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메시아닉 교회란 무엇인가?
제1장 메시아닉 교회(Messianic Church)란 무엇인가?
얼마 전 상영된 ‘회복’이라는 영화는 우리 사회에 메시아닉 주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메시아닉 주’(Messianic Jews)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을 말하는데, 현재 이스라엘의 인구 0.002%에 해당하는 약 1만 5천 명 정도가 메시아닉 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메시아닉 주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과 함께 원죄, 사탄론, 그리스도의 대속, 삼위일체 등의 기독교 교리를 그대로 믿는다. 하지만 토라(율법)을 준수하며, 안식일과 유대교의 절기 및 토라가 규정한 각종 의식을 준수하는 등 유대교의 관습을 그대로 따른다. 한편 ‘메시아닉 교회’란 메시아닉 주로 이루어진 교회뿐만 아니라, 비유대인 즉 성경에서 말하는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 중에서 메시아닉 주가 하는 대로, 즉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각종 기독교의 교리들을 믿으면서도, 유대교의 절기나 의식, 그리고 유대교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근래 이들은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이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메시아닉 주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며, 그 부흥은 급격하고 광범위했으며 수 백 년 지속되다가 교회에 이교적인 요소들이 유입되고, 점차 유대적인 요소들을 잃게 됨으로써 그 부흥도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특히 콘스탄티우스 대제에 의한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선포는 부흥이 사라지게 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폭발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교회 부흥은 메시아닉 교회 형태로의 교회 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로 하여금 유대교의 안식일과 절기, 음식에 대한 규례, 그리고 유대교의 다양한 관습을 지키도록 유도하는데, 무엇보다 토라의 회복이 마지막 시대의 대 부흥을 가져올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메시아닉 주와 같은 신앙으로, 교회는 메시아닉 교회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신앙 체계를 달리 하는 일이며, 교회 형태를 크게 변환시키는 것이므로 신중해야 하며,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사실 그들의 주장은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교묘하게 뒤섞여 있고, 성경의 메시지와 상반되는 것들이 아주 많다. 실제로 메시아닉 교회는 복음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교회를 말살할 위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을 밝혀내고, 교회로 올바른 대처를 하도록 돕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초대 교회에서의 메시아닉 주
『메시아닉 교회』의 저자인 하이들러는 초대 교회에서 일어났던 부흥이 유대적 뿌리를 간직하고 있던 메시아닉 주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그 부흥이 쇠퇴하게 된 원인을 교회 내의 유대적 뿌리를 부정한 것에서 찾고 있다. 그 유대적 뿌리가 무엇인지는 그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잘 나타나 있다.
“제국 거의 전역에 걸친 교회들은 여전히 사도들로부터 받은 유대적 유산들을 지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계속 안식일과 절기들을 지켰고, 율법의 가르침을 강조했으며, 또한 많은 곳에서 유대인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대적 뿌리는 주일 대신에 안식일을, 현재 교회에서 지키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대신에 유월절을 비롯한 유대 절기들을 지키고, 또 율법을 지켜야 하며, 하나님의 구원사에 교회 대신에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부흥이 메시아닉 주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당시의 대 부흥과 같은 부흥을 기대하려면 메시아닉 교회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에 나타난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빛은 투명하다. 그러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가지 색을 띤 빛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렇듯이 초대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메시아닉 주도 분석을 해보면 그 안에 다양한 그룹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세분화하는 작업을 마친 후에 오늘날의 메시아닉 교회의 특성을 갖고 있는 메시아닉 주들이 초대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보면, 현대의 메시아닉 교회가 주장하는 바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메시아닉 주는 율법을 비롯한 유대적 뿌리에 대한 반응이 모두 일정했던 것이 아니었다. 메시아닉 주는 율법과 유대교적 전통들에 대한 입장에 따라 다음의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율법 아래 있는 메시아닉 주
팔레스틴에 분포되어 있던 메시아닉 주 가운데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이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발생한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대표단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사도행전 15장),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에게 제출했던 복음을 사도들에게 제출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사도행전 21장), 그곳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메시아닉 주가 많았다는 기록들이 있다.
(행 15:4-5)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행 21:19-20)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복음의 진리 가운데서 행하는 메시아닉 주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믿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이들이다. 스데반,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바울, 그리고 구브로 출신의 바나바와 같이 헬라파 유대인 중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러한 입장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으로 교회의 시작 초기에 순교한 이인데, 순교한 두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이다.
(행 6:10-14)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스데반에 대한 기록이 사도행전 6장과 7장뿐이어서 그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는 율법에서 자유했고,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 행하는 자였다. 스데반에 비해 사도 바울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그의 서신서들을 통해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종종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고, 유대 절기와 관련된 구절들도 있다. 그래서 메시아닉 주나 메시아닉 교회의 회복을 주장하는 이들은 바울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그들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다음을 보자.
(갈 2:15-20)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위 구절에서 보는 것처럼 바울은 율법을 폐했고(18절), 율법으로부터 자유했다(19절). 그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대신에 복음을 전했고,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이를 강력하게 제지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율법이 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20절).
