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람 신앙위인전

[스크랩]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2/27 주일 1부)

하늘감동 2011. 3. 13. 20:58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2011. 2. 27. 주일 1부

 

사람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자기를 모릅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몰랐습니다. 자기들이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특별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하나님의 종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해서 “회칠한 무덤, 뱀들과 독사의 새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대표적인 악인이 창녀가 아니라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악인은 성직자 중에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세나 엘리야보다 크다는 말입니다. 만약 세례 요한이 구약시대 사람이었다면 변화산상에 세례 요한이 나타났을 겁니다. 그 당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도 자신을 몰랐습니다. 바리새인이 세례 요한에게 “당신이 선지자냐?”고 물을 때 그는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했습니다. 또 “당신이 엘리야냐?”라고 물을 때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리라고 한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악한 사람도 자기가 얼마나 악한지 모르고, 선한 사람도 자기가 얼마나 선한지를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것과 사람이 사람을 보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외모로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외모는 얼굴 생김새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즉 그 사람의 학위, 재산, 명예, 직위, 인격, 선행 등이 다 외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을 보시고 그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그 사람의 동기를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고 중심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중심에 관심을 가지고 중심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심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른 중심 = 동기(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 겸손

  중심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동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욕심, 명예욕, 권력욕, 야망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왜 목사가 되려고 하고, 부흥을 원하고, 은사와 능력을 구하는가?’ 그 동기를 보십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이 사람은 겸손한가, 교만한가?’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어떠한가? 겸손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완전히 인정하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두 가지를 보십니다.

 

  다윗은 중심이 바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게 덤빈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다윗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서 달려가면서 한 말이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나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꿈이 엄청나게 큽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을 꿈꿉니다. 일반 사람들은 감히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전적 의지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다윗과 사울과의 관계를 보면, 교만하고 타락하고 귀신들린 사울이 다윗을 수십 번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 부었다는 것, 그 권위를 보고 다윗은 두려워하고 신비에 가까운 겸손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셨을 때 다윗 속에 있는 올바른 동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겸손을 보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은 받지만 나중에는 다 변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중심이 바른 사람만 끝까지 갑니다. 말씀 잘 알고, 기도 많이 하고, 능력 받고, 인격이 훌륭한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언젠가는 넘어지고 변질되어서 알맹이는 빠져나가고 모양만 남습니다. 그러나 중심이 바른 사람은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심이 바른 것이 사활적,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사들, 신학자들, 교단들, 한기총까지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하나님처럼 중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외모를 봅니다. “저 사람은 거칠다. 인격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완벽해야 택하고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택하고 쓰십니다. 목사, 신학자, 교단들의 시각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와 핍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중심이 바른 사람을 선택하시고 쓰시는가?

