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의 진짜 적인가?
2009. 6. 8.
고전 9: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된 것이 주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사도와 선지자가 지금도 존재하느냐? 많은 교단들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되면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그들이 세례요한 때부터 예수님 따라다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게 이제 사도의 자격이다 그랬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어린양 12사도 자격이지 모든 사도의 자격이 아닙니다. 그게 모든 사도의 자격이라면 바울도 사도가 아니죠. 그러나 성경에 보면 바울이 분명이 사도입니다. 그 말씀가지고 보통 지금은 사도가 존재 할 수 없다 그랬는데 그것이 아닌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제는 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교단이나 신학자들이 너무 어이가 없는 것이 성경이 절대 진리이고, 교단의 진리는 절대 진리가 아닌데 계속 베뢰아 사람들처럼 어떻게 성경적인가 열린 맘을 가지고 성경적인 걸 받아 들여야 되는데 그냥 자기들의 기준을 계속. 그게 바리새적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장로의 유전을 따랐는데 세례 요한이 와서 바른 걸 가르쳐 주면 그걸 배워야 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바른 걸 가르치고 바울이 와서 바른 걸 가르치면 그걸 배워야 되는데 그냥 비성경적인 자기 기준을 가지고 세례 요한을 공격하고 예수님을 이단이라 그러고. 이게 지금 한국교회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단사냥꾼들이 하고 있는 일이고, 많은 교단들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단 시비에 대해서는 내려놨어요.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젠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무지하고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뭐라고 평가하든. 여러분 카페 보셨는지 몰라도. 이인규 권산가?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누군가 글을 올려놨던데 내가 어제 그것을 읽고요. 잠이 안 오더라고요.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것 같은 느낌. 뭐~ 이런 게 다 있나~ 왜냐하면 제가 얼마 전에 예언 사역에 대해서 예언의 은사 받은 사람들은 무당의 영을 조심해야 된다고 했잖아요. 그 설교를 뭐라고 써놨냐 하면! 변승우 목사는 무당의 영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이건요. 정신병자가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무당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딱 끊어가지고 야~내가 이걸 딱 보고 아~ 정말.
첫 번째 조사에서 이단성이 아무것도 없는 걸로 됐는데.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 이단 사설이 아닌 걸 가지고 처음부터 이단으로 몰려고 왔어요. 이번에는 총회 때도 당당하게 반론을 제시하고 또 카페에다가 총회에서 물은 질문하고 내가 답변한 거하고 총회장한테도 보내고 이대위 위원장에게도 보내고 공개로 딱 해 놔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결정하는지 지켜보겠다. 나는 이제 관심이 없어요. 총회에서 뭐라고 결정을 하든. 나쁜 쪽으로 결정이 나면 하나님께서 교단 세우라는 뜻으로 알고 교단 세우고 신학교 세울 것이고. 즐겁게 신앙생활하면 되고. 아니면 뭐~ 더 세력이 커질 때까지 같이 가는 거고.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어도 발람처럼 탐심을 품거나 교만하거나 분별이 없으면 마치 무당이 은사를 사용하는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그걸 경고한 거를 어떻게 그 말을 갖다가 변승우 목사는 무당의 영도 성령의 은사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거기다 또 꼬리말을 달아요. 이런 목사가 어디 있느냐! 내가 막~ 현기증이. 어제 잠이 안와요. 잠이. 이건 한국교회의 죄입니다. 얼마나 한국교회가 서로 물고 뜯고 불의하게 시기심가지고 다른 교회를 공격했으면 이런 작자들이 활동 하는 게 다 통하냐고요. 이건 대범 교계에서 제명시켜버리고 교회에서 추방해야 될 그런 악인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어제 그걸 읽고. 주님, 용서해야 되는데. 이걸 용서해야 되는데. 그래서 무조건 용서합니다. 아무튼 난 무조건 용서하기로 결정합니다. 한참 기도하다 보니까 가만히 생각이 드는 게. 야~ 이인규가 내게 해로운 게 아니고 내가 내게 해롭다. 이인규가 내게 위협이 되는 게 아니고 내가 내게 더 위협이 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한평생 살아오면서 이인규라는 사람의 헛소리에서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을 미혹하겠지만 내게 얼마나 치명타를 입히겠는가? 그러나 나 자신은 자신을 얼마나 위태하게 많이 만들었는가? 가장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닌가? 가장 원수는 내 자신이 아닌가? 내가 이인규에게 분노할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분노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합당한 사람이 되고. 그렇게 생각이 가져야 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갑자기 분기탱천해서 용서하는 기도를 억지로 막 하다가 회개기도로 들어갔어요. 주님, 내 원수는 이인규가 아니고 주님 내 원수는 납니다. 주님 내 원수는 납니다. 나를 가장 위태롭게 내 일생에 나를 가장 위태롭게 한 것은 내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이인규 그냥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신경 쓰지 않고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그리고 났더니. 그런 게 다 사라졌어요.
