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성령충만해지는 비결
계속해서 성령충만해지는 비결
본문 말씀 :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마태복음 25장에는 신랑을 마중나간 열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그중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서 신랑을 제 때 맞이한 슬기로운 처녀였고 그중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해 기름을 구하러갔다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해 버림받는 미련한 처녀였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신랑을 맞이하는 데 필요한 등불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는가?’ 입니다. 여기서 등불의 기름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름이 충분하다는 것은 성령충만, 성령으로 충분히 채워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마지막 때 성령충만이 구원을 결정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교회의 부흥을 좌우하는 열쇠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스미스 위글스워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성령을 한잔 마셨다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항상 흘러넘치게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흘러넘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성령이 가득 차지 않은 상태에 머물지 마십시오.”
홀리 파이어 미니스트리스(Holy Fire Ministries)의 설립자인 버트 파리아스(Bert Farias)
“해긴 목사는 1987년 3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방문을 체험했다. 이 놀라운 방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강조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여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야 하며 이것을 가장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완벽하게 역사하기 위한 핵심 키이다. 당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질수록 당신의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 "당신의 관계와 교제, 당신의 건강, 당신의 재정 등 모든 것에 관여할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은 매일의 명령이다. 성령이 아닌 것으로, 저질의 것으로 당신을 충만하게 채우지 말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들의 치유제가 된다.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사랑과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성령께서 단순히 우리 안에 계신 수준이 아니라 성령께서 차고도 넘치도록 채워지고 충만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로써 성령의 임재(나타나심)와 능력과 영광과 성품(본성) 넘치는것, 압도되는 것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거듭나는 성령세례와 위로부터 능력을 받는 성령세례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요 7:37~39
37 명절 끝날 곧 끝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 (rivers of living water)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성령안에서의 한 경험은 영생을 받는 것으로, 성령이 당신의 영에 영생을 전이하시고
당신의 영과 더불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롬 8:16).
그 후에 또 다른 경험이 있는데, 이는 당신의 가장 깊은 존재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첫번째 경험, 즉 새로운 탄생은 무엇보다 당신 개인의 이익과
축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경험, 즉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에게서
흘러나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수 있게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의 후반부에서, 예수께서는 이 두 번째 경험을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짐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성령세례는 일회적으로 외부에서, 밖으로부터 받는 것, 오는 것이라면 성령충만은 성령세례 이후로 성령충만을 계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장착되어 외부, 밖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내부, 안으로부터 받는 것, 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시대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면 신약시대에는 신자들에 의해 성령충만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어떻게 받는 것일까?
1) 회개하고 믿는 자가 구원받은 후 (구하지 않아도) 선물로 주어집니다
사도행전 2:38,39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
사도행전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갈라디아서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2) 성령충만을 구하면 주십니다.
누가복음 11:13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야고보서 4:2,3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않음에 있다
3) 안수받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안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통로입니다. 사도행전 8:17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안수함으로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게 했고, 사도행전 9:17에서 아나니아는 회심한 바울을 안수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였고, 사도행전 19:6에서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을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
4 어떻게 하면 계속적으로 성령충만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이제 문제는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세례, 성령충만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5장 18절 말씀은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케네스 해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들을 격려하며 성령 충만하라고 썼습니다.(엡5:18) 그런데 사도행전 19장을 살펴보면 이미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바울은 엡5장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한 것일까요? 그 답은 그리스 원어 “충만”에 있습니다. 그리스 원어 충만의 뜻은 "지속적인 실행"입니다. 성령 세례를 통한 성령의 충만함도 있고 그외 우리 신앙생활 중 많은 여러 방법을 통하여 성령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단순 한 번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 동안 지속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만 가이슬러
에베소서 5장 18절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는 현재 시제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이다.
성령 충만은 한 번 충만해지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계속적으로 성령충만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까요? 성령충만받았던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회개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 죄사함, 구원받은 선물로 다시 성령을 받아야할까요? 아니면 신령한 목사님들을 찾아가 다시 안수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아야할까요? 오순절날 120명의 제자들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자 기도한 것처럼 다시 모여 성령달라고 기도해야할까요?
1) 술 취하지 않는 것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성령충만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의지 아래 있는 것이라면 성령충만해지는 것도 우리 의지 아래 있는 것이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이라면 성령충만해지는 것도 우리 손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핸드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어 어렵게 받아야할 이유가 없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면 성령충만해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우리 손에 있듯이 성령충만을 계속 받는 것도 우리손에 있다 성령충만은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가 아니다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견주어 말씀하고 있다
2) 하나님은 한 번 성령충만받은 후 다시 성령충만해지기 어려운 상태를 주셨을까?
한 번 밖에 충전할 수 없는 핸드폰
한 번 밖에 기름을 넣을 수 없는 자동차
한 번 밖에 성령충만 받을 수 없는 상태
3) 성령충만받은 후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 방언이다. 역으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게되면 성령충만해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방언을 하지 못 한다. 성령세례받고 성령충만해진 사람만이 방언을 한다.
성령충만을 방언을 부르고 방언은 성령충만을 부른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성령충만을 방언을 끌어들이고 방언은 성령충만을 끌어들인다
방언을 맛보지 못한 장로님은 방언기도 아니더라도 기도하면 된다는 주장
바울이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리라
영의 기도 다르고 마음의 기도 다른 것 체계가
그래서 휘발유 차량에 경유 넣으면 큰 일나고 경유 차량에 휘발유 넣어도 큰 일
4) 성령충만을 받는 것인가? 성령충만해지는 것인가?
어원
5)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것인가? 성령충만해지는 것인가?
성령 충만을 구하라 하지 않은 점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지말라 그리고 반대로 성령으로 계속적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육신적으로 술 취하는 것과 영적으로 성령에 취하는 것을 절묘하게 매치시켜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경 구절을 보면서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성령 충만함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 제게는 성령충만함은 저 높이 하늘에나 있는 것 같고 너무나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 불가능한 일을 주문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충분히 가능하기에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성령 충만을 계속적으로 받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은 우리 손에서 있습니다. 다 인정하시죠?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우리 손에 있듯이 성령 충만을 계속적으로 받는 것도 우리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손에 없는 것이라면 바울은 " 성령 충만을 계속적으로 구해라" 라고 말해야했을 것입니다.
구한다고, 원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막연히 비가 오기만을 바라는 천수답처럼 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자 안에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시스템을 구축하였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방언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지만, 또한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성령으로 채워지고 충전되는 일, 즉 성령 충만함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나 스미스 위글스워스가 이미 방언기도는 우리가 충전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주유할 때는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핸드폰 밧데리를 충전하는데 어느정도 걸립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데는 방언기도를 얼마나 드려야할까요? 개인마다 다르겠지요. 매일 순간마다 방언으로 충전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사람은 30분만에도 성령충만해집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1시간을 방언기도하면 그만큼 충전되는 것이고 2시간을 방언기도하면 또한 그만큼 충전되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기도는 성령님을 모셔들이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해 지루하거나 싫증낼 수 있습니다. 왜 해야하나 의구심이 생깁니다. 육신적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성경대로 믿고 성령님을 믿고 순종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전에도 방언기도의 유익을 알았고 방언기도 하지 않았냐?
알았죠? 그런데 방언의 여러 유익을 알고 경험하였어도
방언이 성령충만을 가져오는지는 미처 알지 못 했다
케네스 해긴 방언
만약 당신이 방언으로 많이 기도함으로서 성령 충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해 당신과 소통하실 것입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
저는 계속적인 충만함을 받아 아침, 점심, 저녁에 방언으로 기도할 것을 주장합니다
케네스 해긴
1시간 45분을 더 기도하자. 나는 물줄기가 터져 나오는 분출구를 터트렸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묘사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기름부음 가운데 내 영과 이성 모두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장래 일들을 보여주심으로 계시가 임했습니다 이러한 방언 기도는 마치 유정(油井)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유전업자가 유정을 파는 데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면, 모든 기름은 땅속에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유정을 터트릴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유전업자가 기름을 파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기름의 흔적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도 같은 일, 즉 매일 시간을 늘리면서 방언기도하는 일을 시작한다면, 당신은 더 깊은 기도의 영역으로 빨리 들어가는 법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글렌 아키레온
방언은 우리 안에 숨겨진 보물을 끄집어 냅니다. 말씀은 “우리 몸에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방언은 우리 안에 숨겨진 보물을 끄집어 냅니다. 말씀은 “우리 몸에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방언을 하면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강해집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 주변의 공기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기름부음, 하나님의 권능으로 언제나 충만합니다. 존 g 레이크는 자신의 사역의 근간은 방언기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의 사역의 배경에도 방언기도가 있었습니다. 아주사 대부흥의 윌리엄 시무어의 사역의 배경에도 방언기도가 있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우리는 오직 [그]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말하는 사람이 어떤 것인지 분명한 아는 정관사입니다. 신약에서 [그]기도라 함은 바로 초자연적인 언어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이 방언기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그] 기도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온갖 기도는 다 하지만 방언기도하고 있지 않지요. 사도행전 19장을 보시면 주님께서 어떻게 사도바울의 손을 통해 기적을 행하셨는지 나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바로 방언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언어는 하나님의 권능의 풀림입니다. 거기에 기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냐구요? 초자연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초자연의 영역에는 어떻게 들어가냐구요? 하나님의 언어를 통해서지요 즉, 초자연적인 언어를 통해서입니다. 계속하여 영으로 기도를 하게되면 그 기름부음이 함께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지요.
