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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님의 교회Ⅳ (더 높은 부르심) - 릭 조이너

하늘감동 2008. 11. 22. 19:49
목요일, 19 칠월 2007

 

 

 

지난 2~30년간 산업계에는 개조가 붐을 이루었습니다. 이 개조작업은 기본적인 조직 구조에서부터 제품 생산 과정, 마케팅 및 유통 과정에까지 전방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같은 흐름은 여러 산업과 비즈니스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떤 분야에서는 부진한 실적을 개선하는 정도의 적은 효과만 보고 결국에는 실패하고 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개조 바람은 여러 교회 안에서 유행이 되었고, 변화가 절실했던 많은 교회에는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일부 교회에서도 스타일이나 근본 조직 같은 것을 바꾸었지만, 실패한 사례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본 메시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세상의 방법이 줄 수 있는 도움의 한계 때문에 그랬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매우 결정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 친구인 프란시스 프란지페인이 가끔 말하는 것처럼 요즘 교회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필요한 주님만 빼고 말이지요. 우리 안에 계셔서 주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시고, 이를 통해 우리를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으로부터 구별시키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저 세간의 이목이나 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주님께 매력적인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직접 세우실 때 가능합니다..

 

물론 시대에 맞게 적절하게 적응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 시대상황에 적합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 여인에게 거듭나는 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시고 생수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목마른 사람이었지 니고데모와 같이 나이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게 각각 다른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 교회들이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 있는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각 교회에는 독특한 필요가 있으며, 고유의 목표가 있습니다.

교회가 인류 역사에 범한 가장 큰 범죄 중 하나는 너무 지겹고 경직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주님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일 입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모든 창조물들은 주님께서 얼마나 다양성과 창조성을 사랑하시는지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자를 알고 그분을 나타내는 일에 부름 받은 크리스찬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넘치는 창조력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패션, 음악, 영화, 그 외 모든 장르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최신의 트렌드를 찾는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시대 교회는 모든 영역-음악이나 리더십, 경영, 혁신 트렌드까지도 이 세상에 몇 십 년은 뒤져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앞서 나가는 세상의 수준이나 깊이에 조차 미치지 못하는 더 슬픈 상황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변화될 것이며, 한번 시작된 변화는 더욱 빠르게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변하고자 한다면, 세상이 훨씬 잘하는 분야 예를 들면 연예오락과 같은 분야에서 세상과 경쟁하려는 생각을 먼저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술이나 오락 위에 무엇인가 세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예배가 쇼에 지나지 않고 영속할 수 없는 것을 세우는 일에 불과하게 됩니다.

 영속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형태의 오락보다도 훨씬 흥미진진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장 깊은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가 가질 수 있는 두 번째 강력한 제품은 진정한 교제입니다.

주님께서 좋지 않은 것이라고 가장 먼저 지적하셨던 것이 바로 고독함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다는 보고가 무척 많습니다. 아파트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몇 년이 지나도록 서로 이름도 모르고 지냅니다. ‘Cheers’나 ‘Friends’같은 드라마가 그렇게 인기 있는 이유도 다 이 때문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실제 친구를 만들기 보다는 드라마 속 인물과 가상의 관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파괴되면서 이런 외로움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깊은 교제를 나누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런 패턴을 따라가는 조직이라면 외로움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처음 온 사람들이 환영받는다고 느끼도록 노력해야 하며,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서 쉼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의 깊은 교제를 보게 되었으나,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게 되면, 반감만 생기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진정 어린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위에 세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교회는 이 사람들을 향해 우리 마음과 가정의 문을 열 것 입니다.

 

주님의 임재나 진정한 교제와 같이 정말로 중요한 요소들을 기억하면서,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창조성과 리더십 이슈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우리는 왕 중의 왕이신 주님- 모든 규칙과 권위, 주권 위에 계시는 분을 드러내도록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은 최고의 리더십과 경영법을 배우기 위해 교회의 문을 두드려야만 합니다.

최고의 지도자 우리 왕이신 주님을 섬기는 그분의 제자들 외에 더 뛰어난 리더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교회는 이런 리더십에서는 한참 멀어진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변화할 것입니다. 수백 년간 갇혀있던 교회 안의 창조성이 이제 곧 펼쳐질 것처럼 말입니다.

창조력과 리더십은 서로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역사상 훌륭한 지도자들은 대개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이었으며, 동시에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는 한계를 뛰어 넘어서 생각했던 이들입니다.