여러분, 사도라는 게 선지자라는 게 지금도 존재해요. 계속 배워나가야 되요.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여러분, 계속 열린 마음으로 배워나가야 됩니다. 죽을 때까지 열린 마음으로 배워나가야 되요. 사도는 어떤 사람이 사도냐. 사도의 자격이 뭐냐. 우리가 성경을 아는 것 같아도 몰라요. 여기 1절을 보면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사도의 자격을 여러 가지로 말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였는지 아세요?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영적인 큰 깊은 체험을 한 사람. 이게 사도의 자격 중에 하나라고 가르쳐 왔어요. 피터 와그너 박사도 초창기엔 그랬고, 사도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거의 그렇게 가르쳐 왔어요. 그런데 나중에 피터 와그너 박사가 미국에서 사도 협의회라는 협의회를 만들어서. 본인들이 생각할 때에 사도로 기름부음 받아가지고 쓰임 받는 수백 명의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들을 만나보고 설문조사를 해보니깐 그 목사님 중에 70%인가 80%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요. 서로 저 사람은 사도의 부름을 받고 기름부음 받고 사역한다라고 생각하고. 거기는 서로 사도라고 부르고 선지자라고 막 부르고 그래요.
그런데 그 중에 설문 조사를 했더니 피터 와그너 박사가 볼 때 저 사람은 사도다. 다른 사람이 볼 때도 본인이 볼 때도 사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70%인가 80%인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피터 와그너 박사가 한국에 와서 집회를 할 때 사도의 경험이 꼭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번복을 했어요. 여러분, 어떤 게 맞는 거 같아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저보고 사도라고 예언을 했어요. 그러니까 카페에 어떤 사람들이. 저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글을 실어놨어요. 변승우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느냐~ 만난 적이 있느냐~ 이 말씀가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승우가 어떻게 사도냐~ 변승우는 사도가 아니다. 막 그런 글이 올라오기도 했어요. 그렇게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여러분, 오늘 진실을 얘기하겠습니다. 무슨 진실이냐 그러면~ 저는 사도입니다. 사도입니다. 저도 이 말씀이 궁금했어요. 왜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까? 나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 내 눈으로 예수님을 직접 본적은 없어요. 그런데 나는 사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아도요 아는 것 같아도 몰라요. 내가 이 말씀을 얼마나 잘 아는 말씀인데요~ 오늘 내가 딱 읽는데 이 말씀이 보이는 것입니다. 참 잘 아는 말씀인데 지금 이 말씀이 보이는 것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말했나 보세요?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여러분, 이게 사도의 자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의 자격하고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도라고 말한 거지 내가 예수님을 봤기 때문에 사도다~ 그 말하지 않았어요. 성경을 가만히 보세요.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자유자가 사도라는 증건가요? 아니죠? 마찬가지로 내가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그것도 사도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나는 자유자고 나는 사도고 나는 예수님을 봤다. 그 얘기입니다. 사도는 꼭 예수님을 본 사람이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안다고 그러면서도. 성경을 두루뭉실하게 보면서.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읽는지 몰라요. 성경에 사도의 자격으로 예수님을 봐야 사도라는 게 없어요. 반대로 예수님을 보면 사도에요? 입신하는 사람들이 다 사도겠어요? 그래서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이 다 사도겠어요? 전혀 아니죠.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봤다가 사도가 아닌 것처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보지 않았다고 사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이게 왜? 인제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보니깐 여기서 사도바울이 사도의 자격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자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자고 나는 사도고 나는 예수님도 봤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다. 내 열매가 너희들이다. 그 얘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봐야 사도다~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이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을 하면 안돼요. 강금성 목사님 말씀하신 대로 성서신학을 해야 돼요. 조직신학이 흠이 뭐냐 그러면. 바로 이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도 그래서 사도에 대한 구절을 다 끌어내가지고. 그냥. 탁 탁 탁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런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맥으로 깊이 안보고. 어? 내가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느냐. 얼렁뚱땅 읽고. 아~! 사도는 예수님을 본 사람이 사도구나. 사도의 자격! 사도는 예수님을 본 사람이다. 괄호 고린도전서 9장 1절. 이게 조직신학입니다.