초자연적인 언어를 모르면 초자연적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방언기도는 우리를 초자연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육의 세계를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초자연적인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당신처럼 몇 시간씩 방언기도를 하면 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데 어떤 느낌인가요? 모든 것이 쉬워집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영의 세계 즉 주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면 당신도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게됩니다. 일단 하나님의 영역에 함께 있게 되면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모든 환상이나 꿈이 아주 쉬워집니다.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하나님의 권능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루어질 것을 믿게 됩니다. 복잡한 문제들도 아주 쉽게 풀립니다.
데이브 로버슨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한복음 5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많은 분들이 착각하고 저도 착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하나님과 교제하였다고 해서 오늘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오늘도 무조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주 왕년의 자신을 과시하지만 그것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어떤 과정을 통과하였다고, 어떤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관계를 소홀히 하는 만큼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기름을 잘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와 기름을 잘 준비하지 못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의 기름부음도 언제든지 소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8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 충만은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받기 위해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 는 말은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파리아스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미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잃어버리는 위험 가운데 있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은 매일의 명령입니다."
방언기도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성령님께 순종하는 훈련이다 1시간을 방언기도한 사람은 1시간 이상을 성령님께 순종할 수 있다 2시간을 방언기도한 사람은 2시간 이상을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핸들링하던 운전대에서 내려와 성령님께 운전대를 양보하는 것
방언기도 행위 자체가 바로 순종이다
유다서 1:20
20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에베소서 6:18
18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계속해서 성령충만해지는 비결
본문 말씀 :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충만은 왜 필요할까요?
그렇다면 왜 성령충만이 필요할까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성령세례가 필요한 이유와 같습니다. 개인의 구원과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으로 섬기기위한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함이 없는 성도는 마치 기름없이 자동차를 운행하려는 자와 같고 핸드폰 충전 없이 업무적인 전화를 하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기름이 충분하신가요? 여러분은 충분히 충전된 상태인가요?
1 성령충만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령충만은 무엇일까요? 성령께서 단순히 우리 안에 계신 수준이 아니라 성령께서 차고도 넘치도록 채워지고 충만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로써 성령의 임재(나타나심)와 능력과 영광과 성품(본성) 넘치는것, 압도되는 것
1) 성령충만과 성령세례의 차이
2. 성령세례
성령세례란 성령님이 각 사람 안에 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그 성령님이 함께하실 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령세례는 사람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일어납니다. 교단과 교파에 따라 성령세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성령세례는 ‘성령이 임하셔서 구원받은 사건, 성령으로 인한 인격의 변화, 성령으로 인해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성령체험을 제대로 하면 인격이 훌륭해지고 자신이 받은 은사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용하게 됩니다.
3. 성령의 충만
성령님이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게 되면 우리 안에 유연하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 인맥 등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쁘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생각과 언어가 달라지고, 능력 있는 말씀이 흘러나오며, 여유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역동적인 삶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죄 문제와 영적인 게으름은 성령이 주시는 감동의 불씨를 소멸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 한홍의 " 기독교 에센스 " 중에서 -
그렇다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으면서 다른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령세례는 일회적으로 외부에서, 밖으로부터 받는 것, 오는 것이라면 성령충만은 성령세례 이후로 성령충만을 계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장착되어 외부, 밖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내부, 안으로부터 받는 것, 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시대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면 신약시대에는 신자들에 의해 성령충만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3. 성령충만은 어떻게 받는 것일까?
1) 회개하고 믿는 자가 구원받은 후 (구하지 않아도) 선물로 주어집니다
첫째, 여러분의 모든 죄에서 회개해야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죄뿐만 아니라(지난 죄를 청산하는 것뿐 아니라) 현재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죄에서든 결별하고 떠나야합니다. 모든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해야합니다.
사도행전 2:38,39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
둘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합니다
사도행전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갈라디아서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셋째, 하나님께 순종해야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히 입술로 시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진짜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고 진짜 믿음은 믿어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께 !00% 순종할 마음을 먹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사도행전 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2) 성령충만을 구하면 주십니다.
3) 안수받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안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통로입니다. 사도행전 8:17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안수함으로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게 했고, 사도행전 9:17에서 아나니아는 회심한 바울을 안수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였고, 사도행전 19:6에서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을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
4 어떻게 하면 계속적으로 성령충만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이제 문제는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세례, 성령충만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5장 18절 말씀은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케네스 해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쓸 때 그들을 격려하며 성령 충만하라고 썼습니다.(엡5:18) 그런데 사도행전 19장을 살펴보면 이미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바울은 엡5장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한 것일까요? 그 답은 그리스 원어 “충만”에 있습니다. 그리스 원어 충만의 뜻은 "지속적인 실행"입니다. 성령 세례를 통한 성령의 충만함도 있고 그외 우리 신앙생활 중 많은 여러 방법을 통하여 성령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단순 한 번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 동안 지속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만 가이슬러
에베소서 5장 18절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는 현재 시제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이다.
성령 충만은 한 번 충만해지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계속적으로 성령충만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까요? 성령충만받았던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회개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 죄사함, 구원받은 선물로 다시 성령을 받아야할까요? 아니면 신령한 목사님들을 찾아가 다시 안수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아야할까요? 오순절날 120명의 제자들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자 기도한 것처럼 다시 모여 성령달라고 기도해야할까요?
1) 술 취하지 않는 것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성령충만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의지 아래 있는 것이라면 성령충만해지는 것도 우리 의지 아래 있는 것이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이라면 성령충만해지는 것도 우리 손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핸드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어 어렵게 받아야할 이유가 없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면 성령충만해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우리 손에 있듯이 성령충만을 계속 받는 것도 우리손에 있다 성령충만은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가 아니다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견주어 말씀하고 있다
2) 하나님은 한 번 성령충만받은 후 다시 성령충만해지기 어려운 상태를 주셨을까?
한 번 밖에 충전할 수 없는 핸드폰
한 번 밖에 기름을 넣을 수 없는 자동차
한 번 밖에 성령충만 받을 수 없는 상태
3) 성령충만받은 후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 방언이다. 역으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게되면 성령충만해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방언을 하지 못 한다. 성령세례받고 성령충만해진 사람만이 방언을 한다.
성령충만을 방언을 부르고 방언은 성령충만을 부른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성령충만을 방언을 끌어들이고 방언은 성령충만을 끌어들인다
방언을 맛보지 못한 장로님은 방언기도 아니더라도 기도하면 된다는 주장
바울이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리라
영의 기도 다르고 마음의 기도 다른 것 체계가
그래서 휘발유 차량에 경유 넣으면 큰 일나고 경유 차량에 휘발유 넣어도 큰 일
4) 성령충만을 받는 것인가? 성령충만해지는 것인가?
어원
5)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것인가? 성령충만해지는 것인가?
성령 충만을 구하라 하지 않은 점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지말라 그리고 반대로 성령으로 계속적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육신적으로 술 취하는 것과 영적으로 성령에 취하는 것을 절묘하게 매치시켜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경 구절을 보면서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성령 충만함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 제게는 성령충만함은 저 높이 하늘에나 있는 것 같고 너무나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 불가능한 일을 주문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충분히 가능하기에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면 성령 충만을 계속적으로 받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술 취하지 않는 것은 우리 손에서 있습니다. 다 인정하시죠? 술 취하지 않는 것이 우리 손에 있듯이 성령 충만을 계속적으로 받는 것도 우리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손에 없는 것이라면 바울은 " 성령 충만을 계속적으로 구해라" 라고 말해야했을 것입니다.
구한다고, 원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막연히 비가 오기만을 바라는 천수답처럼 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자 안에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시스템을 구축하였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방언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지만, 또한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성령으로 채워지고 충전되는 일, 즉 성령 충만함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나 스미스 위글스워스가 이미 방언기도는 우리가 충전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주유할 때는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핸드폰 밧데리를 충전하는데 어느정도 걸립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데는 방언기도를 얼마나 드려야할까요? 개인마다 다르겠지요. 매일 순간마다 방언으로 충전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사람은 30분만에도 성령충만해집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1시간을 방언기도하면 그만큼 충전되는 것이고 2시간을 방언기도하면 또한 그만큼 충전되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기도는 성령님을 모셔들이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해 지루하거나 싫증낼 수 있습니다. 왜 해야하나 의구심이 생깁니다. 육신적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성경대로 믿고 성령님을 믿고 순종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출애굽기 35장
31.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신명기 34장
9.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미가 3장
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3: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행전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로마서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어느 목사님은 이전에도 방언기도의 유익을 알았고 방언기도 하지 않았냐?
