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돌아갈 수없는 철새

하늘감동 2015. 7. 24. 17:38

돌아갈 수 없는 철새

Jul 18, 2015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산책을 하다가 날개를 다친 철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날개가 부러져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철새 는 친구들과 함께 떠나지 못하고 홀로 남은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철새가 너무 불쌍해서 잘 치료해 주고 일 년 동안 보살펴 주었다. 이듬해 그 새의 친구들이 다시 돌아왔다. 새를 보호하고 있던 사람은 친구들과 함께 떠나도록 그 새를 날려 주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새는 이번에도 친구들과 함께 떠날 수 없었다. 날개는 다 나았지만 그 동안 너무 살이 쪄서 날아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날지 않으면 도저히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었던 예전과 달리, 인간에게 키워지면서는 편히 쉬면서도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만 결국 그 새는 날지 못하는 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새의 본분은 나는 것이다. 그러나 날기를 게을리 하면 서서히 날개는 퇴화되고 다리는 굵어지면서 날 수 없는 새가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하는 것이지만 서서히 그 일을 게을리 하다 보면 말씀도 깨닫지 못하고 기도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공통의 원리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경건한 사람들도 경건의 연습을 그치면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살 수 있다. 어느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의 고백이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바이올린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들이 안다." 그렇게 일평생 바이올린만 연주하며 사는 사람도 연습의 공백이 표시나기 마련인데,

하물며 완전히 숙련되지 않은 우리의 경건 생활의 공백이 우리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지대하겠는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무 리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는 한 가지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로 다져지지 않은 모든 신앙과 활동과 섬김은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다는 것이다. 어느 날 풍랑이 일어나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문제없는 형통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영적 부실을 모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누구보다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바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자만에 빠지게 된다. 교회에서 일꾼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하는 부분이 있다. 개인적인 경건생활이다. 새들 중에 날지 못하는 새들이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 들 중에도 경건 생활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신자에게 경건 생활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영향력을 공급받을 통로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력을 상실하였음을 뜻한다. 팔이 없고 다리가 없는 사람은 그래도 일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한 사람의 섬김은 그 일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한 섬김이 아니라 사람의 일일 뿐인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 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말씀과 기도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다. 아무리 시대가 지나가도 태양이 동쪽에서 뜨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쉬지 않는 말씀과 기도 생활이야말로 신앙생활의 기초이자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 이신 것 같이 말씀과 기도는 신앙생활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이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어렵다고 해서 선택사항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 생활에 실패하는 것은 그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두 번의 시도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말씀 생활과 기도 생활이 지속적인 습관이 되어 우리의 전체적인 삶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한두 주의 실천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의 피나는 싸움과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 속에서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몸에 배는 것이다. 날마다 꾸준히 경건의 연습을 계속함으로써 조금씩 더 깊이 우리의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지름길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매일 걷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간의 우선순위에 대해 결단해야만 한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새벽을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새벽을 깨우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가 아니다. 누구나 새벽을 승리하고픈 소망이 있다. 그 소망이 실천되지 못하고 다만 소망에 머무는 것은 그렇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곤하게 잠자고 싶은 욕구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이 자신에게 너무 불리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피곤하고 일이 많아서 새벽 시간은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가능한 시간은 언제 인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세상을 과연 이길 수 있는가? 세상일로 너무 뚱뚱해져서 기도의 날개가 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 없이 하루를 살기 쉽다. 그 하루가 한 달, 일년, 평생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시간을 희생시켜서라도 하나님부터 만나야 한다. /안인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