조직신학, 조직신학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러분. 제가 신학교 때 조직신학 책들을 읽고요. 아주 실망을 했어요. 이거 아주 웃긴다. 괄호하고 성경구절 찾는. 사람들은 그냥 단순해요. 이게 성경에 근거가 있는가 보다 보통 그렇게 넘어가요. 저는 안 그래요. 전 그걸 찾아봐요. 진짠가? 진짠가 찾아보면 이런 식의 인용입니다. 다는 아니래도 상당부분이 이런 식의 인용입니다. 전혀 그 의미가 아닙니다. 그냥 비슷한 단어가 나오는 것뿐이지 전혀 그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조직신학이래는 거는 자기 교리대로 자기 생각대로 신학을 짜깁기해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을 하면 안돼요. 아주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성서신학을 해야 돼요.
성서신학이라는 것은 성경의 문맥을 철두철미하게 쫓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강해설교도요 조직신학적으로 강해설교를 하니까 문젠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수많은 강해설교자들이 성경 한장 한장 자세하게 강의해 나가면서 왜 견해가 안 바뀌느냐.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생각을 갖다가 성경으로 각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신학 관점에서 내가 아는 것을 가지고 성경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 생각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문맥을 따라가게 되면 거기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해설교자들에게 패러다임 전환이 안 일어난다. 그건 그들이 근본부터 틀린 것입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한국의 유명한 강해설교자들이 성경을 접근하고 설명하는 게 근본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생각을 다 내려놓고 내 교단의 교리도 내려놓고 신학도 내려놓고. 다 내려놓고 그냥 정직하게 성경의 문맥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성경의 문맥을 보고 성경이 진짜 말하는 게 뭔가. 그걸 쫓아가야 바른 성경해석이 나오는 것이고. 그래야 제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 할 수 있게 되는 것일 줄 믿습니다. 성경을 조직신학적으로 보면 안 되고 성서 신학적으로 봐야 돼요. 성서 신학적으로 성경을 보시게 되기 바랍니다.
아무튼 여기 사도에 대해서 나온 게 그것입니다. 사도의 자격이 예수님을 꼭 본 사람만이 사도다. 성경에 전혀 안 나오는 얘기입니다. 사도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요. 사도는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 사도다. 물론 사도는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행합니다. 기도해서 그런 걸 행합니다. 또 사도의 기름부음이 강력하게 오면 그런 게 나타날 수 있죠. 그런 게 나타날 수 있는데 사도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가 강한데. 만일 정확한 예언을 말하면 이 사람이 선지자고 이 사람이 예언 할 뿐만 아니라 표적과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나면 사도고.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건 복음전하는 자입니다. 빌립처럼 복음전하는 자입니다.
사도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도라는 것은 건축자입니다. 바울이 말했잖아요. 자신에 대해서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사도라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봤다고 사도라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많이 행한다고 사도가 되는 게 아니고 사도라는 것은 건축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고 파송된 자인데 그 파송된 목적을 위해서 청사진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해야 될지를 알고 있는 자고, 어떻게 그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성취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자입니다. 건축자가 건축에 대한 설계도를 가지고 건축자가 많은 업자들. 미장이. 샷시. 벽지 바르는 사람 등. 다 불러가지고 결국은 하나의 집을 만드는 것처럼.
사도라는 것은 예수님 봤다 안 봤다. 이런 게 아니고. 기적을 많이 행하고 능력이 많고 이런 얘기가 아니고 사도라는 것은 큰 교회의 목사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의 주장은 엉성한 것입니다. 신디 제이콥스나 피터 와그너 박사 주장은 참 엉성한 것입니다. 체안 목사도 마찬가지고. 성도수가 900명 이상 되면 사도다. 그거 참 어리석은 얘기입니다. 왜 훌륭한 교사가 900명이 못 넘을 거라 생각하세요. 탁월한 교사가 왜 성도 900명이 못 넘을 거라 생각하세요. 탁월한 목사가 왜 성도 900명이 못 넘을 거라 생각하세요. 탁월한 복음전도자가 900명 못 넘겠어요? 빌립은 분명히 사도가 아니고 빌립은 복음전하는 자입니다. 사마리아 성 갔는데. 성이 완전히 들썩 들썩 거리고. 빌립이 거기서 목회했으면 900명 안 모였겠어요? 9천명도 모이고 9만 명도 모일 수 있죠! 900명 안 모였겠어요? 왜 탁월한 선지자가 900명을 못 넘을 거라고 생각하죠? 피터와그너 박사 강의를 들으면서 왜~ 참 무식한 소리를 하나. 왜 상식 이하의 말을 하나. 참 훌륭하고 좋은 분이고. 유익을 주시는 분인데. 내가 그 얘기들을 때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900명 이상 모이면 사도다.