알았죠? 그런데 방언의 여러 유익을 알고 경험하였어도
방언이 성령충만을 가져오는지는 미처 알지 못 했다
성령님은 새로운 탄생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훨씬 더 큰 성령의 인도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지속적으로 방언기도 하는 습관을 따를 때에만 이러한 특별한 정도의 성령이 내 삶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나는 방언으로 몇 마디 주절거리다가 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참된 방언기도에 시간을 들이고 날마다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방언으로 많이 기도함으로서 성령 충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해 당신과 소통하실 것입니다 케네스 해긴 방언
유다서 1:20
20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에베소서 6:18
18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스미스 위글스워스
저는 계속적인 충만함을 받아 아침, 점심, 저녁에 방언으로 기도할 것을 주장합니다
위글스워스
"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성령을 한잔 마셨다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항상 흘러넘치게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흘러넘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성령이 가득 차지 않은 상태에 머물지 마십시오.
나
많은 분들이 착각하고 저도 착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하나님과 교제하였다고 해서 오늘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오늘도 무조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주 왕년의 자신을 과시하지만 그것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어떤 과정을 통과하였다고, 어떤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관계를 소홀히 하는 만큼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기름을 잘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와 기름을 잘 준비하지 못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의 기름부음도 언제든지 소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8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 충만은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받기 위해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 는 말은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파리아스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미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잃어버리는 위험 가운데 있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은 매일의 명령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과 성공적인 신앙인의 삶의 핵심 키입니다. 그래서 J.C. 라일은 다음과 같이 성령의 중요성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세상에서 성령을 받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먼저 이생에서 죄를 깨끗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죽어서는 결단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다음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룩하다는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들어 왔을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 "거룩한 침례", "거룩한 날", "거룩한 물", "거룩한 섬김", "거룩한 제사장", "거룩한..."
그러나 천만번 이런 말들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바로 지금 성령에 의해 거룩한 성도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을 때 반드시 신의 성품에 참여해야 됩니다. 우리가 영원한 수확을 얻기 원한다면 반드시 성령의 씨를 마음에 뿌림 받아야 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기억하십시오. 만약 지금 성령이 없다면 당신은 의인도 진실된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도 권세도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오직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으로 인도함 받습니다. 또한 그들의 육신은 성령을 통해서 통제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육신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들의 몸은 성령의 거룩한 전이되고 성령을 따라 살며 성령을 통해 힘을 얻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사랑으로 강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속죄를 전한다고 할지라도 성령으로 그 마음에 증거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는 성령을 통해서 전달되며 확증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보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에 불과합니다. “
누군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성령 충만한 강력한 성령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존 G. 레이크입니다. 그는 마가복음 16장 18절 말씀인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직접 증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전염병, 풍토병의 병균을 자기 손에 올려놓고 그 병균이 어떻게 되는지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병균들이 정말 사라지는 것을 현미경을 통해 의사가 목격하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믿는 자는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씀을 직접 증명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존 G. 레이크는 이에 대해 다음과 증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15년 동안이나 갖가지 형태의 전염병이 있는 곳을 돌아다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염병에 걸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마귀는 그런 병들을 저에게 집어넣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역질 환자에게 기도해주었을 때, 그 환자의 고름집이 제 손바닥에서 터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다음,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갔어도 아내와 아이들 역시 단 한 번도 역질에 감염된 적이 없습니다. 저는 " 지존자의 은밀한 곳 " (시91:1) 에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도적 사역을 하는 내내 디프테리아, 역질 , 나병, 심지어 페스트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질병을 접촉하는 것이 저의 일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신 성령께서는 다스림의 영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을 신처럼 만드십니다. 그분의 권능은 우리를 세상의 힘, 육신의 힘, 마귀의 힘에 종속된 채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런 것들은 모조리 그리스도인의 발밑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성령 충만한가요? 그러나 여러분도 존g 레이크처럼 살 수 있습니다.
토미 테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고자한 삶은 무기력한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얼마나 무기력합니까? 지금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계시지만 그렇다고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우리는 성령 충만을 끝까지 구합시다. 성령 충만한 성도가 어떤 성도인지, 성령 충만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본보기를 보이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홀리 파이어 미니스트리스(Holy Fire Ministries)의 설립자인 버트 파리아스(Bert Farias)는 이와 관련 "그래함 목사는 자신의 모든 위대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이 있다고 느꼈다"고 말하고, "나도 하나님께서 사역을 통해 여러 가지를 이룰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배고픔이 우리에게 찾아왔다"면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평생 동안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케네스 해긴(Kenneth E. Hagin) 목사에 대해 언급했다.
해긴 목사는 1987년 3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방문을 체험했다. 이 놀라운 방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사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강조하신 것이기도 하다.)
파리아스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강조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여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야 하며 이것을 가장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질문을던지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완벽하게 역사하기 위한 핵심 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이미 주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잃어버리는 위험 가운데 있는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파리아스는 "우리가 육신과 본성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텅빈 상태가 될 것이며 주의 일꾼으로 사용되지 못하게 될 것"이라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육신)을 쳐 복종하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지적했다. (고전 7:25-27 참조)
그러나 "당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질수록 당신의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 "당신의 관계와 교제, 당신의 건강, 당신의 재정 등 모든 것에 관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리아스는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은 매일의 명령"이라면서 "성령이 아닌 것으로, 저질의 것으로 당신을 충만하게 채우지 말라"고 말했다. 이어 성령의 충만함을 막는 것들을 내어버리라고 주문했다.
그는 "당신은 정신 없이 바쁘꼬 빡빡한 삶을 살아간다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고 강조했다.
이어 "피곤한 삶은 당신을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께 당신을 내어드리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면서 "바쁘고 분주하고 피곤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할 것이며, 주님께서주시는 것들을 잘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는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파리아스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들의 치유제가 된다"면서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사랑과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명과 능력,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득한 사람의 영이 드러낼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있느냐?"면서 "마가복음 5장에서 거라사 광인은 2천의 떼 귀신이 들려 있었는데, 죽은 자의 영에 2천이 깃들 수 있다면, 거듭난 영혼의 영에는 얼마나 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간구했다고 강조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그리고 마태복음 12장 43-45절을 인용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된 것을 발견하고 다른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이로 인해 이 사람의 상태가 처음보다 7배 더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고 물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3-45)
파리아스는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는 구원 받은 후 자신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았고, 더 많은 귀신들이 거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파리아스는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충만해질수 있겠느냐?"면서 "성령을 구하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써 말하고 찬양하라. 하나님을 매일마다 찬양하고 경배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조언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3:19-20)
/글=재경일보USA
'샘물' 대 '생수의 강들'
사람들은 이 "세례들"의 문제에 대해 어리둥절해합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이상의
세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을 사도행전으로 데려가서 물의 예를 듭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당신은 성령으로 났고, 그러므로 당신은
성령을 가졌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물을 마신 거지요. 하지만 당신은 물로 가득차
있습니까? 당신의 심령은 굶주려있습니까? 당신은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시나요?"
이러한 질문이 상대방의 심령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더하도록 자극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새로운 탄생에서의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충만을 물로 비유하여 훌륭하게 묘사하신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이들 본문은 내가 '세례들'이라는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알기 위해 성경을
연구할 때 즉각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먼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하는 요한복음 4장 장면입니다.
요 4:10,13~14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3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께서 여기에서 영생을 받는 것에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요한복음 3:16 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신 경험은
새로운 탄생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구원의 샘은 우리 각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 후에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께서 성령 안에서의 또 다른 경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 7:37~39
37 명절 끝날 곧 끝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 (rivers of living water)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께서는 "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단지
'하나의 강 (a river )' 이라고 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샘 안에는 물이 있고, 강 속에도 물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물은 같은 것이지만, 샘 안의
물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고, 강 속의 물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이들 단락의 두 물은 모두 성령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안에서 가지 경험이 있음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안에서의 한 경험은 영생을 받는 것으로, 성령이 당신의 영에 영생을 전이하시고
당신의 영과 더불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롬 8:16).
