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렉티오 디비나

하늘감동 2012. 6. 13. 08:48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 Caritas)란 


 

그 근원은 히브리어의 하가다(Haggadah)에서 유래된 것으로 자유로이 성경의 본문을 사용하여 성경의 내적의미를 발견코자 했던 예수님 시대의 경건한 성경공부의 전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구절이 마음속에 녹아들고 삶이 변화될 때까지 그것을 반복적으로 읽고 암송하여 이로써 사람의 마음과 존재 전체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였다.  오늘날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거룩한 독서, 영적독서)의 방법은 전통적으로 스콜라방식으로,수도원에서 하는 방식과 또한 스콜라 신학에서 하는 방식과도 차이를 보인다. 스콜라 신학에서 하는 방식은 본문을 읽기(lectio)-묵상(meditatio)-토론(disputatio)-강연(praecatio)의 순서로 한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토론에 있다. 이 토론의 주안정은 객관적 지식을 위한 분석과 연구이다. 그러나 〈보통 렉티오 디비나라고 일컬어지는 방식의 스콜라식 성경읽기는 읽기(lectio)- 즉,본문의 메세지를 주의 깊게 분석하고 (때로 주석도 동원 된다) 본문중에서 그 중에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에 대한 깊은 묵상(meditatio)-(마음의)기도(oratio)-관상(contemplatio)의 단계로 읽게 된다.〉이 방식의 강조점은 묵상과 관상에 있다. 이 묵상과 관상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하는 것이 (마음의) 기도이다. 그래서 렉티오 디비나를 의역할 때 "말씀으로 기도하기" 또는 "기도로 말씀 읽기"라고 해도 무관하다.  이 렉티오 디비나가 어떻게 관상으로 이어지는지를 실제적인 성경 구절을 통해 묵상하면서 실천해 보고자 한다. 수도원식의 영적독서는 묵상대신에, 마음에 주신  단어나 구절자체를 기록하여 지니면서 하루종일 읊조리고 음미하고 기도하고 그 안에서 쉼을 얻는  반추(ruminatio)가 그 특징을 이룬다. 그러므로 먼저 스콜라방식을 익히고 수도원방식을 적용함이 가장 추천된다. 영적독서의 궁극적 목적은 현존하셔서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진실로 알고 그분에 합당하게 사랑하고자 함에 있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물론 절대적으로 하나이다. 이세상에 살아계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며 친밀히 아셨던 아버지와의 깊고 친밀한 관계를 우리도 똑같이 알고 누리도록 성령께서 관상에로 초청하신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무릎위에 앉아 그분의 사랑과 위로와 치유하심과 힘주심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웃을 수도 공공연히 마음대로 울 수도 있고, 영혼 깊이에서 경배드릴수도 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을 알며 사랑함의 기도-관상에 대해 이해하고 렉티오 디비나에 접근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 <묵상-비췸/적용의 고백기도>--이제 성경 창4:1-15을 묵상해보자.
첫째, 읽기를 수차례 한다. 이 단계에서는 읽을 때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소리를 내어서 읽어야 비로소 귀가 듣게 된다. 눈으로 읽으면 당장에 성경구절을 머리가 분석하게 되지만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는 가능한 귀로 들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을 읽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소리를 내어서 읽으면서 통독을 한다. 통독을 하면서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한다. 전체의 내용을 분석적으로 명확하게 이해 할 필요 없이 이 구절들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는 느낌을 갖고 인정하는 고백을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단계는 묵상의 단계이다. 묵상은 한자어로 소리를 내지 않고 생각한다는 뜻이지만,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묵상은 조금 다르다. 〈묵상이란 뜻의 라틴어 Meditatio의 어원인 med라는 어근에는 중얼거림이나 읊조림이라는 한 가지 뜻만 아니라 치료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같은 소리를 반복적으로 중얼거려서 이 소리가 내면의 메아리로 바뀌게 되고, 내면에서 말씀이 메아리가 될 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묵상의 단계에서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자기 내면을 말씀 앞에 드러내는 일이다. 말씀이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이는 내 모습을 그 거울에 보여서 성찰 하라는 뜻이다. 말씀의 뜻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발견하라는 뜻이다. 히4:13에 기록된 것처럼 말씀의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자기 내면을 말씀 앞에 내놓기 위해서는 말씀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먼저 숙고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내면적인 성찰에 앞서 외면적이고 객관적인 말씀의 해석이 먼저 필요하다.〉 이 때는 가능한한 주석을 포함한 당시의 상황을 알기 위한 모든 자료를 동원하기도 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적극적인 <이냐시오식 묵상>을 취할 수도 있다.  그 당시의 상황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분의 주위 모든 사람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다고 상상력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내게 말씀하시는 분의 눈을 바라본다. 그분의 말씀에 나는 무엇이라고 말씀드릴 것인가?