사도는 큰 교회 목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본 걸 말하는 것도 아니고 치유나 기적의 은사가 강한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큰 교회 목사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라는 것은 그냥 목회하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대형 교회하라고 보냄 받은 사람도 아니고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낼 때는 너 가서 놀아라고 보낸 게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보낸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목사님들하고 저와 다른 게 뭐에요. 다른 목사님들은 그냥 목회하는데 저는 어떤 특별한 목적들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데에서 개혁해서 바꿔놓는다. 그래서 대부흥과 대추수를 위해서 예비한다. 예를 들어서 저는 그냥 목회 잘 해서 큰 교회를 세우고 이런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달려간다고요. 그냥 목회하려고 목회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목회하려고 목회하는 것도 아니고 큰 교회 만들려고 목회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어떤 특별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요. 그게 뭐냐 그러면. 그게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나를 부를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부르고 그리고 너는 세상에 나가서 이 일을 하라. 그러고 저를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청사진을 주는 것입니다. 청사진을 주고 전략을 주시는 것입니다. 청사진을 주고 전략을 주고 그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목회하는 것처럼 설교하고 성경공부하고 심방하고. 그렇게 목회 안하잖아요. 단순히 그런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한국교회를, 시대의 교회를 바꿔놓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대 부흥과 대 추수를 오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청사진들을 갖고 있어요.
진리의 회복이 먼저 있어야 된다. 그래서 진리의 회복을 위해서 책을 쓰고 진리의 회복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진리의 회복을 위해서 많은 공격을 받으면서도 영적전쟁을 하고 이단 시비를 겪으면서도 막 돌파하고 나아가고. 다른 목사들은 이런 일을 안 해요. 그다음에 정말 그 일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교회가 종교적이 되어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안 일어난다. 그래서 은사중단론이랑 싸우고 예언사역을 일으키고 치유사역을 일으키면서 직통계시 이단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듣고 모함을 당하고 그러면서 싸우고 나가고 책을 쓰고. 선지자 학교를 하고 중보기도 학교를 하고 국제적인 성령의 은사들로 강하게 쓰임 받는 강사들을 초청해서 집회를 해서 자꾸 참석자들을 통해서 목회자들을 변화시키고 한국교회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많은 성도들을 바꿔놓고. 우연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면 한국교회가 진짜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위 신부가 돼야 된다고요. 그냥 진리가 회복되고 성령 충만 하고 성령운동하고 이거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돼야 된다. 그러니까 모든 진정한 사역은 예수님과 친밀감에서 나오는 것이고 모든 깊은 지혜와 능력과 기름부음과 모든 열매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창조주이신 그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집중하고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을 깊이알고. 그래서 신부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단순히 영성운동 하는 교회가 아니고 우리교회는 신부운동을 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단순히 진리를 바로 알 뿐만 아니라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은사가 역사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게 하는 이런 흐름과 운동이 일으켜 나가도록 계속 책을 쓰고 설교를 하고 계속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전략입니다. 그 다음에 전략을 위해서 책을 쓸 뿐만 아니라 집회들을 유치할 뿐만 아니라 선지자 학교를 할 뿐만 아니라 또 예를 들어서 방송국도 세우고 또 그런 가르침들이나 메시지들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출판사도 세우고 앞으로는 신학교도 반드시 세워야 되고.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 뭔가 전략적인 걸 가지고 그때그때 주님이 인도하시는 분량만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쫓아가는 것입니다. 왜 우리교회는 다른 교회들이 안하는 일들을 자꾸 벌려 나가느냐! 그게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게 사도로서 저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사도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냥 꿈이 큰 게 아니고 하나님의 보내신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뚜렷한 목적이 있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전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도성이라는 것은 그가 지혜로운 건축자인가. 그가 하나님이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느냐! 그런 지혜와 그런 전략이 임해 있느냐! 그런 안목과 시각을 갖고 있느냐! 그런 일을 리더 해 나갈 수 있고 그런 일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느냐! 그래서 결국 주님이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실제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냐! 그게 사도성입니다. 영성운동 하는 데서도 너무 사도성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어요.
