야 합니다. 탐심이 있으면 무조건 가짜입니다. 탐심이 있으면 발람처럼 예언이 맞아도 무조건 가짜입니다. 거짓 선지자입니다. 탐심이 있으면 가룟 유다처럼 병 고치고 귀신 쫓고 기적이 일어나도 거짓 사도입니다.

 

  그 강사는 집회 두 번째 날부터 아무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사역을 위해서 헌금을 걷었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두 번이나 헌금을 걷게 했습니다. 이미 헌금을 했는데 다시 헌금을 걷게 하고, 성도들에게 헌금봉투를 흔들라고 하고 강단 앞에 나와서 헌금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덕이 안 되는 곤욕스러운 방법으로 헌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처음에는 우리 교회 건축헌금을 걷는 줄 알았습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집회가 끝나고 강사에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제 말을 듣기는커녕 한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저를 가르쳤습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한 시간 동안 자기 합리화를 했습니다. 논리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보통 교만하지 않으면 강사로 와서 담임목사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큰믿음교회는 희생적인 헌금을 해서 자기에게 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께 순종했을 뿐이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이 교회 강사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부로 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비유하기를 음식점에 주인이 있지만, 정부에서 와서 위생 상태를 검열해서 음식점을 계속하게 할 수도 있고, 문을 닫게 할 수도 있는 것처럼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권위를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통 미혹이 아니고, 보통 교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집회 중단을 고려했는데 사람들도 많이 오고, 관심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저는 지혜롭게 덕을 끼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강사에게 다섯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는 강대상에서 다시는 헌금 얘기하지 말라. 우리는 헌금을 목적으로 집회하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집회 연장을 상의 없이 스스로 강대상에서 말하지 말라. 집회 연장하는 것은 우리 문제인데 강사가 상의 없이 말하는 것은 월권이다. 세 번째, 자신을 가리켜서 왕, 황제라고 말하지 말라. 자기가 천국 열쇠를 받았다고 했는데, 베드로도 천국 열쇠를 받았지만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했지 베드로가 왕, 황제로서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하지 않았다. 네 번째, 성부 하나님이 직접 오신다는 얘기하지 말라. 성부 하나님이 직접 오시면 시내산 처럼 난리가 나지 자기 혼자 보겠느냐? 그건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에서 주장하는 내용이지. 다섯 번째 지식의 말씀을 사용할 때 “신디아”니 “안나”니 외국 이름 말하지 말라. 여기는 한국이다. 민망하니까 이름 좀 부르지 말라. 저는 이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이 너무 문제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집회를 바로 접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강사가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집회를 계속 진행했던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만 주의하면 집회가 큰 문제는 없겠다고 생각하고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집회 중단을 선언하던 날, 그 강사가 갑자기 교만과 탐욕에 충동이 되어서 약속을 어기고 자기에게 거액의 헌금을 해야 한다는 궤변을 공갈, 협박까지 섞어 가면서 강대상에서 30분 이상 떠들어댔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기 때문에 즉각 집회를 중단한 것입니다. 그 이후 절대다수의 성도님들이 집회 중단에 대해서 공감하거나 순복했습니다. 집회 중단에 대한 안내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 불과 수 시간 만에 지지와 감사를 표현하는 꼬리말이 2000개 이상 달렸습니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큰믿음교회의 저력입니다. 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참 감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새벽인가 제가 거기다가 꼬리말을 달았습니다. 위에 나오는 사랑과 감사와 존경,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 올려드립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을 받지 않았지만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그래서 “2000개 이상의 꼬리말에 나오는 감사와 존경, 칭찬, 존귀 모든 것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주님 홀로 이것을 받으시옵소서.” 그러니까 마음이 다시 평안해졌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마21:1-3)

 

  그 강사가 이 말씀을 근거해서 집회할 때마다 돈을 뜯어내려고 합니다. 이 구절만 보면 그럴싸하지만 예수님은 그 강사처럼 가는 데마다 돈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 강사가 수많은 비행기 회사에 돌아다니며 비행기를 얻은 것처럼,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두 부류입니다. 룰이 될 수 있는 말씀과 예외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거듭남, 회개, 거룩, 사랑, 용서, 겸손, 기도, 믿음, 순종, 전도 등 이것들은 룰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해야 합니다. 누구나 회개하고, 믿고, 거듭나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나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또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아라.” 이것이 땅 밟기입니다. 기드온에게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들고 소리를 질러라.” 그리고 “여리고 성 마지막 돌 때 외쳐라.” 이것은 집회 때 자주하는 함성입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 위에 일곱 번 엎드렸습니다. 엘리사는 물 근원에서 무당처럼 소금을 뿌렸습니다. 예수님은 침으로 흙을 이겨 소경 눈에 발랐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룰을 삼으면 안 됩니다. 소경 볼 때마다 침 뱉으면 안 되고, 죽은 아이 위에 무조건 엎드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땅 밟기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외적인 것을 일반적인 룰로 삼는 것은 성경을 오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야가 수넴 여인에게 떡과 물을 달라고 요구한 것과 예수님이 주인 허락 받지 않고 나귀를 풀어오라고 한 것도 예외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룰이 아닙니다. 이것을 룰로 삼으면 우리는 교도소에서 만나게 됩니다. “저기 가면 벤츠가 있을 것이니까 끌어오너라.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우리는 다 교도소에서 구역예배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강사는 정확한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예외적으로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탐심에 사로잡혀서 습관적으로 이런 일을 했습니다. 두 번째 날 그가 말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여섯 번째 날에 주님께서 이런 헌금을 하라고 하는데 여기는 두 번째 날부터 하라고 그러십니다.” 그는 어디 가든지 이렇게 하는 종교 사기꾼입니다. 제가 집회를 중단하던 날 그가 호텔로 가면서 자기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큰믿음교회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진 목사님이 호텔에 갔을 때, 그는 교회가 집회가 중단된 비상 상태인데도 교회나 사람 걱정, 하나님의 영광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질문은 모두 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호텔 비는 누가 내느냐, 비행기 값은 대주느냐? 책 인세와 사례비는 주느냐? 양복 맞춘 것 주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그의 관심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페이스 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마음이 상해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가로막는 사악한 지도자들이 지긋지긋하다.” 사악한 지도자는 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나타났는데 큰믿음교회는 2~3년 안에 망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 자는 가짜 사도입니다. 교회에 휠체어 타고 온 병자들은 일어나지 않고, 집회 온 암 환자들은 낫지 않은데, 저와 함께 식당에 가면 “식당 2층에서 예수님이 암 환자를 고치고 계신다.” 길거리에서도 “예수님이 저 곳에서 암 환자를 고치고 계신다.” 이런 말을 남발했습니다.