그 후에 또 다른 경험이 있는데, 이는 당신의 가장 깊은 존재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첫번째 경험, 즉 새로운 탄생은 무엇보다 당신 개인의 이익과
축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경험, 즉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에게서
흘러나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수 있게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의 후반부에서, 예수께서는 이 두 번째 경험을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짐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누가복음 24:49
볼찌어다 내가 아버지깨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네가 회심하거나 구원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이것은 다른 경험, 즉 성령세례입니다. 사실 이것은,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그를 믿는자들의 가장 깊은 존재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셨을 때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경험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예수께서 요한복음 7장에서 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행 2:2~4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때, 생수의 강들이 거듭난 믿는 자들을 통하여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이들이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함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 케네스 해긴의 " 방언 " 중에서 -----------------
왜 방언을 해야 하나?- 케네스 해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마가복음 16:17)
사도 바울은 방언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많이 서술하였읍니다. 그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전서 14:18)"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그가 설교한 것을 또한 스스로 열심히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나 또한 내가 규칙적으로 방언을 말함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신도들 또한 마찬가지로 매일 매일의 삶 속에 나타나는 축복이자 권능의 원천인 방언의 은혜를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본서의 목적은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꼭 해야하는가 하는 중요한 이유들을 제시하고, 또 신도들로 하여금 매일 성령의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축복을 깨닫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1)첫 번째 이유 - 방언은 첫 표적이다. (Tongues the Initial Sign)
사도행전 2장 4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as the Spirit of God gives utterance) 방언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세례의 첫 증거이자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것이 성령의 내주를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에 왔던 유대인 형제들이 성령의 은사가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것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 유대인들이 고넬료의 가속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을 알았을까요?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 10:46). 방언을 말했다는 사실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도 같은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믿게한 초자연적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2)둘째 이유 - 방언은 영적 계발을 위한 것이다. 영을 강하게 한다.
(Tongues For Spiritual Edification)
고린도전서 14장 4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edifies himself) . .
고린도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은 영적 계발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써 하나님께 대한 찬양중에나 혹은 개인적 기도중에 방언으로 말하기를 힘 쓸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헬라어 학자들에 의하면 "덕을 세우다 (edify)"라는 표현보다 더 현대어에 맞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충전하다 (charge)"라는 것입니다. 즉, 마치 축전지(battery)를 충전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 절을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마치 축전지와 같이 자신을 충전시키며 일으켜 세운다"라고 바꿔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놀랍고 초자연적인 영적 계발의 수단이 - 정신적 혹은 신체적 계발이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웨이머스(Weymouth)의 번역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의 비밀 (divine secrets)을 말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자신과 교통할 수 있는 신성하고 초자연적인 수단을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나의 영이 기도한다"라고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확장번역본 (Amplified Bible: 헬라어 원어의 의미에 충실하게 폭넓게 해석한 성경)에 의하면, "내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나의 영이 기도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이 그 또한 영이신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신성하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대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구절들을 놓고 볼 때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해야 되는 가치를 모르겠다고 의문을 갖는 것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만약 하나님 말씀에 방언으로 말함이 귀중한 것이라 한다면 귀중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방언이 덕을 세운다 하시면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방언이 그 자신과 교통하게 되는 초자연적인 방법이라 하시면 그 자신과 교통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신도들이 방언을 말해야 한다고 하시면 모든 신도들이 방언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저 소수가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하시지 아니 하셨습니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들'은 복수이며 모든 이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중의 한 표적이 바로 "저희가 새방언을 말하며 . . ." (마가복음 16:17)라는 것입니다.
3)셋째 이유 - 방언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상기시킨다. (Tongues Remind Us of The Spirit's Indwelling Presence)
요한복음 14장 16-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는 여러 해동안 영국 하나님의 성회 (Assemblies of God)의 감독이셨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순절파 성경학교를 세우신 분인데, 그분이 강조하시기를 방언을 말함은 성령충만을 받을 때 나타나는 최초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계속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을 말함은 결코 마르지 않으면서 우리의 영적인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것입니다. 계속하여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면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우리가 항상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내가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매일 같이 의식하고 살 수 있다면 내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은 12살된 목사님 딸이 성질을 못이기고 자기 엄마에게 거칠고 적대적인 감정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방문중에 있던 설교자가 그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 소녀가 고개를 들어 그가 자기의 성질부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을 깨닫고는 너무 부끄러워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말한 것을 목사님께 보여주게 되어 너무 죄송해요" 라고 울먹였습니다. 그러자 그 설교자는 말했읍니다. "얘야,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너를 보고 듣고 계시단다. 너 그리스도인이지 않니?" "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지?" "네." "그러면, 성령님께서 네 안에 계신거야.
그는 네가 말한는 것과 행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단다. 그러나 네가 뉘우치면 주님께서 다 용서해주실 거야." 그들은 함께 기도했고 소녀는 회개하였으며 이내 방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설교자는 소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 여기 네 성질을 억제할 수 있는 비결이 있지.
만약 네가 매일 방언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면 네가 성령님이 네안에 계신 것을 항상 잊지않을 수 있게 될 거야. 네가 성령님이 네안에 계신 것을 기억하게 되면 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거야."
몇 년 뒤 그 설교자가 같은 교회에 설교를 하기 위하여 들르게 되었을 때, 목사님의 딸이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을 잊지 않았어요. 지난 몇 년간 매일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였더니 제가 한번도 제 성질을 부린 적이 없었어요."
불행하게도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아직도 성질을 부리고 못할 말을 입에 담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는 오로지 마땅히 성령안에서 동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의 실재를 의식하지 않고 있으면 흥분하거나 또는 화를 품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적으로 시간을 내어 주님과 교제하면 우리는 그가 내안에 계심을 항상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4)넷째 이유-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따라 기도할 수 있다.
(Praying in Tongues is Praying in Line With God's Perfect Will)
로마서 8장 26-27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느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방언기도는 우리가 이기적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자기 생각이나 머리에서 나오는 기도는 비성경적인 기도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종종 우리의 기도가 어느 늙은 농부의 기도와 같이 되기도 합니다 - "주여 나와 나의 아내, 내 아들 존과 그 아내 이렇게 네사람만을 축복해 주소서".
위에 인용한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며 이는 올바른 기도방법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하는지 안다고 해서 내가 온당히 구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 . .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학자인 P.C. Nelson은 헬라어 원문을 문자그대로 읽으면, "성령이 명확한 음절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명확한 음절의 말 (articulate speech)'이란 우리의 일상적 언어를 뜻합니다. 그는 계속하여 지적하기를 헬라어 원어의 뜻이 우리의 입술로부터 나오는 신음과 같은 기도뿐만 아니라 방언을 통한 기도도 일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또는 확장번역본에 따르면 "내안에 계신 성령의 도움으로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라고 한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당신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당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신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할 내용 (또는 소리, utterance)을 주시고 당신은 그것을 영으로부터 내어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은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즉, 온당히 기도드려야 할 내용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이를 우리와 동떨어져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신음은 우리의 속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것이며 우리의 입술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대신 해주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혜사(helper)로서 그리고 중보자(intercessor)로서 우리안에 내주 하시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는 우리 기도생활이 잘 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책임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함은 성령께서 소리를 주시는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하여 인도된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으로 될 가능성을 제거해 줍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기초하여 기도 드림으로 인해서 실제로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최상의 응답도 아닌 것을 받게 됩니다. 만약 성도들이 어떤 일이 특정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를 고집할 때,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것이 그들을 위한 최선이 아니고 그의 온전한 뜻이 아닐지라도 종종 그들이 원하는 대로 허용하시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왕을 달라고 고집하였기 때문에 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완전하신 뜻이 아니었읍니다.
5)다섯 번째 이유 - 방언으로 기도하면 믿음이 제고된다.
(Praying in Tongues Stimulates Faith)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다서 20절)
방언기도를 하면 믿음이 제고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좀더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나의 기도하는 말을 인도하신다고 한다면, 방언으로 말하기위하여 반드시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내가 알 지 못하므로 오로지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줄을 그를 의지하여 구하고나면 다음 줄을 위해 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젊은 침례교 목사로서 나는 동네교회에서 목회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감리교 부부의 집에서 거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매우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위궤양을 앓고 있었고, 의사들은 그것이 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염려했습니다. 그 남편은 돈을 잘 벌었으나 모든 돈을 병원비로 다 써버린 상태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치료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녀의 믿음을 그 수준에 이르도록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연한 음식과 우유만 마셨지만 그나마 편한히 소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녀가 성령의 충만함(성령세례)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평소에 전혀 먹을 수 없었던 음식들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치유도 받았어요. 나는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일들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치유가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방언으로 말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제고시켜주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일들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을 쉽게 해주는 것입니다.
