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과 회개는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릅니다. 그러면 자백과 회개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요?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3:2)라고 전파했습니다. 요한의 설교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마3:5-6)
이로 보건대 자백은 회개의 일부분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잠언 28:13절에도 나타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이와같이 처음에 자백은 회개의 한 부분으로서 회개에 포함되어 존재합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7:10)가 영혼 속에 이루어지면 그 때부터는 자백과 회개가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의 자백은 바로 이 두번째 종류의 자백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두번째 종류의 자백을 설명해
나가면서 구원받은 영혼도 버림받을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버림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왜 자백을 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것도 날마다 자백해야합니다. 29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지만 성자다운 삶을
살아간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은 " 우리는 죄를 범하는 바로 그 순간 지체하지말고 죄를 고백해야한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중이거나, 공부를 하는 중이거나, 심지어 설교하는 중이라 할지라도 죄는 바로 고백되어져야만한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죄를 고백해야합니까? 거기에는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것이요" (요한일서 1:9)
(1) 자백을 해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구원파에서 나온 이단인 박옥수 목사는 "주님께서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받는다"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렇게 믿고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요한은 자백해야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됩니다.
그러나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난 이후에 짓게되는 죄들은 계속 자백을 함으로써
용서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를 자백은 신앙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백을 발을 씻는 것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8~10)
(2) 자백을 해야 불의에서 깨끗케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많은 이들이 '죄사함'과 '불의'에서 깨끗케되는 것'이 같은 것인줄 압니다. 저도 한 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
둘의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본문의 '죄를 사하시며'에서 '사하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는 '빚의 탕감'
'허물의 제거' '책임의 해제'등 죄 용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끗케 하실'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리세'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시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것을 다윗의
유명한 회개시인 시편 51편은 말씀과 비교하여 설명해보겠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편 51:9)
이것은 '우리 죄를 사하시며'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시편 51:10)
이것은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백을 하면 단순히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회복이라고 부를수 있는 영적 정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은 항상
같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자백을 했는데도 영혼이 정화되지 않으면 그 자백은 올바른 자백이 아니라는 뜻이고,
따라서 죄용서 역시 받지못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습관적인 자백을 하지말고 성경이
요구하는 올바른 자백을 해야합니다.
2. 성경이 요구하는 자백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죄용서를 간청한다고 다 자백이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자백과 무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참된 자백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2장 1절 말씀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하려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 말씀에 보면 참된 자백의 두 가지 특성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1) 죄를 범치 않기위한 목적으로 하는 자백이라야 참된 자백입니다.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죄를 범치 않게 하려함이라"
금세기 최고의 복음 전도자로 손꼽히는 라인하르트 본케는 '보혈의 능력'이라는 소책자에서 "주님의 보혈은
죄에 대한 면허장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말을 자백에 대하여 할수있습니다.
자백은 죄에 대한 면허장이 아닙니다. 자백은 비유컨대 배의 구명대와도 같습니다. 항해하는 모든 배에는
구명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든 배들은 항상 폭풍우를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배라도 파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명대는 바로 이와같은 배의 파손이나 충돌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선장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상상해봅시다. "우리 배에는 안전을 위한 충분한 구명대가 있다. 그러니 암초에 부딪혀도
문제없어. 어디 한 번 암초를 들이받아볼까?" 그런데 자백을 하면 용서해주실 것이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와같습니다. 구명대는 파선을 대비한 것입니다.결코 구명대를 믿고 파선하라고 준비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백 역시 만일의 범죄에 대비한 것이지 안심하고 범죄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백은 다시는 범죄치 않게 하기위해 존재합니다. 이에 관하여 요한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함이라"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백이 안심하고 죄를 지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죄를 범치 않게
하려고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줄곧 주님의 말씀대로
잘 순종해오다가 어느날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자백이 없다면 "나는 이왕 버린 몸이다. 에라 될대로
되라" 하고 자포자기하여 더 큰 죄를 지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자백이 있는 까닭에 '내가 비록
범죄했지만 자백하면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주실거야. 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어. 주님앞에 내 죄를
자백하고 다시 출발하자' 이렇게 마음먹을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3~4)
이와같이 주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이유는 다시금 주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하는 자백이라면 그것은 참된 자백이 아닙니다. 죄를 청산하고 새 삶을 살기위한
결심으로 하는 자백이라야 참된 자백입니다.
(2) 주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우발적인 범죄에 대하여 주님께 아뢰는 것이 참된 자백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집에 가서 죄짓고 교회에 와서 자백하고, 집에 가서 죄짓고 교회에 와서 자백하고 하는
생활'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명한 전도자 D.L 무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계속 범죄한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고백이다. 그것은 배에 난 구멍을 막지 않고
계속 물을 펌프로 퍼내는 것과 같다. 자백은 계속되는 범죄 속에서는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된 자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자백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자백은 거듭난 신자가 주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때로 유혹을 받아 우발적으로 지은 죄를 주님께
아뢰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본문의 문맥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로 아노라" (2:3~5)
여기서 '저를 안다' '진리가 그 속에 있다' '저 안에 있다'는 것은 모두 구원받은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들은 곧 주님의 계명 혹은 말씀을 지키는 자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운류과 기조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때때로 유혹에 의해 우발적으로 죄를 범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빌어야 알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때하는 것이 바로 자백입니다. 자백의 대상은 고의적이고 습관적인 죄가 아닙니다.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죄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2장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이라는 표현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만일"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발성'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적이고 고의적인 죄를 자백하는 것은 회개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백일수는 있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자백은 아닙니다.