 

#창4:1-15절을 읽으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일을 하기 위해 가인과 아벨의 심리적 분석을 먼저 해보자.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해보라. 가인이 자신의 제사는 안 받아들여지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졌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혹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불태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이다. 〈구약의 사상에 의하면 제물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축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아벨의 산업은 날로 흥왕해지는데 반해 은연중에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형 가인의 산업은 별로 늘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속에 숨겨진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가인에게는 분노가 생겼다. 왜 하나님은 동생의 제물은 받으시고(축복하시고) 자신의 것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가 생겼다.〉7절에 보면 하나님은 가인에게(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잘못된 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즉 〈가인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더 키우고 분노하고 마음의 도를 넘어 살인까지 하려고 한다.〉하나님은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분노를 중단할 것을 지적하신다. 즉 마음 안에 숨겨진 죄를 다스리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나 가인은 그 권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여기서 다시 자기 내면을 이 말씀의 내용에 드러내는 묵상을 해보자.〉자기 모습을 살펴보아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 가인에게 더 가까운지 아니면 아벨에게 더 가까운지를 생각한다. 만약 가인에게 더 가까운 모습이라면 어떤 점에서 가인과 같은지를 생각하라. 또한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잠잠히 생각해 보라.


 

<내 모습이 참으로 가인과 같은 마음의 상태라고 느껴지면 이때부터 성경 말씀은 더 이상 객관적인 문자가 아니라 살아서 직접적으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된다. 내가 가인이 되는 순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진 내 얼굴에 가인의 얼굴이 겹쳐지는 순간, 나는 말씀을 매개로 하나님 앞에 직접적으로 서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모습이 가인과 동일시되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면 가인의 이야기는 먼 남의 이야기가 된다.〉
〈내 얼굴에서 가인의 얼굴이 확인되면 이때부터는 자기 속에 숨겨진 죄와 분노와 경쟁심을 하나님 앞에 마음과 입으로 고백한다. 이 부분도 아주 중요하다. 마음으로는 자기 죄에 대해 인정하지만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주저하지 말고 입으로 자기 문제를 드러내어 말씀드려야 한다. 숨겨진 죄가 드러나고, 자기를 지배하던 경쟁심의 정체가 폭로되고, 이 경쟁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이고자 하는 미움과 분노가 있음을 고백하게 되면 비로소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된다. 진정으로 자기 내면에 숨겨진 가인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이를 자신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되면 더 이상 성경말씀이 단지 객관적인 글자나 분석을 통해서 해석해야 할 성경본문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서 죄의 사죄와 내면의 아픔들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치유할 것은 치유하시고, 책망하실 것은 책망하시고, 끊을 것을 끊도록 요구하신다. 이 과정에서 기도가 저절로 생긴다. 감사할 것은 감사하게 되고 간구할 것은 간구하게 되고, 결단할 것은 결단하게 된다. 가인과 같이 마음속에 숨겨진 경쟁의 패배로 인해 아픔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게 된다. 이 아픔의 원인이 경쟁에서 지게 된 것이고, 경쟁에서 지게 된 것의 원인의 하나님이라고 속에서 분노하던 것에 대한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가인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내 기도의 제목이 분명해진 셈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일이 하나있다. 묵상을 통해 내 자신을 분명하게 보고도 기도의 깊이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머리로 내 죄악과 잘못을 알지만, 그리고 가슴으로 내가 가인과 같다고 느끼지만 기도로 이 죄악을 말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머뭇거리지 말라. 머뭇거릴 때 심령의 아주 깊은 차원에서 심리적인 합리화-정당화-미화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발동될 수 있다는 점에 정말 주의를 해야 한다.〉내 잘못이 인정되면 그 어떤 경우에도 변명이나 핑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절대적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해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하면 그 상황 뒤로 내 죄는 숨어들어 간다.
자복의 고백기도로 내 죄악을 아픔으로 쏟아놓아 그 분께 말하고 나면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어진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남았다. 이 고백기도 까지는 지성의 기도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후로는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기도인 마음의 기도, 향심기도, 관상으로 넘어간다.  마음의 기도의 단계에서 우리의 지성은 한계에 도달한다. 말을 하려 해도 마음의 것을 표현하기에는 말문이 막히고 또 표현해도 실재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개입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아 그 영을 통해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롬8:17-26)  내게 사죄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그분의 매혹으로 끌어 당겨서 그분의 가슴에 안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권고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지만 동시에 한량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이제는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품어주시며 안아주시며 위로하시는 그분의 품에 겸손히 안겨서 그 사랑을 생각하며 음미하라. 참으로 기도의 깊이에 들어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도가 관상의 차원으로 변하게 된다. 묵상과 관상의 근본적인 차이는 묵상은 사람의 노력이 중요한 반면 관상은 오로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차원이다.〉이제는 내게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로 집중해야 한다. 그분에 대한 고백이 짧은 단어로 이루어진 기도가 되게 하라. 그리고 먼저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품에 안기며 그 기도에 집중하라. 자세를 곧게 하고 숨을 고르며, 마침내 기도가 침묵이 되게 하라.