6)여섯 번째 이유 - 방언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의해서 오염되는 것을 막아준다. (Speaking in Tongues, A Means Of Keeping Free From Worldly Contamination)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린도전서 14장 28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말해야 하는 여섯 번째 이유는 이것이 불신앙과 신성모독과 직장에서 또는 바깥세상에서 우리가 듣는 모든 세속적인 말들이 주는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순수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위 말씀구절에서 우리가 자신에게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이 말하기를 교회 예배중에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 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14:27,28)" 만약 우리가 교회 예배중에 우리자신과 하나님께 말할 수 있다면, 직장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한테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발소에서 사람들이 음란한 농담을 할 때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나자신과 하나님께 방언으로 말합니다. 기차나 버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께 방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당신 자신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세상적 오염으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해 주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7)일곱 번째 이유 -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가 모르는 이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
(Praying in Tongues Enables Us to Pray For the Unknown)
방언기도는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수 없는, 더 나아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하여 기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께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모를 때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에 더하여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 육신의 지각으로 전혀 아는 바 없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도 기도를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사역중인 한 영국 선교사가 휴가차 집에 와서 어떤 선교대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한 여인이 그에게 일기를 쓰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년전 어느날 밤 갑자기 기도를 해야할 마음의 부담 때문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래서 침대에서 나와 방언으로 말하면서 무릎을 꿇어앉았습니다. 한 시간 동안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제가 레슬링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저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상속에서 당신은 원주민들이 둘러싸고 있는 조그만 초막 안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팠고 이내 사망했습니다. 저는 원주민들이 시트를 당신 머리위로 덮고는 애도하며 초막을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당신이 초막에서 나와 그들 한가운데 서있었고 모든 원주민들이 기뻐하였습니다.
선교사는 그 여인에게 일기를 쓰고 있느냐고 묻고는 일기를 그날 오후에 갖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두 일기를 비교하면서 영국과 아프리카의 시차를 고려해보니 그 여인이 기도의 부담을 느낀 시간과 그 선교사가 치명적인 열병을 앓고 있던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동역자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는 원주민들과만 있었습니다. 그녀가 환상에서 본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선교사는 죽었었고, 원주민들이 시트를 그의 머리 위로 덮어주었으며, 갑자기 그가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성령님의 역사하심 때문이었습니다.
1956년 나의 아내와 내가 캘리포니아에 있었을 때였는데, 갑자기 밤에 내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꼭 마치 누가 나에게 손을 얹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고 내 가슴은 급하게 뛰었습니다.
주여, 무슨 일입니까? 어디엔가 무슨 문제가 벌어진 것을 제가 알겠습니다. 제안에 계신 성령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 마음속 뿐만 아니라 당신은 세상 어느 곳에든지 계십니다. 무엇이든지 제가 이문제에 대해 (방언으로 기도할) 말을 주옵소서. 라고 저는 외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한시간 동안 방언으로 기도한 후 웃으며 방언으로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기도하게 될 때는 언제나 찬양을 드려야 하겠다는 마음의 암시를 갖게될 때까지 계속 기도하십시오. 만약 그런 상태에 이르고 나면 당신이 기도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내가 기도를 드린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응답을 받았으므로 나는 다시 잠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꿈속에서 루이지애나에 있던 나의 막내 동생이 심각하게 아픈 것이 보였습니다.
구급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면서 동생을 병원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병실문밖 복도에서 서 있었습니다. 병실 문은 닫혀 있었는데, 의사가 거기서 나오더니 뒤로 문을 닫고는 내손을 잡으며, 죽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니오. 의사 선생님,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안 죽었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죽지 않고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말에 의사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면 그가 죽은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사람이 죽었는지 아닌지도 분간 못할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내팔을 잡고는 동생의 병실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는 침대로 걸어가더니 시트를 확 제꼈습니다. 그 순간 동생이 눈을 번쩍 떴고, 의사는 동생이 숨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의사는 더듬거리면서 당신, 제가 모르는 무언가를 아는 분이군요. 그가 살아있잖아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꿈속에서 내 동생이 침대에서 건강하게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기도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3개월 뒤 동생이 텍사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내 동생이 나를 찾아와서는 형이 없는 동안 내가 죽을 뻔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동생에게 그가 루이지애나의 모텔에 묵고 있을 때 밤에 공격을 받고 병원으로 급송된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동생은 누가 나에게 그 얘기를 해주었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동생에게 기도의 부담과 꿈 이야기를 해주자 동생은 말했습니다. 모든게 정확히 그대로예요! 병원에서 뒤에 말하기를 내가 40분 동안 죽었다고 생각했었다는 거예요! 방언기도는 우리가 자연적으로는 전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일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8)여덟 번째 이유 -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이 새롭게 된다.
(Praying in Tongues Gives Spiritual Refreshing)
이사야서 28장 11-12절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의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무엇이 위에서 말하는 안식이며 무엇이 상쾌함일까요? 방언으로 말함입니다. 간혹 의사가 안식을 위한 여러 가지 처방을 해주지만 나는 이세상에서 최고의 처방을 알고 있습니다. 흔히들 휴가를 갖다와서도 다시 직장에 나아가기 전에 집에 와서 쉬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안식의 처방을 매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안식이요 .. . 이것이 상쾌함이라 . . .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긴장된 이 세상 속에서 이러한 영적 소성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9)아홉번째 이유 - 감사를 위한 방언 (Tongues For Giving Thanks)
고린도전서 14장 15-17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바울이 16절에서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라고 한 것은 영적인 일들에 대하여 배우지 못한 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만약 저녁식사에 초대받아 가서 감사 기도를 드려주십시오 하였을 때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다른 사람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전혀 은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그런 자리에서 '마음으로 기도하는 (pray in understanding - 이해할 수 있는 기도)'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방언으로 기도했다면 내가 또한 통변을 해서 듣는 자가 무엇을 기도했는지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기도가 가장 완벽한 기도와 감사를 드리는 방법이 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왜냐하면 17절에서 이르기를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 . .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적인 일들에 무지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은혜 받을 수 있도록 이해되는 말로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10)열번째 이유 - 방언으로 말하면 혀를 복종시킬 수가 있습니다.
(Speaking in Tongues Brings the Tongue Under Subjection)
야고보서 3장 8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를 성령님께 순종시켜서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함은 우리 육신의 모든 지체를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시키는데 이르는 큰 한 걸음 (a giant step)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혀라고 하는 가장 다스리기 힘든 지체를 순종시킬 수 있다면 육신의 어떤 다른 지체도 다스릴 수 가 있습니다.
방언의 공적인 측면 (The Public Side of Tongues) 지금까지 주로 신도 개인의 신앙생활 속에서 방언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루었는데, 방언을 함에도 공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결론 삼아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둘째, 공공집회에서도 통변과 함께 방언을 말하면 덕을 세워서 교회 전체가 은혜를 받게 됩니다.
바울이 명백히 말한 대로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고린도전서 14:3)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또 말하기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린도전서 14:5). 바울은 통역이 따르는 방언과 예언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방언을 통역하여 전체 교회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아듣게 된다면 예언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오전짜리 동전 두 개는 십전짜리 동전 한 개와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은 십전짜리 동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십전짜리 동전 한 개 (예언)이 오전짜리 동전 한 개 (통역이 없는 방언)보다 나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통역 (또 하나의 오전짜리 동전)이 따라오면 두 개의 오전짜리 동전이 한 개의 십전짜리 동전과 대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은 설교와 다르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예언이 설교와 같다면 설교를 위해서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 .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Study to shew thyself approved unto God)(디모데후서 2:15)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방언으로 말하거나 통역하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공부를 해야만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도중에 갑자기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말들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며 예언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통역과 함께 하는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통역이 따르는 방언을 들을 때 믿지 않던 자가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믿게 되고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 구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마가복음 16:17). 이것은 은밀하게 사적으로 벌어질 수도 있고 공개적으로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18절). 이것도 사적일 수도 있고 공개적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표적은 새 방언을 말하며 (17절). 이것 또한 사적일 수도 공개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중에 방언으로 오래 동안 기도하는 것을 원치는 않습니다. 통역이 없다면 회중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전혀 은혜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제단앞으로 나와 모여 기도드릴 때는 자신이 덕세움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원하는 만큼 오래 기도를 드려도 좋습니다. 예배중 회중이 손을 들고 다같이 기도드릴 때 자기가 방언으로 기도드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나도 매일밤 연단에 서서 그런 식으로 방언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회중의 기도가 끝나면 나도 방언기도를 마칩니다. 그런 경우에 내가 나 혼자 계속 방언기도를 하고 있다면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가장 유익하도록 사용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원제:Ten Reasons Why Every Believer Should SpeakinTongues
나
방언기도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성령님께 순종하는 훈련이다 1시간을 방언기도한 사람은 1시간 이상을 성령님께 순종할 수 있다 2시간을 방언기도한 사람은 2시간 이상을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핸들링하던 운전대에서 내려와 성령님께 운전대를 양보하는 것
방언기도 행위 자체가 바로 순종이다 |
그런데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라는
말씀에 암시되어 있듯이
거룩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즉 바울이 말한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속 사람이 강해져야 합니다(엡 3:16).
그래야 로마서 7장이 아니라 로마서 8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성령님이 거룩한 삶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 이렇게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1-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7-9)...
그러므로 형제들이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받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2-13)..."
