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모델 교회 - 그래함 쿡
거룩한 대면 -
교회 사역은 온통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사역 안에는 사역과 관련된 수많은 차이점, 닮지 않은 많은 사람, 은사 적용에 있어서 상충되는 수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혼란스러워질 수 있는 여지는 끝도 없다.
조직의 규모가 작은 경우에는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가능한 한 올바른 방향으로 가동시키기 위해 충분한 전략을 필요로 한다.
지나치게 큰 조직은 창의성, 자발성, 독창력을 잃게 할 것이다.
조직(organization)은 기업과 교육, 연구 분야에서는 질서를 창조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조직은 결코 질서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교회는 초자연적인 몸이다. 교회 안에서 지휘계통은 훨씬 더 모호해진다. 교회의 리더십은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리더십의 목적은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구비시키고 능력을 부여하여 사역을 위해 풀어놓는다. 리더십의 목적은 성도들이 본받고 따라올 수 있도록 리더가 먼저 하나님을 친밀하게 따라가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리더십의 목적은 우정과 신뢰, 적절한 체제 등을 통하여 촉진시키는 자가 된다. 이때의 체제는 어떤 군대조직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력하고 관계적인 책임성을 갖기 위해 필요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리더십의 목적은 순전하고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을 배출하는 데 있다. 독창력을 발휘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원수에게는 끝없는 골칫거리가 되는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목적이다. 만일 우리의 구조와 명령체계가 지나치게 완고하다면, 이는 원수로 하여금 우리의 효율성을 쉽사리 빼앗아가도록 할 것이다. 우리의 지도하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소그룹모임을 인도할 줄도 알고 구원과 치유와 축사를 풀어놓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면, 우리의 교회는 완전히 녹다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원수가 한 부분을 공격한다 할지라도 다른 부분에서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 한 구역이 핍박을 당하면, 다른 구역이 일어난다. 한 지점이 저항을 만나면, 어딘가 다른 곳이 튀어 오른다. 나아가 한 부분이 반대에 부딪히면, 우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조직이 지나치게 많으면 마귀를 실제로 물리치기 위한 초자연적인 예리함을 제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너무 많은 질서는 우리를 예측 가능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 만들어놓는다. 사람들이 질서나 구조, 보고체계, 소개방법, 명령체계, 책임질만한 조직적인 행동 등에 관해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들은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자발성과 명령, 창조성, 독창성 등은 결코 키워갈 수 없을 것이다. 이로써 결국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역이 아니라 사람 중심적인 사역으로 변해갈 것이다.
나는 조직을 좋아한다. 나는 구조의 힘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더 많은 지도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편히 안식하면서 평안함을 누렸으면 좋겠다. 나는 지도자들이 잠잠하게 머무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모든 일을 적절히 행할 수 있는 자들이 되면 좋겠다.
새로운 교회의 원형은 세상을 화나게 만들 것이다. 세상은 분노하면서 우리를 훈계하려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진리로 돌아가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가 익숙하고 예측가능하며 예리하지도 않은 모습이기를 원한다. 확실히 익숙함이란 좋은 것이다. 특히 익숙함이 교회가 지닌 성품일 때는 더욱 그렇다. 교회는 친절함, 선함, 사람들에 대한 사랑, 자비, 믿음직함 등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주님의 성품을 지니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곳에서 교회는 일종의 편의시설이 되고 말았다. 교회는 주긴 하지만 목소리는 없다. 위안을 주고 있지만 도전은 주지 못한다. 보이는 모습은 있지만 들리는 소리는 없다. 교회 안에서의 관용은 심지어 죄악까지도 묵인할 정도로 확장되었다. 죄를 처리하지는 않고 단순히 덮어두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반대나 적의에 부딪치면서 살지 않는다. 단지 세상에서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새롭게 떠오르는 교회의 원형은 제도적인 기독교 신앙이나 세상과 더불어 큰소리를 내며 충돌할 것이다. 원형은 일련의 연속물 중 첫 번째 것이다. 교회는 원래 가지고 있던 급진적인 날카로움을 다시금 회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단지 사용법만 달리하는 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급진적인 행위는 초자연적인 것에 기반을 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방식들에 순종함으로써 나온다. 이러한 행위는 성령님에게 받은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계획들을 따라가려는 열렬한 믿음에서 우러나온다. 그 믿음은 세상을 당황스럽게 하기 위해 기꺼이 어리석어 보이는 일마저도 무릅쓴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의 운동에서 개척자들이 될 것이다. 우리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온갖 심오한 변화를 경험케 하는 것이다. 구조, 비전, 성격, 집회의 효율성, 선교, 훈련, 제자 양육에 관한 포럼들이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리더십의 형태와 방법론에 있어 과격한 변화를 목격할 것이다. 진정한 개척자들은 다른 개척자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언가를 새롭게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새로운 원형과 함께 시험당하는 시기들을 통과하는 동안에, 우리는 반드시 두 종류의 청중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한 종류는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한 종류는 비평가들이다. 대부분의 비평들은 결코 상대방의 명예를 존중해주는 법도 없을뿐더러 무자비하다.
사실상 원형 교회의 계획단계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가진 원재료는 바로 사람들이여서 어떤 이들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희생과 고된 사역으로 곤란한 형편에 처해있기도 하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배움과 성장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낙심되는 상황들을 계속해서 뚫고 지나가는 일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믿는 것이며, 그 비전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이해되기 전까지는 결코 무언가를 행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주님은 결과들을 보면서 성공을 측정하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뿐 아니라 주님이 주신 비전에 대해서 드러나는 신실함을 보시면서 성공을 평가하신다. 개척하기란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에 대한 신실함과 관련된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신실하다. 자기보존이라는 잣대는 참된 개척자들과 다른 이들을 희생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확연히 구분해줄 것이다.
어떤 원형 교회는 폭넓은 사역의 기반을 구비한다. 반면에 다른 교회는 매우 협소한 영역에서 기능할 것이다. 어떤 교회는 여러 그룹의 사람을 돌볼 수 있지만, 다른 교회는 한 가지 형태의 사역에 기반을 둘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그룹, 예를 들어 젊은이 그룹, 마약과 관련된 사람들, 외국인 혹은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보살피는 몇몇 교회를 안다. 더 광범위한 범주의 그리스도의 몸에 존재하는 수많은 특색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