  사울은 중심이 바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효성스러운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 삼고자 할 때 숨었습니다. 인격적이고 관대하고 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백성들이 죽이자고 할 때 만류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많은 목회자들, 특히 강해설교자들 중에서 사울과 같은 모습은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너무 좋고 인격적이고 덕이 있지만 중심이 바르지 않은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장점이 있고 인격이 훌륭하다고 해도 중심이 바르지 못한다면 사울처럼 높아지고 한 때 크게 쓰임 받을 수는 있지만 종말이 비참합니다.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사울처럼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하나 왕이 되고 나면 교만해집니다. 은사 받기 전에는 겸손하나 받고 나면 교만해집니다. 성공하기 전, 장로, 권사 되기 전에는 겸손하나 성공하고, 장로, 권사가 되면 교만해집니다. 교회 부흥 전에는 겸손하나 교회가 부흥하면 교만해집니다. 이것이 중심이 바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 즉 변질되는 것입니다. 중심이 바르지 않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변질됩니다. 중심이 바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서 서서히 변질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수많은 목회자, 신학자, 신자들에게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장점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다윗의 형들은 가문을 빛내게 하기 위해서 키우고, 다윗은 천한 양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중심이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돈, 명예, 권력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전에 구했던 한 가지를 다시 구하리니 여호와의 전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양치기 소년 시절 때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이 왕이 된 후에도 전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심이 바른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범죄와 변질은 다릅니다. 변질은 하나님 앞에 중심이 바르지 않게 되는 것이고, 범죄는 유혹을 받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보기에는 같은 죄로 보여도 어떤 사람은 버리고, 어떤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이 바른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돈, 명예, 권력, 쾌락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만족하고 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심이 바른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을 살핍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변명하지 않고 인정했습니다. 중심이 바른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하나님을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옵니다. 이것이 중심이 바른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중심이 바른 사람을 선택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중심이 바르지 않은 자들은 부, 승진, 명예, 권력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돈, 명예, 권위, 성공이 그를 변질시켜 버립니다. 중심이 바른 사람만이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자기 길을 갑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와 씨름해야 합니다. 단순히 화를 내지 않는 것, 덕을 끼치는 것보다, 물론 그런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야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고 쓰임 받으려면 근본적인 문제와 씨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중심이 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살필 때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하나, 거룩하나, 순종했나? 이런 것만 살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높아졌나, 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있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교만한가, 겸손한가? 이것을 근본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에 있어서 깊은 회개를 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면서 “주님, 제 동기를 바로 잡아주시고, 제 동기를 깨끗하게 해주소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 빛을 비추셔서 교만이 얼마나 주제넘은 것이고 합당하지 않은 것을 보게 하시고 사람 앞에서 말, 행동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낮아지게 하소서. 교만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깨지고 변화되면서 나아가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중심이 바른 것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사랑과 중심을 보시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서 정말 보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가 진실로 겸손한가. 이 두 가지입니다. 상호보완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양들을 맡기시기 위해서, 사도로 세우시기 위해서 주님이 물어보실 때, 설교 잘하느냐? 믿음이 크고 능력이 나타나느냐, 게으르지 않고 충성되게 할 수 있느냐? 이런 것을 물으시지 않고 집요하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 한 가지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제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니까 “됐다. 합격이다. 다른 거 볼 것 없다. 됐다.” 그 다음에 “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게 주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심입니다. 중심은 사랑이고 그 다음에 중심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겸손에 대해서도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역대하 16장 9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그게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온 지구를 두루 살피면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성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 마음이 자기에게로 향합니다. 내 지혜, 내 지식, 내 재능, 내 학벌, 프로그램, 수단, 노력, 인격! 이것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들 너무 많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다 교만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은 교만의 의미로, 어린아이는 겸손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왜 지혜와 슬기가 교만의 의미로 쓰였는가?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슬기를 의지하기 때문에, 인격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 노력이나 성실성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교만입니다. 왜 어린아이는 겸손인가? 어린아이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의존적인 것입니다. 어른들은 독립적이고 어린아이는 의존적입니다. 어린아이는 밥 먹는 것, 옷 입는 것, 생활하는 것 모든 면에서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이고 부모에게 의존적입니다. 그게 겸손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호와의 눈이 온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찾고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꾼 꿈처럼, 투명한 성경을 보여주면서, 완벽하게 진리가 해석되어 있는, 도서관 분량의 그런 진리들이 해석되어 있는 그 성경을 보여주면서, “내가 이 은사를 누구에게 줄까? 미국에서도 찾았고, 러시아에서도 찾았고, 유럽에서도 찾았고, 아시아에서도 찾았고, 전 세계에서 사람을 찾았는데, 그리고 너를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이 은사를 주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은 실제입니다. 왜 하나님이 발견했는가?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철저하게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분별하는데 철두철미하게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신학이나 신학교나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내게 말씀을 주사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다 이게 하나님께 의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붙잡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역대하 16장 9절의 말씀 그대로, 내 전심이 주님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보신 것입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온 땅을 두루 살피면서 수많은 신학자들도 본 거예요. 수많은 신학박사들도 보고, 수많은 강해설교자들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저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여기 전심으로 나를 의지하는 사람이 있구나, 말씀을 이해하는데 말씀을 분별하는데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전심으로 그 마음이 내게 향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부어주겠다. 그러니까 너에게 말씀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그 이해력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게 겸손인 것입니다.