이것은 10처녀 비유에도 잘 나타나는데
기름 준비(성령 충만)는 깨어있는 것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범치 않는 것)의
비결로 그 비유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조금 독특한 방법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종말에 관한 책인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특이한 말씀이 나옵니다.
단 12:9-10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계 22:10-11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이것은 모두 종말에 관한 것인데, 마지막
때는 거룩한 자는 더 거룩해지고 불의한
자는 더 불의해지게 됩니다.
빛은 더 밝게 빛나고 어두움은 더
칠흙같이 어두워집니다.
추수 때가 다가옴에 따라 알곡과 쭉정이가
확연하게 구분될 정도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욜 2:28-19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다음으로, 부정적인 이유로는 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발악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계 12:11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이와 같이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시고
지옥은 마귀와 귀신들이 발악적으로
역사하게 합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영적인 대 격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무엇으로 충만한가?
귀신으로 충만한가
아니면
성령으로 충만한가가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성경만 알고
성령을 터부시하는 것은 점점 더
위험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가 되어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열거한 그런 죄들에
끌려 다니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귀신들리기 딱 좋은 시대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를 보십시오.
폭력과 주술과 선정성으로 도배가 되어
그것을 보는 아이들을 능히 귀신 들리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TV의 만화들을 통해
귀신 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의 돈을 뺏고 발가벗기는
일과 같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귀신 들릴 위험성은 아이들 뿐아니라
어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터넷의 게임, 도박, 음란사이트를
보십시오.
가정마다 인터넷이 들어가 있고 안방에서
이런 사이트들과 접속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트들을 통하여 특히
음란사이트들을 통하여 귀신들이 역사하고
있고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귀신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는 귀신들리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자녀들의 경우 그들은
성령 충만을 힘입지 않고는
그 세대에 거세게 흐르는 죄악의 검은
급류를 결코 거슬러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 격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결코 종교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성령님을 환영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제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교리(가르침)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행 2:1-4).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 몸 안에 있어야 할 교회의 영혼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사람의 몸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안에
영이 없으면 그 몸은 시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교회도 다른 면에서 아무리 훌륭해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교회의 생명이며
교회의 진정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성령님은 터부시 하면서 우리는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착각과 오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와 달리 돈이 아니라
지식으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우리들이 실상은
가난하고 가련하고 벌거벗은 존재임을
깨닫고 갈급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사모하고 인정하고
의지하고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대로
음부의 문(권세)이 이기지 못하는 교회
(마 16:18),
즉 마귀의 진영을 공격하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를 자유케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
변승우 목사님의 [우리의 사명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중에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고 가르친다.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하게 된다. 사람들은 술의 유혹에 넘어가 의지적으로 술을 마신다.
알코올이든 아니면 어떤 종류의 약물이든 간에 그것을 마시거나 먹으면 그것들의 통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리면 우리는 그분으로 충만하여
그분의 통제를 받게 된다.
누군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갖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분이 우리를 더 많이 갖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분의 한 부분을 소유할 수 없다.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작은 조각들로 나뉠 수 없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는 현재 시제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이다.
성령 충만은 한 번 충만해지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그분께 넘겨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20세기 초 오순절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스미스 위글스워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위글스워스 형제... 당신은 휴가를 가지 않습니까?"
그의 대단한 영력도 놀랍지만,
거의 쉬지 않고 치유하고 사랑으로 기도하는
그의 열정을 보고 물은 말이다.
"저는 날마다 휴가를 갑니다."라고 그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그의 멈추지 않는 사역을 지켜본 사람이 의아해서 물었다.
"나는 날마다 방언으로 기도하여 새 힘을 얻습니다.
방언기도가 나의 휴가이자 나의 휴일입니다."
방언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당신의 영의 사람을 개발시키는 데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당신의 마음(mind)이 조용해집니다. 일단 당신의 마음(mind)이 조용해지면 당신은 당신의 영을 더욱 많이 의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으로부터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의 사람을 개발시킨다면 잠시 후에는 삶의 모든 정황에서 어떻게 할지를 속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영 안에서 "예스"(yes) 아니면 "노"(no)를 얻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대부분을 정신적인 영역과 물리적인 영역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영에 귀를 기울이건 안 기울이건 성령은 내적인 증거를 통하여 언제나 우리의 마음(mind)을 인도해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영이 당신의 마음(mind)과 육신을 지배하게 하는 법을 안다면 그 때 "...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3:16)! 그 진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의 사람을 훈련시켜서 당신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당신의 마음(mind)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하시고, 당신의 육신이 당신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내적인 증거를 따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케네스해긴의 "하나님과 동행하기" 중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Jesus' Ministry Depends on You)
어느 날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을 지나가시다가 삼십 팔년 동안이나 불구로 누워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되셨다.
주님은 그 사람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신다.
그 사람은 자기 자리를 들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날 거기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 한 사람뿐이었다(요5:1-8)
당신은 혹시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영광의 몸으로 베데스다 연못을 다시 찾으셨더라면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을 텐데! 주님이 병원을 가셨더라면 모든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의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예수님은 오늘도 분명 사람들을 치료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에게 안수하시거나 그들의 몸을 만져서 치유하시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치료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떻게 치유하시는가? 오늘날에는 예수님에게 부어졌던 동일한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나타남과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자신에게 부어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나감으로써 그들이 치유 받을 수 있기를 갈망하는 순전한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을 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마28:18). 그리고 예수님은 마가복음 16장에서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너희는 내 이름으로 가라! 너희가 귀신을 내어쫓으라! 너희가 새 방언으로 말하라! 너희가 병든 자에게 너희 손을 얹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나음을 얻으리라!"(막16:15-18).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제는 마귀의 일을 파쇄하는 것이 너희들에게 달려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이제 이 땅의 통치권과 하늘의 기름부음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넘겨주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합법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 권세를 위임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셨다(창1:26).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이 여기서 "하나님으로(그분의 신성한 능력 안에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자"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 땅에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분의 대리인으로서 바로 당신과 같은 성도를 사용하고 계신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기름부음을 덧입혀 주실 뿐만아니라, 당신이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이 사실 자체가 당신에게 이 땅에서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세를 제공한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5:26-27)
예수님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귀의 일들을 파쇄하셨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그분이 그 일을 수행하실 수 있는 합법적인 권세를 가지셨던 것은 그분이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셨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이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곳에서 마귀의 일들을 파쇄할 합법적 권세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서의 예수님의 현재적 중보사역의 성패는 과연 주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여 이 땅에서 그분이 위임해 주신 통치권을 당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얼마나 많이 얻을 수 있는가와 이 땅에서의 주님의 몸인 그 교회들을 통하여 우리 주님의 중보사역이 얼마나 풍성하게 열방을 향하여 퍼져나갈 수 있는 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마귀들과 악한 영들이 우리의 자유를 짓밟고 탈취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만사를 제어하고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다만 모든 것들의 최종적인 결과에 대해서만 통제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19에서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네가 이 땅에서 맬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하늘에서도 맬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라. 하늘에서 매일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질병과 가난과 상처를 주고 우리를 파멸시키는 모든 것들로서 그 모든 것들이 이 땅에서 우리가 맬 때 하늘로부터 매일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합법적인 권세를 가지고 살고 있다. 그 권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마28:18-20, 막16:15-20).
그러므로 이 땅에 대한 통치권 위임 기한이 끝나기 전까지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요 그분의 몸인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왜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악한 것들을 쓸어버리시고 바로 잡으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위임한 통치권의 기한이 끝날 때까지는 그렇게 하실 수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 땅의 인간에게 위임하신 통치권의 위임 기한이 끝날 때까지는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마귀의 역사에 대한 통치권의 행사는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중보해야 할 특권을 부여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 국가의 권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투표를 통해서 올바른 사람들을 세워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 정부 요직에 오를 수 있도록 투표로 돕지 않는다면 악하고 불의한 자들이 요직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 합법적인 우리의 권리를 반드시 행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학설이나 정책에 있어서는 일치를 이루기가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나라와 정부 안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일들을 파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의로운 사람들이 정부 요직에 오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투표권을 합당하게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악하고 불의한 자들이 정권을 차지해서 결국에는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가 이렇게 어지럽다면서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거나 불평하지 말라.
- 찰스 캡스의 "하늘의 권능을 가져오는 중보기도의 영적 비밀"중에서 발췌 그리고 편집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는 것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 나의 시간을 들이면서 기도실에서 기도하던 첫날 그 시점에서 보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도 미래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성령으로 기도하는 동안에도 나의 마음은 질문과 의심과 불안으로 소용돌이 쳤습니다.
‘사람이 단지 그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정말 하나님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을까?’