 

***<마음의 기도(Oratio)>--마음의 기도는 성령의 기도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가 아닌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기도하심을 알게 된다.  믿음의 선배들은 다음과 같이 주님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부르짖으면서 성령님을 초청하며 나아갔다.  *아바 아버지, 저는 온전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 마음의 기도를 성령의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아바 아버지, 사랑의 불을 붙여주시고, 마음의 고통을 드러내 주소서. *아바 아버지, 제 마음을 두들겨 주소서, 주님의 능력으로 저를 깨뜨리고 때리고 태워서 새롭게 하소서...  진정으로 성령께 귀와 눈을 입술과 입과 혀를 완전히 의탁하고 그분이 인도 하심에 따라 자유롭게 그분의 임재하심 아래 전존재를 의탁한다.. 방언기도나 깊은 침묵의 내적기도, 때때로 무아경에로의 입신(성령의 강력한 임재에 의해 의식이 소실되거나 전신탈력으로 조용히 쓰러짐, 평강과 안정가운데에 드러누움 등..대개의 경우 신유가 동반된다..), 거룩한 웃음 등..은 마음의 기도의 다양한 형태 중의 하나이다.  영과 영이 통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난다... 다음의 순간, 묵상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을 그분께 아뢰고, 그분의 전적인 사유하심의 은총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며, 마음을 사랑하는 그분께 기도로 열어드린 우리는 묵상과 마음의 기도사이에서 때로는 오랫동안 서성일 수 있지만 마침내는 마음의 기도로 들어가게 되고 점차적으로 고백이 단순화 되어짐을 체험한다. 지적인 추리와 사고가 점점 줄어 들고 마음은, 보혈로 말미암는 담대함을 입고 단순하게 솟아나는 그분에 대한 사랑과 열망으로 점점 가득하게 되며 친밀한 내적 대화로 변화하며 하나님을 "아주 가깝게, 그러나 아직은 너무 멀게" 느끼면서 우리의 마음의 갈망이 홍수로도 끌 수 없는 사랑으로 변하여 타오르며 자발적으로 그분을 소리쳐 부르거나 마음의 불신앙과 자신의 자격없음과 무가치함을 깨닫고서 치유와 자비를 청한다. 즉 사랑의 열병에 들뜬 사람들이 으례 그렇듯이 온갖 어리석은(?) 약속을 그분께 다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은밀해진다.


 

***<향심기도>-마음의 기도와 관상을 이어주는 고리로 자연스럽게 추천되는 것이 예수기도로 대표되는 짧은, 향심기도-집중기도-구심기도(Centering Prayer)의 형테이다. 실은 이때부터 관상기도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향심기도를 수용적 수득적(Receptive Acquired) 관상이라 하며 이것은 믿는 이 편에서 사랑에의 초대로 부르신 하나님께, 성령님께 동의하며 그분과 함께 예수보혈을 의지하여 예수이름으로 단순한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을 열어드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단순히 그분의 사랑에로 자신을 열어드림에 다름아니다. 한편 진정한 관상을 주부적(Infused)관상이라 하며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오직 우리를 맞으러 나오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으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어지며 이 때 사랑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은밀한 신비를 드러내신다.
등을 곧게 하고 편한 자세로 눈을 살며시 감고 호흡을 고르면서, 아주 짧은, 사랑에 잠겨 있는 채로, 사랑하는 그분 자신을 간구하는 기도를(예-  주예수여, 자비를 ..아바아버지.. 하나님) 호흡에 맞추어 천천히 반복함으로써, 오직 신뢰와 믿음으로 호흡보다 가까이 계신 그분께 집중함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침묵에까지 나아가, 사랑과 믿음으로 그분 품에서 우리의 모든 생각들을 내려 놓고 - 마침내는 그분을 응시하는 우리의 인식조차도 내려 놓고-그분께 일치함으로 그안에서 쉬는 데까지, 관상에까지 나아가야한다. 일상적 사고인 욕조의 물을 빼기 위해서는 사고에의 집착이란 마개만 제거하면 된다. 예수보혈과 그이름을 의지하고 사랑이신 그분만을 단순히 집중하여 바라보고  모든 일상의 사고에의 집착을 그만두고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라. 그 때 관상기도로 들어가게 된다. --어쩌면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는 렉티오 디비나가 필요한 것이다. 