 

  앞으로 2~3 주 영분별에 대한 말씀을 계속 증거하겠습니다. 그런데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 말씀만으로도 이미 영분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진실을 안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결정에 진심으로 순복하지 않은 일부 극소수의 성도는 자신의 교만과 불순종을 회개해야 합니다. 바른 정신과 영을 달라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진짜 양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극소수의 그분들은 회개하고 바뀌어야 합니다.

 

   이번 문제에 대해서 큰믿음교회나 저는 비난 받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케네스 해긴이나 롤렌드 벅도 아니고 그냥 계시를 가지고 누구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교회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계시를 가지고 상대를 완전히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그냥 참고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분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동기는 선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헌금을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우리는 양심껏 집회를 중단했습니다. 이것은 모범적인 것이지 비난 받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른 것이고 정당한 것입니다.

아침에 밥 존스 목사님이 제게 메일을 보내서 그 강사에 대한 모든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시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큰믿음교회 영분별을 바로 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에 예언이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참된 선지자도 때로는 예언이 틀립니다. 예언이 맞느냐, 틀리느냐로 참 선지자를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바른 분이고 존경할만한 분입니다. 저는 밥 존스 목사님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나 평안했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강사와 함께 있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것은 영의 문제입니다. 영분별은 영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어느 예언이 하나 틀렸다고 그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밥 존스 목사님이 그 강사의 저주를 파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어느 정도 작동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데이비드의 저주를 파쇄해야 된다. 그러면 그것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영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묶임을, 결박을 받을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성도, 교회들을 놓을지어다. 데이비드 집회로 통해서 온 모든 혼탁한 기름부음은 예수님의 권세 있는 이름으로 끊어버리노라. 맑고 깨끗한 새로운 기름부음을 부어주시옵소서. 불안과 초조, 긴장은 예수 이름으로 제거될지어다. 데이비드가 내린 모든 저주는 예수 이름으로 소멸될지어다.”

 

  실은 큰믿음교회에는 이미 부흥이 왔습니다. 그 부흥이 훨씬 커지면 되는 것입니다. 큰믿음교회처럼 울고 기도하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큰믿음교회처럼 그렇게 찬양하고 그렇게 말씀 잘 듣는 교인들이 어디 있습니까? 더 큰 부흥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작은 부흥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대부흥과 대추수가 오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부흥은 가짜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방문입니다. 부흥은 설교, 예언, 기적이 아닙니다. 부흥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가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방문, 성령의 쏟아부어주심입니다. 성령이 강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없어도 사람들이 녹아지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부흥입니다. 여러분, 진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진짜 부흥을 주십시오. 주님, 우리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주님의 강력한 임재가 없는 부흥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와 영광이 가득한 참된 부흥을 원합니다. 그런 부흥을 부어주시옵소서.”

 

  앞에 말씀드린 대로 제가 2000개의 꼬리말에 대한 영광을 모두 주님께 돌렸을 때 제게 그리스도의 마음들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의 심장을 구했는데, 예수님의 심장을 갖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리고 겸손의 겉옷을 새롭게 입는 것이다. 그리고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이 지식이 아니라 제 심령 속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 가지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혹시 잘못된 판단을 하셨던 분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시고 제게 바른 정신, 마음을 주시고, 진짜 양이 되게 하소서. 기도하시고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던 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려움을 파쇄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두려움, 답답함, 억압, 매인 것, 마음의 고통을 느꼈던 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쇄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고 내쫓으십시오. 그리고 데이비드가 교회에 대해서 비난하고 저주한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파쇄하십시오. 그리고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주님, 먼저 제 마음에 부흥이 오게 하소서. 대부흥이 오기 전에 먼저 제 심령 속에 주님의 임재하시고 성령이 부어지시고 주님의 마음이 부어지시고 주님의 영광이 임하게 하소서. 그래서 대부흥에 쓰임 받을 수 있게 하시고 대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주님, 제게 임하소서.”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