그 기도실에서 보낸 시간은 정말 길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한시간쯤 방언 기도를 한 것처럼 생각이 되면 시계를 봅니다. “오, 아니야. 5분밖에 안 지나갔네!” 그러면 나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나는 전에 내가 제재소의 통나무 야적장으로 출근하던 것과 똑같이 나의 기도실로 출근 보고를 했습니다. 제재소의 호루라기 소리가 하루의 일과를 알릴 때마다 나는 항상 무릎을 꿇고 기도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시간을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했지만 어쨌든 나는 지속했습니다. 나는 카페트와 벽지의 모든 무늬와 색깔이 퇴색된 곳도 모두 기억하였습니다. 나는 오늘날까지도 그 기도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일 분 내에 자세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나는 마치 감옥에 있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기도실에서도 나는 큰 나무가 톱에 잘려져 나갈 때 나는 나무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 친구가 점심 도시락통에다가 커피를 가득 채우고 김이 나는 것을 맛보는 모습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특별히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왜 이 짓을 하려고 직장을 그만 두었던가? 소위 이 초자연적인 언어란 것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나의 영의 사람이 일어나서 나의 흔들리는 감정에게 말씀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을 보상해 주시는 분이다.”(히11:6) 그러자 내 마음에 내가 보기에는 끝도 없는 나 자신의 실패한 모습들이 순간적으로 지나 갔습니다. 이런 기억들이 내게 가져다준 감정 때문에 나는 목이 메었습니다. “오 하나님!” 나는 울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 말씀이 진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차츰 평안이 나의 고통스런 마음을 잠잠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직장을 그만 두고 매일 여덟 시간씩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절망적인 처지에서 내가 결단한 나의 결심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더 원했지만 어떻게 그 답을 찾아내는지는 확실히 몰랐던 것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기도의 언어는 나를 함양하기 위해서(for my edfication) 비밀을 기도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지만 이 진리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일 방언 기도가 나를 함양할 수 있다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비밀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방언 기도를 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환영하며 맞은 결정적인 사건
이렇게 해서 나는 기나긴 시간을 지속해서 기도했습니다. 한 두 달쯤 지루한 시간이 지났을 때 은사주의 성경 공부 모임에서 내가 만났던 한 여자가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교회에 와서 내 기도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로버슨 형제” 그녀가 불렀습니다. “형제가 오랫동안 수많은 시간 기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부인”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는지 내게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알고 싶은데요.”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까? 무슨 차이 말이죠?”
“아닙니다. 나는 단지 어떤 차이를 느꼈는지 형제가 내게 말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의 혀는 지치고 나의 목은 마르고 나의 턱은 피곤합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미안해요, 난 이제 가봐야겠네요”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대화의 전부였습니다.
또 지루한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나는 그 기도실에 쳐 박혀서 세 달 동안을 버틴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자가 다시 와서 기도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로버슨 형제, 내가 나가는 교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네, 부인,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여러 주에서 모인 평신도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행하신 좋은 일들에 관하여 간증하는 주말 집회를 가질 계획입니다. 한 번 와보겠습니까?”
“나는 정말 가고 싶어요.” 나는 기도실을 벗어날 핑계라면 무엇이든지 만들었을 것이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거기서 만납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집으로 달려가서 옷을 갈아입고 사람들이 아침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 그 집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나는 집회 시간보다 좀 늦게 도착해서 내 곁에 앉아 있던 나이 든 여자가 목발을 짚고 걸어 왔으며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서 구석에 세워두었던 것을 몰랐습니다. 나는 그 여자가 걸을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거기 앉아서 강사가 말씀을 전하기 시작할 때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아주 흥분해 있었습니다. 나는 기도실에 갇혀서 3개월을 보냈으니까요. 이제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실제로 살아 있는 말씀을 듣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마침내 한 남자가 큰 덩어리의 노트 더미를 들고서 말을 하려고 일어섰습니다. (만일 그 노트가 두루마리였다면 펼쳐 놓으면 집 뒤까지 이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령으로 충만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정교한 언어와 단조롭고 곧은 목소리로 그는 ‘예수, 위대한 천국의 중매자’, ‘인류의 고난의 바다’, ‘전능하신 하나님’ 등에 관해 강의했습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정말 끔찍하구나! 차라리 기도실에 돌아가 있는 게 더 낫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지도 않는 데 나타나시다
내 마음은 집회와 잡념 사이를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나는 컵을 흔들면서 커피 잔 속의 동그란 물결이 잔에 부딪치는 것을 보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순전히 지루함 때문에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는 그 나이든 여자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가 어떤 기름부음을 느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그녀를 보는 순간 갑자기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에 어떤 사람의 엉덩이와 다리가 붙어 있는 부분에 대한 엑스레이 사진과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검은 물질이 다리뼈가 연결되어 있는 둥근 뼈 부분을 둘러싸고 다리 쪽으로 3-4 인치 가량 퍼져 있었습니다.
나는 놀라움에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눈을 깜빡거려 보았지만 엑스레이 사진은 내 눈앞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엑스레이를 보면서 나는 거기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나님, 오 하나님, 이것이 무엇이지요? 제가 이 여자를 위해 기도를 하기 원하십니까? 도대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절대 침묵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후에 어떤 예배 시간에 이 간증을 나누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내 영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그때 내가 네게 왜 아무 말이 없었는지 아니? 네가 그 예배를 방해하도록 놔둔 이유를 아니? 나도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을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나도 듣고 있지 않았는데 왜 너에게 듣도록 했겠느냐?” 이 말씀도 그 자체가 하나의 계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나이든 여자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하기를 “부인, 엉덩이에 문제가 있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더니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갑자기 ‘관절염’이란 단어가 내 영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나는 무심결에 “오른쪽 엉덩이에 관절염이군요!”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나를 한참 뜯어 보고나서는 “젊은이, 그게 의사가 내게 한 말이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아니, 뭐라구요!”
“아, 네, 하나님께서 당신을 고쳐주시기 원하십니다. 부인, 내가 기도를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나이든 여자는 나를 계속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방언하는 것을 믿지 않는 그런 교회란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이 여자에게 기도하겠다는 나의 말은 하루 중 어느 때에 기도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기억하겠다는 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하겠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장의자 위를 건너다니면서 의자를 들썩이며 큰 소리를 지르는 오순절 교인이었습니다! 나는 큰 소리로 소리치면 칠수록 더 큰 힘이 발생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나이든 여자는 “네, 기도해도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그녀가 말을 하자마자 나는 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녀의 양쪽 발목을 잡고 내 쪽으로 잡아 당겼습니다. (그 동안도 그 황금의 혀를 가진 연설가는 아직도 ‘연설중’ 이었습니다!) 그 다음 나는 그녀의 발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오, 이런! 한 다리가 다른 쪽 다리보다 15센티미터는 더 짧다니!’
‘오, 이런! 이건 정말 끔찍한데! 이 여자에게 필요한 이런 기적을 난 아직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쳐다보는 것만도 겁이 나서 눈을 감고 소리쳤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 그리고 나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힘있게 가장 어려운 극단적인 경건주의 유형의 기도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내가 그 강한 이름을 처음 언급하는 순간 그녀의 짧은 다리가 움직이더니 갑자기 자라서 다른 다리와 똑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완전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나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로 나의 가장 강력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열정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그녀의 발목을 놓게 할 때까지 그녀와 씨름하느라고 그녀를 의자에서 마루 위로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그녀의 다리를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눈을 뜨고 기적을 보자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 여자를 붙잡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쯤 설교 중이던 그 사람은 부목사를 잡고 귓속말로 말했습니다. “가서 저 친구가 하는 짓을 중단시키게.” (나는 그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나는 큰 목소리로 기도하므로 그의 집회를 망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부목사가 소요가 일어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도착하는 순간 그 기적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가 나를 막 붙잡으려는 순간 그 여자의 짧은 다리가 갑자기 15센티미터나 자라나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요를 중단 시키기는 커녕 놀라움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이런 기적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방언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초자연적인 것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기적을 보았을 때 그는 말을 잃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방언 기도에 대해 이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마귀가 당신에게 대적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방언으로 기도하는 그 영역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대적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까요? 그는 수많은 다른 방법으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기도는 당신의 생각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마귀가 가장 자주 쓰는 전략 중의 하나는 당신이 잘못된 생각을 하도록 낙담시키는 의견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무릎 꿇고 한 시간 동안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한 순간, 그것이 바로 나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그리고 나는 그것이 마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군가 와서 너한테 뭐하고 있는 거냐고 물으면 어떻게 할래? 넌 '나도 몰라' 라고 말해야 할 걸."
내가 말했습니다. "잠깐만, 마귀야." 나는 성경을 집어들고 고린도전서 14장을 폈습니다. "누군가 들어와서 내가 방언 기도하는 것을 듣고 '뭐 하시는 건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거다. '나는 아버지께 말하고, 나 자신을 세우고 있습니다!, '"
그 즉시 적으로부터 다음 생각이 들어 왔습니다.
"넌 네가 하는 말도 못 알아듣잖아?"
"그래, 나는 신성한 비밀을 말하고 있으니까!"