3. 자백을 해도 효과가 없는 이유
웨슬리 듀엘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죄를 자백했지만 그 마음을
강퍅하게 먹었고(출9:27,34), 발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했지만 (민22:34) 자신의 고집대로 행했다. 그래서 발람은
그가 바라던바 의인으로서의 죽음을 갖지 못하고 (민23:10) 악인으로써 죽음을 맞았다 (민 31:8) 아간과 (수7:20)
사울 (왕상 15:24)과 유다 (마27:4) 모두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지만, 이들 중에 온전히 회개하여 용서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자백을 하는 이유는 죄용서를 받고 영적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요일1:9) 그런데 방금 언급한
사람들은 자백을 했지만 그 누구도 죄용서를 받거나 영적으로 새로워지지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같은 일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부단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매 주마다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런데 그 자백이 과연 효과가 있습니까? 과연 자백하는 사람들이 사죄의 확신과 새로워진 영을 가지고 기쁨으로
교회를 떠나갑니까? 그러면 왜 그럴까요? 그것을 이해하려면 '범죄'와 '타락'의 차이를 구별해야합니다. 범죄와
타락은 다릅니다. '범죄'는 순종하던 중 우발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타락'은 그 죄가 습관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타락이 범죄보다 더 크고 심각합니다. 이와같이 범죄와 타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해결책도 서로 다릅니다. 범죄한 경우에는 자백만으로도 해결됩니다. 한 번 그런가 안 그런가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회상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고 있던 중 때때로 우발적으로 죄를 범했을 때는 죄를 자백하자마자
사죄의 확신이 옵니다. 그리고 자기의 영이 흐려졌다가 곧 깨끗해지고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있습니다. 이와같이
범죄의 경우에는 단순히 자백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타락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타락했을 때에는
자백이 아니라 회개를 해야합니다. 범죄보다 더 큰 것이 타락이고 자백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타락에는 회개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회개는 주님을 처음 믿을 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시 회개할 필요가 있을까요? "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범죄했을 땐 자백만 하면 됩니다.
이미 회개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회개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을 했을 땐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타락을 통해 그가 회개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히브리서 6장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1~2)
보십시오. 회개는 기독교의 첫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회개한 사람은 "...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라는 말씀대로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을 계속 보세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 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3~6)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은 타락했으므로 회개를 해야 되는데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서론에서 말했듯이
1. 한 번 비췸을 얻고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3.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4.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했으며
더욱이 그들은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사람들은 다시는 회개할 수없습니다. 그들은 영락없이 지옥행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4가지를 다 체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락했거나 설사 4가지 과정을 다 경험했더라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단순히 유혹에 못 이겨 도덕적으로만 타락한 자들은 아무리 깊이 타락했더라도 회개가
가능합니다. 그들은 다시 회개할 수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왜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자백을 하는데도
죄사함과 깨끗케 함을 받지 못하고 답답하고 정죄받은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생기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백이 아니라 회개를 해야합니다 회개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백도 시급하지만 회개는 더 시급합니다. 범죄한 자가 자백을 한 두가지 안 했다고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자는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들은 서둘러
회개해야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백한 뒤엔 용서받은 것을 믿으라" 고 가르칩니다. "요한 일서 1장 9절 말씀을
기억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말씀에 굳게 서라" 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열납 하실만한 올바른 자백을
하고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소하는 영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메시지가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지는 자칫하면 영혼을
우롱하여 멸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백을 해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그가 단순히 범죄한 것이 아니라 타락했기 때문이며 그렇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자백이나
죄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않고 불도 꺼지지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함을 받으리라" (막9:43~49)
이것은 제가 설교도중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에 저는 이 성경구절이 불신자들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증거로 이 말씀의 바로 전에 보면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니라"(42)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후 바로 이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들이 눈으로, 손으로, 발로 짓는
다양한 죄가 다른 영혼들을 실족케 할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그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도
입증됩니다. 이 말씀 바로 뒤에 있는 구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소금은 좋은 것이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50)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런데 맛 잃은 소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바꾸어말해서 눈으로,손으로, 발로
범죄하는 이들이 바로 맛잃은 소금입니다. 즉 변질되고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무서운 경고의
대상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 중 습관적인 죄에 빠져서 죄를 끊는
회개를 하지않고 멸망받을 위험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 변승우 목사님의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 > 중에서 -----------
'구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현대교회를 장악한 거짓복음/아더 핑크 (0) | 2008.09.19 |
---|---|
[스크랩]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본질과 그 신앙의 습득방법(고후 8:5) -아더핑크- (1) | 2008.09.17 |
[스크랩] Re:구원에 이르는 회개. <변승우 목사님> (0) | 2008.09.13 |
[스크랩]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그 사이에 생명의 좁은 길이 있습니다!"(전체 공개) (0) | 2008.07.21 |
[스크랩] 구원은 단지 죄사함이 아니라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 변승우 목사님 (0) | 2008.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