3)중도적 입장을 가진 메시아닉 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이런 입장을 가진 이들이 발견된다.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알았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승인해 주었다(행 15:8-11, 갈 2:1-9). 하지만 그들은 상황에 따라 복음의 진리 가운데 행하기도 하다가, 때로는 율법의 규례대로 행하기도 했다. 그 한 예를 보자.
(갈 2:11-14)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게바(베드로)가 이런 어정쩡한 입장을 취한 이유를 달리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분명히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박해를 비롯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메시아닉 주는 유대적 전통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메시아닉 교회를 추구하는 이들은 그들 모두가 유대적 뿌리를 견지하고 있는 자들로 ‘율법 아래 있는 자’였다고 전제한다. 그러한 잘못된 전제 아래서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같은 대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유대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닉 주를 본받아야 하고, 오늘의 교회에서 유대적 뿌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잘못된 전제 아래서 내린 결론은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의 부흥을 일으킨 주체는 메시아닉 주의 세 그룹 가운데 누구였을까? 세 그룹 모두 부흥의 주체 세력이었는가? 아니면 그중 일부뿐이었는가? 자세히 검토하면 메시아닉 주 중에는 부흥하는 교회를 요란케 하여 부흥을 훼방하고, 때로는 박해하기도 한 그룹도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2. 메시아닉 주의 각 그룹이 부흥에 미친 영향
초대교회의 대 부흥을 기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요한, 빌립과 스데반,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과 유대에 부흥을 주도했고, 빌립은 사마리아와 블레셋 지역에,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 사회에, 그리고 이방 세계에는 바나바와 바울이 부흥의 주역이었다. 즉 메시아닉 주 가운데 부흥을 주도한 그룹은 복음의 진리 가운데 행하던 메시아닉 주나 중도적 입장을 가진 메시아닉 주였다.
그렇다면 율법 아래 있었던 메시아닉 주는 부흥과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부흥의 주체 세력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초대교회 부흥의 결과물이었으며, 헬라파 유대인들이 주축이 된 메시아닉 주에 의해 이방 세계에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 부흥을 대적하는 자로 활동했다. 성경 곳곳에 그 증거들이 나타나 있다. 그 한 예가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탄생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에 ‘다른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요란스러워졌고, 바울이 전한 복음의 토대 위에 서 있던 교회는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를 감지한 바울은 편지를 보내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음을 말하고, 만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거짓 형제들이 전한 다른 복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의 신앙을 바로 잡으려 한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대적자들, 즉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1)교부 및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요란하게 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의 신앙을 변케 하려는 이들, 즉 바울의 대적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연구들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교부 시대와 종교개혁 기간 동안 일반적이고 거의 이의가 없었던 견해는 그 대적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 중의 유대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즉 메시아닉 주 가운데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과 예루살렘 사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는데, 먼저 바우어(F. C. Baur)는 그들이 야고보와 베드로의 묵인 하에 활동하였다고 하고, 라이트푸트(J. B. Lightfoot)는 바우어와는 다르게,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은 상호 인정과 용납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갈라디아에 들어온 대적자들의 활동은 독자적인 것이라고 한다.
2)메시아닉 교회의 주장
바울의 대적자들이 누구였는가에 대해 메시아닉 교회는 그들이 이방 신을 섬기는 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그들은 갈라디아서 4장 8절과 9절을 든다.
(8)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8절의 ‘그 때’는 곧 이어 나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란 진술에 비추어 볼 때, 9절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 섬기던 신, 즉 이방 종교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대적자는 유대주의자들이 아니라 이방 종교로 되돌아가, 그 종교의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도록 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 완전히 대립된다. 단순히 입장이 대립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앙 형태를 완전히 뒤엎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대적자들이 유대주의자였다는 입장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재확인하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했다는 것이 되지만, 대적자들이 이방 종교인들이라고 하면 오히려 유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메시아닉 교회는 10절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이방 종교에서 유입된 것들이라 해석하여, 현재의 주일과 부활절이나 성탄절을 거부하고 안식일과 유월절을 비롯한 초막절 등의 유대교 절기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물론 율법(토라)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메시아닉 교회는 전통적인 교회의 날과 절기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서 율법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이며, 교회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 아래 태동된 우리 개신교는 성경이 그렇다면 마땅히 개혁해야 한다. 하지만 8절의 ‘그 때에’는 율법 아래 있던 때를 가리키고, 9절의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역시 율법과 그 율법을 근거로 한 유대교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앞뒤의 문맥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용어인 ‘그 때’와 ‘이제’가 어떻게 쓰였는가를 보면 곧 드러난다.