 

  중심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통해서 확증되는 것입니다. 역대하 16장 9절 말씀을 통해서 다시 확증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미가 6장 6-8절 말씀에서 또다시 재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먼저 기본적으로 요구하신 게 뭐예요? 공의를 행하는 것.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여기 머물렀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여기 머물렀습니다. “공의를 행하며”, 의를 행해야 된다. 그거 누가 몰라요? 그거는 초등학교 윤리 교과서만 읽어도 아는 것입니다. 바르게 행해야 된다, 바르게 살아야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거 원하십니다. 우린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20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 그랬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가장 큰 계명을 물었으니까 여기서 답이 딱 끝나야 되는데,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느니라.” 그랬습니다. 왜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자를 사랑하면” 이게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사랑이다!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다. 단순히 공의가 아니다. 단순히 바르게 사는 게 아니다. 단순히 바르게 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저 세리 같지 않고 창기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하나이다,”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 세리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 창기에 대한 사랑이다.’

 

  먼저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것이요,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도 사랑하는 것이요, 원수와 핍박자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다. 우리가 원수와 핍박자까지 사랑할 때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가짜는 아니라도 불완전한 것입니다. 원수와 핍박자까지 사랑해야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와 핍박자까지 사랑할 것을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불완전한 삶을 청산하려고 합니다. 이제 저도 온전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제 저는 이단사냥꾼들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제 이단사냥꾼들을 위해서 기도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들을 축복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제 삶 속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매도하고 우리교회에 대해서 거짓말을 지어내는 모든 것, 국민일보를 비롯해서 모든 언론들도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축복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완전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한 자가 되라.” 우리의 사랑이 더 완전해져야 됩니다.

 

  그 다음에 여기 마지막으로 나오는 게 뭐예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거 같은 말이잖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바르게 살아야 된다.’ 그거 누가 몰라요? 그건 기본으로 다 아는 것이지.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잖아요. 사랑이잖아요. 그 다음에 겸손이잖아요. 사랑이고 겸손입니다. 이것이 중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는 방식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언행을 단순히 보고 계신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중심이 뭡니까? 그것은 마음의 청결하고 다른 것입니다. 그거 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중심은 마음의 깊은 곳입니다. 마음의 속입니다. 마음에도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가, 이것은 마음의 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겉 부분입니다. 마음의 속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중심입니다. 그 중심은, 그 마음의 뿌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손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바로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저를 볼 때도 그것을 보시고, 여러분을 보실 때도 그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여러분의 마음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 뿌리가 나무 전체의 특성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전체의 특성을 좌우할 수 있는,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 마음의 뿌리가 되는 그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사랑이라야 됩니다. 그것이 겸손이라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기름 부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십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기 조금 전에 읽어드린 말씀이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과 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세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들으셔야 됩니다. 사랑만 가지고는 하나님과 함께 행할 수가 없습니다.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할 것이 아니냐.”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입니다.” 예수님 안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이용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여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권위를 갖지 않고 우리와 그냥 동행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리와 동행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와 동행할 때는 그분이 우리의 친구시더라도 우리의 주인으로서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는데 주님이 나와 동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어도, 기름부음이 있어도, 은사가 있고 능력이 있어도, 열정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깊은 주님을 의지하는 겸손이 없으면, 그가 설교할 때 실제적으로 주님이 같이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임재가 있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주님이 같이 하지 않습니다. 치유사역을 하던지, 예언사역을 하던지, 무슨 사역을 하던지 실제적으로 주님이 같이 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게 뭔지 아세요?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집회들을 참석해보면, 굉장히 말씀이 은혜로울 수도 있고, 굉장히 예언이 정확할 수도 있고, 굉장히 치유가 강력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또는 굉장히 영적인 현상이 동반될 수도 있는데 집회를 참석하면서 마음이 공허해집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사가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특정 집회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집회를 참석해 보면, 다른 건 다 좋은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를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 주님의 깊고 강력한 임재가 느껴지질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에 만족이 없습니다. 집회를 참석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영에 만족이 와야 됩니다. 주님을 비로 표현하잖아요. 심령을 만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밭으로 표현하잖아요. 모세가 신명기에서 말하잖아요. 가는 비고, 늦은 비고. 이게 다 뭐예요? 우리 심령을 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에 기갈이 있습니다. 우리 심령에 갈망이 있습니다. 우리 심령에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심령에 갈급함이 있습니다. 그걸 만지는 것입니다. 이슬처럼 임해서, 가는 비처럼 임해서, 봄비처럼 임해서 그래서 우리 심령이 촉촉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표현된 것을 보면, 우리 심령이 물 댄 동산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마음의 씨앗이 뿌려지면 지식이 아니고, 말씀이 지식으로 들어오면 발아가 안 됩니다. 뿌리가 안 나오고, 싹이 안 나옵니다. 지식이 아니고 우리 심령이 물 댄 동산같이 되면서, 그 말씀이 내 심령 속에 깊이 들어와서 심겨지고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은 내가 그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사람이 마음에 생각한 것을 감찰하나니.”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회개로 이끌고 정말 결단하게 이끌고 정말 기도하게 이끌고 정말 변화되게 이끌고 그래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집회들은 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강사가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그건 강사가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예언이 정확해도 그건 강사가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기적이 일어나도 강사가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집회를 참석할 때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정말 겸손하면 말씀이 단순히 빛과 같이 임하는 게 아니고, 모세가 말한 것처럼 가는 비와 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아침 이슬같이 심령을 촉촉하게 적시면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면서 비와 같이, 이슬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잖아요. “여호와께서 봄비같이 임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소낙비같이 임하실 것이다.” 그게 하나님이 실제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실제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에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이슬, 봄비, 소낙비같이 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굳은 마음, 강퍅하고 교만한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는, 풀어지게 할 수 있는, 사막과 황무지와 같은 우리 마음을 옥토와 같이 만들어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속에서 점점 이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설교, 예언 잘하라고, 병 잘 고치라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과실을 많이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요15:)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든 사역, 설교, 예언, 치유, 기적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다.” 돈과 이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것이 영분별입니다. 영분별은 교리가 아니라 열매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 설교, 예언, 신유, 축사 사역을 통해서 열매가 맺혀지는가? 가짜에는 열매가 없지만 진짜에는 열매가 나타납니다. 사과를 열리면 그건 누가 우겨도 사과나무입니다.