 


***<관상기도>--관상은 하늘보좌에 계시며, 만유에 충만하시며 동시에 우리의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은밀하게 내주하고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나아가 행하는 집중어린 응시요 경청에 다름 아니다.  마침내 사랑자체이시며 <나를 사랑하기를 배우고 내 사랑안에 거하라, 나를 알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은밀한 평강중에, 순전한 믿음으로  사랑스럽게 주께로 집중하며 올려드리는 우리의  영혼을 반가이 맞아 주셔서 그 영혼을 잠잠한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며 품어주시고 안아주시며 하늘안식을 주신다. 참으로 관상은 하나님 임재의 체험, 더 나아가 그보다 오히려 인식의 문제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기도하고 계심을 (롬8:26)인정하고 그분께 순복하는 의지로 동의 하면서 성령께 몰입되어 올려 드리는 하나님에 대한 애정어린 정신집중이며 가장 높은 형태의 기도로서, 이 때 우리는 그 품안에서 쉬고 우리안에 내재하여 계신 성령하나님께서 우주 삼라만상에 충만하신 하나님 자신께, 온전하신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신다...  내호흡보다 , 내 심장의 고동소리보다 가까이 계신 성령께 나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의탁하고 성령님의 주 되심을 동의하면서 나를 내려놓고 , 예수 보혈을 의지하여 예수 이름으로 존재의 근원되시는 아버지의 보좌에 나아가고, 바로 그 삼위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그리고 동시에 내 영의 중심에  있음을 믿음으로 인정하며, 고요히  나를 감싸 안으심을 느끼며 사랑과 신뢰의 마음으로 내 영의 중심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다.  관상을 <몰아의 기도>라고 표현했던 은둔자 테오판은 관상의 극치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한다. "관상 속의 영혼은 지극히 압도적인 영적 대상인 하나님에 의해 드디어 완전히 사로잡혀서 외적 침묵은 물론 내적침묵의 기도 속에서, 외부적인 일을 완전히 망각하고 시간 감각이나 의식이 완전히 부재하게 되는 상태, 즉 정신과 의식이 하나님 안에 완전히 몰입되어 정신이나 의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된다"... 관상 중에서는 마귀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생각해 보라.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쫓겨나고 하물며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온전히 가리우는데 어찌 마귀가 끼어들 수 있을까.  마치 태초로 돌아가 그분의 품에 안긴 것처럼- 태중의 아기가 엄마의 자궁안에서 잠들어 쉬는 것처럼- 믿는 우리는 그분안에서 쉰다. 온전한 만족, 기쁨, 평강, 사랑의 안식!!! 거기에서 모든 인간존재의 기본욕구(생존/안정의 욕구, 사랑/존중의 욕구, 힘/통제의 욕구)의 결핍이 충족되어지고, 원죄로 인해서 유발된, 욕구 불만과 결핍감으로 인해 생겨난 마귀의 흔적-거짓자아-은 해체된다. 거기에서는 <말>대신에 하나님의 첫 언어인 <침묵>만이 흐르고 우리는 <행함>이 아닌 그저 <머무름-거함>의 존재양식 속으로 들어 간다. 무념-무상-무시간성의 응시와 침묵이 전부인 <무지의 구름>인 그분의 품안에 고요히 잠기는 머무름. 강 위의 떠다니는 (생각인) 배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들은 그냥 흘려 보내고 (존재의 근원되신 주님인)강 자체를 사랑과 신뢰로 응시함... 에바그리우스가  "진정한 기도란 생각을 벗어남의 기도이다"라고 말한 대로, 보통의 생각과 느낌을 말로 표현하여 드리는 정신의 기도와는 달리,  관상기도는 <사고의 공백>이 아닌 <사고로부터의 이탈>, 즉 사고의 흐름을 신경쓰지 않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들어 올려 그냥 그 너머로 넘어가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몸과 영혼의 전존재를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분과의 신뢰로 충만한 사랑의 교제와 더불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은총이 주어진다. 이때 성령께서 이루시는 내적인 치유, 곧 우리의 원죄의 효과로 나타나서 우리의 예수님과 연합된 참자아로서의 삶을, 온전한 주님과의 일치를 방해하던, 참자아의 거짓껍데기요, 망상인 거짓자아-옛사람이요, 옛자아-의 모든 거짓된 행복프로그램의 거짓정서들이 부수어져 떨어져 나가는 사건이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게 되고 이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하나됨-일치가 우리 존재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실은 하나님의 현존이, 마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지만 불행히도  믿는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상은 하나님 현존의 내적 체험을 통해서 내주하시며 충만한 사랑이신 그분을 사랑하고 아는 데서 더 나아가 동시에 우주 삼라만상에 충만하신 그분을 어디에서나 체험하는 데로 우리를 이끈다. 바울사도는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것으로 하려면 그리스도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겸손히 그리고 기꺼이 열어드림의 감수성이 발전해야만 한다.<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하나님의 임재연습>인 관상기도를 날마다 드릴 때 우리는 거기에 흠뻑 젖어 들어가고 우리의 순간순간이 관상이 되고, 드디어 이제는 그 어떤 우리를 심히 혼란케 하는 외부자극에 대해서도 거짓자아의 거짓행복프로그램의 정서대로 반응하지 않고(이것이 원수마귀가 원하는 것이다) 내가 연합되어 있는 예수님-곧 참자아의 영의 중심에 계신 그분-을 느끼며 사랑이신 그분의 느낌대로-참자아의 느낌에 따라 반응하게 되는데, 그것은 내주하게 하신 성령님을 통해 믿는 우리에게 언제나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함에 다름아니다.  드디어 <살아계신 주께서 나를 통해 그분의 일상을 사신다>는 이 진리를 체득한다..