①3:23절에서, 그 때는 ‘믿음이 오기 전’이며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갇혀 있는 때’를 말하고, 이제는 ‘계시될 믿음의 때’를 의미한다. “(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②3:24-26절에서, 그 때는 ‘율법이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를 인도하던 때’를, 이제는 ‘믿음이 온 후’이며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않는 때’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때’를 가리킨다.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③4:1-2절에서 그 때는 (우리가 비록 유업을 이을 자이지만) ‘어렸을 동안’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종과 다름이 없어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때’를 말하고, 이제는 ‘그 아버지가 정한 때’가 지나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서 벗어나 모든 것의 주인 노릇을 하는 때’를 가리킨다.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④4:3-6절에서 그 때는 ‘우리가 어렸을 때’로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하던 때’이며, 이제는 때가 차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그 아들의 영을 보내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때’를 의미한다. “(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⑤4:7절에서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 유업을 받게 된 때’를 말한다.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4:8절의 ‘그 때’는 믿음이 나타나기 전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던 때이며, 초등교사에게 초등학문으로 인도되던 때이다. 메시아닉 교회가 ‘그 때’가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이 이방신을 섬기던 때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문맥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8절의 ‘하나님이 아닌 자들’은 이방신일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비유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업을 이을 ‘아들’로 비유하고,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 혹은 주인에 비유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자들’은 그 아들이 어렸을 동안 맡아 가르치고 인도하는 초등교사, 후견인, 그리고 청지기들인데, 그것은 곧 율법이다. 이방신이 유업을 이을 자들이 어렸을 때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거나 후견인이나 청지기가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이 종노릇하던 아들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9절의 ‘천박한 초등학문’은 유업을 이을 자들이 어렸을 동안 초등교사로부터 배운 율법의 각 계명이나 유대교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메시아닉 교회의 주장처럼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믿고, 무법한 삶을 살다가 결국 불법을 저지를 수 있음에 대한 경고’라기보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살던 이들이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할례와 유대교 절기를 지키도록 하여 교회를 유대화시키려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이 사실은 갈라디아서에서 대적자들과 관련된 구절을 조사해보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①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했다(1:9). 이는 그들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이방 종교를 전파했다기보다, 구원에 이르게 한다거나, 구원을 온전케 하려 한다는 미명 하에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전했거나, 바울이 전한 복음에 무엇을 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대적자들을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로 지칭한다(2:4). 즉 그들은 표면적으로 볼 때 형제로서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이었음을 보여준다.
③그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꾀었고(3:1), 갈라디아 사람들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도록 하는 것에 성공했다(4:10).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이것들을 더한 것인데, 이로써 구원을 온전케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④그들은 할례를 행했다. 그러나 율법은 지키지 않았고(6:13), 지킬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할례를 행하는 이들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는 자라고 하였다(5:3).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갈라디아에 들어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케 하려고 했던 이들의 정체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으며, 할례를 행하고, 유대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율법은 지키지 않았다.”
3. 초대교회 메시아닉 주와 현대 메시아닉 교회의 비교
메시아닉 교회를 추구하는 이들은 초대교회 부흥을 주도한 이들이 메시아닉 주였다는 사실을 들어, 이 세대에 새로운 교회의 부흥을 위해 메시아닉 주가 가지고 있었던 삶과 신앙 형태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율법을 준수하고, 유대교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메시아닉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지 않고, 야고보와 베드로 같지도 않다. 부흥을 주도했던 메시아닉 주와는 전혀 다르다는 의미이다. 현대 메시아닉 교회들이 추구하는 신앙 형태는 갈라디아서에서 확인한 것처럼 오히려 교회를 요란케 하고, 부흥을 주도한 이들을 염려에 빠뜨리게 하거나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선교에 집중해야 할 이들의 에너지를 쓸모없는 일에 소모하도록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바울의 대적자들은 율법 준수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재의 메시아닉 주나 메시아닉 교회가 추구하는 형태의 신앙보다 오히려 덜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갈 1:7-9)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그토록 심한 저주를 퍼부은 것은 그들의 주장이 갈라디아 사람들로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이탈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한 복음은 이것이다.
①성령을 받은 것은 듣고 믿음으로다(3:2).
②예수를 믿을 때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며(2:20), 내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대신 성령을 좇아 성령으로 행하는 자가 되었다(5:24-25).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가 됨으로 믿는 자는 육체의 일을 그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갈 5:22-23).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다(2:16).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에 전한 복음이었고, 그가 그토록 자랑한 십자가 복음이다. 하지만 할례와 유대교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도록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향해 독설을 내뱉은 것이다.
하물며 작금에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대 부흥을 일으키고 유대인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복에 참여하려면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과 유대 절기와 각종 의식법까지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메시아닉 교회에 대해서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메시아닉 주의 신앙과 생활 모습을 닮기 위해 그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두렵고 놀랄 뿐이다. 이것은 미혹이다. 이 장에서 드러난 메시아닉 교회의 잘못은 다음과 같다.
1. 현대의 메시아닉 교회가 추구하는 신앙 형태는 초대교회 부흥을 주도했던 메시아닉 주의 신앙 형태와 다르다. 오히려 그들의 신앙 형태는 부흥하던 교회를 요란하게 하고, 다툼을 일으켰으며, 부흥을 저해하던 것이었다.
2. 메시아닉 교회는 ‘복음의 진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교회의 대 명제에서 이탈한 교회이다. 복음의 진리란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것이며,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며,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게 하려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교회가 유대적 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메시아닉 교회의 주장이 성경적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