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주일에 대한 양용의 박사님, 칼빈, 가톨릭 교회의 견해와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안식일논쟁
주일에 대한 말씀이 구약의 안식일에 대한 규정처럼 명확하게 성경에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며, 초대교회에서부터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에 대하여 얘기하기 전에 한국 교회의 주일 성수에 대한 양용의 박사님의 견해를 먼저 인용해보겠습니다.
한국 교회는 스콜라 철학적(곧, 로마 가톨릭적) 안식일 엄수주의에 더 가까운 안식일/주일 신학을 견지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그리고 실제로는 다른 개신교회들도) 마태복음에 제시된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준수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지극히 결의론적이고 율법주의적인 방식으로 주일을 지키는 경향을 보여 왔다.
위 글에서 스콜라 철학적 안식일 엄수주의란, 주일을 안식일을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주장의 기원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십계명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안식일이 폐지된것은 7일째 되는 날짜에 불과하며, 노동의 금지라는 율법은 유효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향성 때문에 주일에는 돈을 쓰면 안된다, 운전하면 안된다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 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성은 비성경적인 것이며 사라져야 합니다.
안식일과 주일에 대하여 양용의 박사님은 이렇게 언급하셨습니다.
마태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성전이나(24장; 참조. 12:6) 그 결과 제사장 제도 및 제사 제도와 마찬가지로 그 성취 때까지만 구속력이 있다. 예수님의 안식일 성취 이후 모형으로서의 안식일의 기능은 안식일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구속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따라서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마태는 그의 공동체에게 안식일 준수를 그만두고, 그 대신 안식일의 주(主)이신 예수님 자신과 안식일의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님의 구속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도록 격려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공동체가 내부적인 율법주의의 위험과 외부적인 결의론적 바리새주의의 위협에 직면하여 있었다면 그와 같은 권고는 더욱 필요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내외적인 결의론적 율법주의는 예수님의 안식일 성취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망각하도록 하는 위험을 수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초대 교회에는 두 가지 위협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외부의 바리새주의 입니다. 이들은 정통을 표방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부에 있는 율법주의 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정신보다는 외양에 치중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안팎의 위협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 양용의 박사님의 견해입니다. 또 다른 글에 보면, 양용의 박사님은 안식일에 대하여 율법의 모형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안식일은 율법의 모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심으로, 안식일은 폐지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일과 안식일은 어떻게 다른가? 그에 대하여 칼빈은 이렇게 얘기하였습니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따라서 폐지되었다. 더 나아가서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편의와 질서를 위한 것이고, 일요일에 쉬는 것은 예배드리는 시간 확보를 위해 요청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저는 개인적으로 칼빈이 너무 많이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복된 날 이라는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가톨릭 교리에서는 주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으므로"(마르15, 42). 그리고 사흘째인 일요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마르16, 1). 또한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도 일요일이었습니다(요한
20,19-23 참조). 그러므로 이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는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주님의 구원사건인 '부활'의 축제를 기념하는 것은 1년에 한 번만 지내는 특정한 시기로 국한하지 않고, 7일 주기를 채택하여 부활의 날을 기념하도록 교회의 전통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연중(年中) 거행되는 '작은 부활 축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이 견해가 칼빈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은 매주 거행되는 부활절이라는 것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통하여 주일의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안식일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항상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것이 죄인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다음 바리새인들의 언급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마12:2)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12:10)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막3: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 5:10)
성경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바리새인들의 관심사는 온통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것이 죄인가 아닌가 하는 어떤 행동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의미는 망각한 채, 사람들의 죄를 찾아내어 정죄하는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 준수를 기준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폄하하고, 예수님을 판단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대해 생각할때도 이런 오류에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앞에서 나 자신을 점검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고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주일에 이런것을 하는것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태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하여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율법의 입법자이자, 재판장이십니다. 예수님만큼 율법에 대해 정확히 아시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는동안 그 율법을 존중하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이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고, 밀이삭을 잘라 제자들의 허기를 달래 주셨습니다. 이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마 12:11)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막 3:4)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눅 13:16)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요 7:23)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것이 합당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인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가 이와 같았을진대, 주일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어떻겠습니까? 양용의 박사님께서는 예수님과 안식일 그리고 주일이라는 책의 결론에서 주일은 율법의 족쇄가 아니며, 축제의 날이라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는 양용의 박사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이상으로 양용의 박사님의 견해, 칼빈의 견해,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 성경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논쟁을 통하여 주일과 안식일을 비교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