 

***관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관점만 말해보자.
첫째 관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가인의 경우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었다. 그 어떤 악한 죄도 용서 못 받을 죄는 없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가슴을 열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에서 참회이든 회개이든 정죄와 심판에서 끝나는 것은 옳지 않다. 관상의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 느껴지고 경험되게 되어있다. 또한 본래적으로 아무도 도중에 막는 것-거짓자아-가 없다면 사람의 의지는 무한한 사랑으로 향하고 사람의 마음은 무한한 진리로 향하도록 되어 있다. 더불어 이 거짓자아가 관상중에 깨트려진다. 이 일을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다.
둘째 관상의 기도는 오로지 그 목적이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있다. 교제안에 사람이 실제적으로 구하는 간구와 청원이 들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제의 깊이에서 보면 교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현존의 내적체험을 통해 모든 사람, 사건, 자연들 속에 계신 그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작동되기 시작하며 드디어 때로는 외적인 것들 속에서도,  일반기도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일치를 즐기는 체험을 하게 된다. 관상기도 중에 성령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휴식하고 영적전투를 벌이지 않는 위치에 우리를 데려다 주신다. 은밀한 기름부으심을 통해 우리가 지각 못하는 심적 수준에서 우리의 연약한 성질로 인해 생긴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신다. 마치 그것은 마취중에 수술받고 깨어난 환자가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고 깨어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관상의 내적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의 겨자씨가 자라나는 온상과도 같다.  관상기도는 우리의 내적변형의 과정을 촉진시키며 그로 인한 하나님과의 변형적 일치를 가능케 한다. 


 

가인에 관한 말씀의 묵상을 통해 가인과 같이 "표"(창4:15)를 받게 되는 것이 관상이다. 〈이점에서 관상을 너무 지나치게 타 종교의 수행방식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관상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얻게 되는 사랑의 표를 얻는 것이다. 창4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이 죄악에 대한 사죄의 표를 얻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새로워지는 것이 바로 관상이다.〉


 

렉티오 디비나의 영성이 많은 설교를 하면서 오히려 영적으로 지친 목회자들과 사랑의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자 하는 성도들을 새롭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묵상을 중심으로 말씀을 읽게 되면 기도의 하나님-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하나님 경험을 누구나  할 수 있고, 이제는 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만을 다루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