또한 범인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혁신해 나갈만한 자신감과 담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부르심은 머리이지 꼬리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세상이 교회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기본적인 속성 역시 창조성과 리더십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가까이 따르는 자 역시 주님의 그런 모습을 배울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완전히 변화되어 그 누구보다도 큰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고 살았다는 것이 아마도 좋은 예일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는 커다란 성령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들 가운데 이런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 지도자들은 장차 세계 교회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새롭게 일어나는 이 세대는 지금까지의 어떤 세대와도 다른 특별한 점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엄청난 잠재력을 봅니다.

급진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가 이 땅에 본이 될 뿐만 아니라, 이전 세대들이 진정으로 꿈꾸어 온 바, 주님이 약속대로, 주님보다 더 큰 사역들을 시작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그 일에는 많은 장에 물들이 있겠지만, 우리 젊은 세대들은 계속해서 도전해 갈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수아 9장 3~6절에 나온 것처럼, 그는 실패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제 같은 함정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3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4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6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의 속임수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과 언약을 맺었고,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바로, 성공하기 시작했을 때, 주님의 약속의 땅을 취하기 시작했을 바로 그때, 상한 빵과 낡은 가죽부대를 가지고 오는 이들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념비적인 승리가 새로운 세대에서 일어날 때, 이들은 협력과 동맹 관계에 의지하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동시에, 이 세대는 그 약속의 땅에서 자기 부모님을 잘 섬기지 못하면, 그 땅에 오래 거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땅에서 장수할 수 있는 약속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이 두가지를 잘 균형 잡아야만, 이 세대들이 바른 길에 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이스라엘 여러 세대를 거쳐 다스리면서 그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것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생각됩니다. 자신들의 다음세대가 일어나기 전, 그들이 청년이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 역시 그 당시의 새로운 세대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부모세대의 실수로 인해 광야에서 40년을 헤매게 되었지만, 그것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을 취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들임을 스스로 검증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인내입니다.

 

여기 새로운 세대가 또 다시 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이전 세대에도 특출한 리더들이 많이 있어 젊은 세대들을 이끌어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들 중년 세대 역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과거 세대의 많은 요소들이 빨리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세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라는 신앙의 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점점 불평하고, 화만 내는 나이든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은 바로 스스로 비전과 신앙을 키우기 위해 무엇인가 하기 보다는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는데 시간을 더 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세대에 있다는 말은, 은혜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든 이들을 위한 시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과거의 행동들을 회개하고 진정으로 필요한 지도자로 변화될 기회가 아직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요단강 앞에 거의 다다르고 있습니다.

 

 

 

 

 

 

 

 

 

 

 

목요일, 19 칠월 2007

 

 

몇 주 전에 저는 최근 몇 년간 본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환상 두개를 보았습니다. 환상을 통해 주님께서는 창조 당시의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셨고, 지금 주님 마음의 소원함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신부, 바로 교회였습니다. 이 비전을 통해, 주님께서 그 신부를 너무 사랑하셔서, 교회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나라가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의 방향을 수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근 2년 가까이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에 대해 공부해온 여러분들과 이 깨달은 바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나라에 대해 지금까지 나누어온 내용을 다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안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지구를 사랑하십니다.

참새 한마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참새가 떨어지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신부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 목적에 다다르려면, 교회를 향한 그 높은 부르심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해결해야 할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지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곁을 떠나서는 도저히 설 수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준비된 신부라면 주님의 사랑만을 구하지 교회의 이기적인 야망을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랑 안에서 그 목적과 기쁨을 발견해야 하며,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온 우주를 통틀어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할만한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방법은 어떤 고귀한 우리의 헌신보다도 더 높기 때문에, 그분을 조금만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그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까지 자라기 위해서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모든 것에 우선해서 구하고 있는 기름 부으심입니다. 이 기름부으심이 있을 때, 교회는 온전히 주님께만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고, 그분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물론, 제 안에 이런 기름부으심이 없을 때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또 가장 고귀한 부르심입니다. 그 높은 부르심에 나가는 자가 바로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입니다.

 