 

  국제적인 강사가 올 때마다 큰믿음교회에는 열매가 맺히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성도, 안내원, 찬양팀, 예언팀, 중보기도자들을 보면 열매가 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기억하십니다. 통합, 백석, 현대종교, 국민일보가 아무리 우겨도 큰믿음교회는 진짜입니다.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이 가짜가 아닌 이상 큰믿음교회는 진짜입니다. 왜? 열매가 맺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믿음교회는 성도들에게서, 교회 돌아가는 모든 것에서, 재정 씀씀이에서, 집회운영 방식에서, 모든 면에서 열매들이 맺혀지는 것을 봅니다. 사랑의 열매,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절제의 열매가 맺혀지는 게 보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영분별은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는 왜곡, 거짓의 열매가 있습니다. 큰믿음교회가 잘못됐다면 지적해서 회복시키고 함께 가야할 텐데 반드시 이단으로 만들려고 하는 살인자의 영. 그것이 마귀입니다. 그것이 교단들과 한장총, 한기총, 국민일보에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들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일은 하는 자는 마귀의 자식입니다. 큰믿음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 대형교회들은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여러분, 다 헛것이고,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로 쓰임 받는 것도, 복 받아서 재벌이 되는 것도, 인기를 얻는 것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외모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시는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실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보십니다. 그래서 중심이 바른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장할수록 점점 욕심이 없어지고 본질적인 것에 관심이 갔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해지고 정결해지고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심이 바른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중심이 바른 사람이 되면,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다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전에 구했던 것,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여전히 집중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통해서 뿐 아니라 제 영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중심이 바른 것이 무엇인지 중심이 바른 것이 얼마나 중요한고 필요한 것인지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부족한 면에 대해서는 탄식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만 그 면에 대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성장할수록 점점 욕심이 없어지고, 점점 주님을 사모하게 되고, 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고 더 겸손을 원하고, 주님께 더 인정받는 사람 되기를 원하고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내게 남는 것은 주님의 인정뿐이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뿐, 내 속에서 이뤄지는 주님의 형상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그런 마음으로 견고해지고 더 순수해지는 것입니다. “주님,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제 의가 아닙니다. 주님, 저도 작은 유혹을 느끼고,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변화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사모하십시오. 그런 것을 사모하고 들은 말씀 기억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출처 : 큰믿음설교 받아쓰기
글쓴이 : 주님생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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