"근데 너, 기도하기 전에 평소와 다른 어떤 느낌을 느끼긴 했니?"
"마귀야, 나는 느낌에 의해 행하지 않아. 나는 성경이 말하는 것에의해 행한다! 그리고 이건 육체적인 세움이 아니라, 영적인 세움이야. 네가 못 읽는다면, 내가 이 성경말씀을 읽어 주지." 그리고서 나는 마귀의 모든 고소에 대한 대답으로 그에게 다양한 구절을 읽어 주었습니다. 나는 다 읽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귀야. 나는 한 시간 동안 방언으로 기도할 거니까, 너는 네 갈 길 가라!"
그런 후에 나는 눈을 감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기도에 대한 어떤 열정이나 기름부음은 없었지만, 나는 영으로 기도했습니다.
잠시 후에, 나는 한 시간 넘게 기도한 것 같았습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시계를 보았더니, 겨우 10분밖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어서 계속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잠시 후, 한 시간 정도 기도한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한시간 반은 한 것 같았습니다! 시계를 보았습니다. 겨우 20분이 지났습니다. 오, 주여!
나는 계속했습니다. 절대 한 시간을 방언으로 기도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한 시간이 그렇게 긴지 몰랐습니다!
어쨌거나 나는 한 시간 동안 고군분투했습니다. 일어나서 의자에 앉자, 어떤 음성이 내 마음에 말했습니다. "봐, 넌 시간만 낭비했잖아! 넌 주일 설교 준비를 해야 했어. 그리고 나가서 심방도 해야 했지. 그런데 그 대신 여기서 한 시간을 완전히 낭비했어. 그게 네가 한 짓이야!"
내가 말했습니다. "마귀야, 난 한 시간을 낭비한게 아니야. 다시 읽어 주마." 내 성경은 여전히 고린도전서 14장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께 비밀을 말한 거다. 넌 그 비밀에 끼어들 수 없으니까 화가 났겠지!"
"하지만 너는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잖아!"
"그래." 내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한테 기도하는 게 아니야. 나는 하나님께 말하는 거야! 중요한 건 그분은 내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신다는 거지. 게다가 나는 나 자신을 세웠어.
마귀야, 그렇게 때문에 나는 다시 무릎을 꿇고 두 시간 더 방언으로 기도할 거다. 그리고 그 두 시간을 채울 때 네가 또 뭐라고 하면, 나는 두 배로 할 거다. 다음에는 네 시간을 해버릴 거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무릎을 꿇고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쉬웠고, 나는 영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두 시간을 채웠습니다. 아무런 열정이나 기름부음이 없었지만, 나는 두 시간을 더 방언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나는 방언으로 세 시간을 기도하고, 일어나서 다시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 전에는 그렇게 길게 영으로 기도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어떤 음성이 내 마음에 들려왔습니다. "그래, 두 시간을 더해서 총 세 시간을 시간을 낭비했구나. 그래서 뭐 좋은 게 있니? 기도 하기 전보다 좀 기분이 나아졌니?
나는 말했습니다. "나는 느끼는 것이나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나는 믿음으로 행한다."
"좋아, 하지만 네가 무슨 기도했는지 아니?"
"아니," 내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한테 기도한 게 아니야. 나는 하나님께 비밀들을 말한 거야."
"네가 알지도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게 너한테는 무슨 도움이 되지?"
"나는 나 자신을 세우는 거야.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나 자신을 건축하는 거다."
"그래, 하지만 너는 그 시간에 설교 준비를 끝낼 수 있었어. 이제 시간은 지나갔고, 넌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어."
내가 말했습니다. "이 마귀야, 내가 경고했지? 네가 또 무슨 소리를 하면, 나는 두 배 더 방언으로 기도할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난 다시 무릎 꿇고 네 시간 동안 방언으로 기도할거야!"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고 또 다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1시간 45분을 더 기도하자. 나는 물줄기가 터져 나오는 분출구를 터트렸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묘사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기름부음 가운데 내 영과 이성 모두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장래 일들을 보여주심으로 계시가 임했습니다(요 16:13).
그 때까지 나는 어떤 열정이나 기름부음 없이, 나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면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분출구를 터트리자, 계시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의지의 행동으로 방언 기도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 "분출구"는 결코 터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언 기도는 마치 유정(油井)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유전업자가 유정을 파는 데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면, 모든 기름은 땅속에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유정을 터트릴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유전업자가 기름을 파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기름의 흔적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4시간 45분 동안 어떤 열정이나 기름부음 없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당신에게 유익했습니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나는 수년간 셀 수 없이 많이, 단지 내가 원해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의지의 행동으로 방언 기도하는 것과 기름부음으로 기도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해 기도하면서 더 깊은 기도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기적이 일어나고 계시가 임합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날 나는 그러한 깊은 기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데 거의 다섯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매일 지속적인 방언 기도를 통해서, 나는 성령 안에서 10분 안에 그 자리로 들어갈 수 있는 정도에 왔습니다.
만약 당신도 같은 일, 즉 매일 시간을 늘리면서 방언기도하는 일을 시작한다면, 당신은 더 깊은 기도의 영역으로 빨리 들어가는 법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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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말씀사 "방언 오순절 다락방 경험을 넘어" 중에서...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찾도록 하나님께서 제공해준 가장
위대한 자산 중에 하나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증거가 있는 성령의 세례입니다 (행 2:2~4)
성경은 당신이 알지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할 때 당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4:14) 당신이 성령이 말하게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기도할 때 당신의
영은 활동적으로 하나님과 의사 소통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는
것은 당신의 영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이것은 기도에 큰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2은 당신이 방언으로 기도할때 당신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내나 인도를 구할때 성령님은 당신이 방언으로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비밀을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경험을 통해서도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내 몸을
조용하게하고 나의 마음을 중립적이 되게 하여 내가 나의 영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로 바쁘게 소란을 피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마음도 똑같이
시끄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시오! 만일 당신의 마음이 혼적인 생각이나 마귀의
거짓말로 당신을 계속해서 공격함으로써 당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으면 당신은
성령님이 당신의 영에게 하는 말씀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나는 기도하면서 나의 마음과 몸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 점점 쉬워졌습니다.
전에는 내가 마음과 몸을 조용하게 하는데는 적어도 방언으로 한 시간 반 정도를 기도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몇 분이면 됩니다. 이와같이 영적인 것도 자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연습을 해야합니다. 예를 들면 야구 선수들은 다가올 야구 시즌을 대비하기
위해서 봄에 연습을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당신도 하나님 앞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많은 시간을 기다리면서 보내면 보낼수록 잠잠하게 되어 당신의 심령에 귀를 기울이기가
더 쉬워집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중에서)
예언은 초자연적인 말을 우리가 알고 있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각종 방언은 초자연적인 말을 우리가 모르는 말로 말하는 것입니다
방언 통역은 방언으로 말한 것의 뜻을 초자연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셀 모임에서 성령인도받기" 에서 )
(*'방언기도의 능력을 풀어놓으라"라는 소책자가 많은 유익을 줍니다)
글렌 아키레온
방언은 우리 안에 숨겨진 보물을 끄집어 냅니다. 말씀은 “우리 몸에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방언은 우리 안에 숨겨진 보물을 끄집어 냅니다. 말씀은 “우리 몸에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방언을 하면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강해집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 주변의 공기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기름부음, 하나님의 권능으로 언제나 충만합니다. 존 g 레이크는 자신의 사역의 근간은 방언기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의 사역의 배경에도 방언기도가 있었습니다. 아주사 대부흥의 윌리엄 시무어의 사역의 배경에도 방언기도가 있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우리는 오직 [그]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말하는 사람이 어떤 것인지 분명한 아는 정관사입니다. 신약에서 [그]기도라 함은 바로 초자연적인 언어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이 방언기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그] 기도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온갖 기도는 다 하지만 방언기도하고 있지 않지요. 사도행전 19장을 보시면 주님께서 어떻게 사도바울의 손을 통해 기적을 행하셨는지 나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바로 방언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언어는 하나님의 권능의 풀림입니다. 거기에 기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냐구요? 초자연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초자연의 영역에는 어떻게 들어가냐구요? 하나님의 언어를 통해서지요 즉, 초자연적인 언어를 통해서입니다. 계속하여 영으로 기도를 하게되면 그 기름부음이 함께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지요.
초자연적인 언어를 모르면 초자연적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방언기도는 우리를 초자연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육의 세계를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초자연적인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당신처럼 몇 시간씩 방언기도를 하면 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데 어떤 느낌인가요? 모든 것이 쉬워집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영의 세계 즉 주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면 당신도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게됩니다. 일단 하나님의 영역에 함께 있게 되면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모든 환상이나 꿈이 아주 쉬워집니다.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하나님의 권능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루어질 것을 믿게 됩니다. 복잡한 문제들도 아주 쉽게 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