제 글을 읽어보신 분은 제가 쭉 교회에서 있었던 사람이란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모든 글이나 설교에서 항상 모든 신자들이 지역 교회에 속하도록 격려하는 비전을 나누도록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크리스찬이 되고나서 갖게된 한가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크리스찬의 진정한 영적 성숙을 위해서 생동감 있고 참된 교회 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이 생각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숙이 가능한 진정한 연합의 공동체가 너무나 흔치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 개인이 각자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면, 성도와 교회 양쪽 모두가 변화해야 하며, 또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미성숙한 교회일지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오히려 성숙한 교회에 있는 것보다 미성숙한 교회에 있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맛보는 모든 좌절과 분노를 통해서 우리는 정말 부르심에 합당한 예수를 닮은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불완전한 사람을 사랑하고 인내로서 그들을 돕는 일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신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미성숙한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오히려 쉽게 성숙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참하기 전에 교회가 틀을 갖춰주길 기다린다면, 정작 우리가 참여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교회는 앞서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곧 오실 것 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도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는 우리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 땅은 원래 만드셨던 모습 그대로 낙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더 높은 부르심이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하늘의 영역으로 초대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보좌에 앉아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선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는 관심이 없고 그 소원을 하늘에만 둔 영들을 향해 많은 비난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마음을 품은 크리스찬들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선한 일이라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늘이 우리의 진정한 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의 것에 대해 많이 소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사람들이 거의 2천년 동안이나 주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나라는 그 신부가 준비되기 전에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교회가 그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이 되도록 돕는 것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하늘에서 주님 옆에 앉아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지금 교회가 있는 그곳이 아니라 진짜 집에서 주님과 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열정을 품고 계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트랜스포메이션)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교회를 통하지 않으면, 그 성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언덕 위에 올려둔 등불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빛을 본 사람들이 그 빛의 근원을 찾아가는 곳이 바로 위대한 사회입니다. 교회는 이 지구상에서 주님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회와 문화로 이 세상의 잘못된 방법에 담대하게 맞서서 왕되신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공동체 없이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해낼 수가 없습니다.

공동체라고 해서, 반드시 옆옆집에 모여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서 성도들을 진정한 교제권 안에 묵는 힘이 있습니다. 이 땅의 가정은 자라가면서 점점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걷지만, 하늘의 가족은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 가까워집니다.

하늘에 속한 영적인 가족애는 점점 더 자라고 확장되어서 우리의 육체적 가족 관계보다도 더 강력한 결속을 맺게 될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찬들에게는 이와 같이 영원히 계속될 주님의 가정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이것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앞으로 몇주간은 이와 같은 목적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해서 그 목적을 잃어버린 자들을 일깨울 수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미 그 목적을 갖고 있는 자들이 더 높고 위대한 헌신을 하도록 기름부으심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몸이 함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대의 끝을 알리는 명확한 징조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는 주님의 몸이 하나 되기 전에는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일어날 때, 천국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가장 위대한 난공불락의 요새인 교회에서 바로 복음 전파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주님의 기도와 예언대로 그분의 신부가 온전히 하나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가 참되고 진정한 교회 생활에 대한 언약을 갈망하게 될 때에, 교회는 함께 모일 수 있게 됩니다. 교회가 함께 모이기 시작하면, 주님은 그 안에 계시고, 교회는 교회 자신보다도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반응하는 크리스찬들은 놀라운 공동체의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지만, 그 때에도 우리는 온전히 주님께 더 나가는 일에만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공동체보다도 주님을 더 사모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는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이는’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모임을 위해서 한자리에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자동차를 이루는 부품처럼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립되지 않은 부품은 별로 쓸모가 없을 것이나, 함께 연합하면 머나먼 길도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23~25절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폐하지 않고 함께 모이는 것은 그저 한자리에서 모임이나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동차의 각 부분처럼 함께 합력하라는 의미입니다. 각 부품 자체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자기 자리에 잘 조립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주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이 교회에 더해진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을 감화시킨 사역의 열매를 보십시오. 이 사역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사역의 열매들이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이들이 떠나갈 때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교회의 빛이 정말 더 밝게 빛나고 있습니까?

어째서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는 것입니까? 결국 무언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교회의 문제들이 복음전도자들의 탓이라고 책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설교와 치유, 그리고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모든 사역 가운데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초신자들을 교회로 보내는 일에 주저하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전도한 영혼들을 보내봤자, 교회가 초신자들을 죽은 종교인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아니면, 그 삶을 완전히 짜버려서 지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신약 시대 직접 교회를 세우던 사도들이나 예언자 교사들이 복음전도자들을 따랐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 함께 하는 사역을 배우기 전에는, 사역의 많은 열매들을 그냥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설교하고 아픈자들을 치유하고,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은, 그 사역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초신자들이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자기의 위치를 발견하고 성숙해갈 수 있도록 돕는 교회를 세우는 일 역시 정말 중요합니다.

 

요한1서 4장 20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신부가 우리 왕이신 주님께 합당한 신부가 되도록 힘써 돕는 것이 마땅합니다.

 

교회가 바로 주님이 가장 열망하는 존재이며, 주님의 기쁨이 우리 마음의 가장 큰 소원함이라면, 우리 역시 교회가 주님 앞에 준비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나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며 그분의 나라가 임하실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작성자 ANi선교회

출처 : 큰믿음교회
글쓴이 : 묘지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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