라이언 와이어트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진정한 사도라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길을 예비 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목회 잘하고 설교 잘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어떤 길을 닦아 놓는 거. 어떤 틀을 짜놓는 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교회들이 하나님의 원하는 대로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자기들 혼자 사역을 잘하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을 닦아놓고 본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는 틀을 형성해 놓는 것입니다. 마치 갈대숲이 있는데. 밀립이 있는데. 맨 앞에 사람이 칼로 그걸 자르면서 길을 만들어 놓으면 뒤에 오는 사람들이 편한 것처럼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사도인 것입니다. 자기가 사도로 부름 받은 그 영역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걸 여러분 사도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런 사도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대형교회가 일어난다고 교계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는 게 아닙니다. 우리교회보다 훨씬 큰 교회들 많아요. 그러나 우리교회와 같은 그런 파장을 못 일으켜요. 우리 교회는 상대적으로 작은 교회인데도 우리교회를 통해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고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많은 목회자들이 변화되지요? 사도들이 일어나야 교계가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일어나야 나라가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도들이 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불러서 시키는 일이 다 다른데. 그래서 결국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거. 그게 사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에게 주님이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영역들에 대한 어떤 사역들에 대한 사명을 줘서 보내가지고 결국은 교회를 결국은 나라를 결국은 그 시대의 교회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하나님 마음에 품고 있는 그런 교회로. 에베소서 5장에 나온 것처럼 영광스러운 그런 교회로. 그렇게 교회를 바꿔나가는 거. 그 일에 쓰임 받는 거. 그게 사도들입니다. 그게 선지자들인줄 믿습니다.
단순히 대형교회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 사도들이. 선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야 교회가 바로 돼요. 교회는 교사가지고 목사가지고 복음 전하는 자 가지고 바르게 안 됩니다. 우리교회 사역의 가장 큰 핵심 중에 하나가 뭐에요? 교회를 바르게 만든다 이거 아닙니까? 목회자들을 바르게 만들고 설교를 바르게 만들고 사역을 바르게 만들고 교회를 바르게 만든다. 교회가 바르게 되는 것은 사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도들이 일어나야 한국교회가 바뀝니다. 미국교회가 바뀝니다. 이 시대 교회가 바뀝니다. 이 시대 교회의 희망은 사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진정한 사도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또한 많은 진정한 선지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서도 사도들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서도 선지자들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교회 교역자들을 참 존경하고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경쟁하지 않고. 우리교회 부교역자지만 존경하는 분도 많고 존중하는 사람도 많은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제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이건 제가 예수님 앞에서 말합니다. 우리 교역자들이 이쪽 방면으로 탁월하고 저쪽 방면으로 탁월하고. 내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어요. 김옥경 전도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목사님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목사님이 없으면 큰믿음교회는 무너집니다.” 난 처음에 그 말을 쓸데없는 소리하네.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는 얼굴 마담이지. 다 실세들은 따로 있고 나는 얼굴 마담이고. 나는 부족한 자고. 나는 은혜로 쓰임 받는 자이지. 나 같은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만날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성령께서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줬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네가 없으면 큰믿음교회는 무너진다.” 나같이 부족한 자가 난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 “네가 네 자신을 보지 말고 내가 네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봐라. 봐라. 너는 네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 너는 부교역자들 중에 어떤 장점이나 네가 갖지 못한 훌륭한 점을 보고 그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 사람들을 크게 생각하고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건 은혜로 쓰임 받는 자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네가 봐야 될 것이 있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는 교역자가 있는가 봐라. 네가 갖고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교역자가 있는가 봐라. 네가 숨 쉬는 것처럼 쉽게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되는지 이 사역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고 어떻게 성취해야 되는지를 고민하지도 않고 염려하지도 않고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그런 전략들. 그런 전략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그런 전략을 받을 수 있는 교역자들이 있는가 봐라.” 없어요.
“네 주변에 내가 너와 같이 기름부음 받은 자가 있는가 봐라. 그게 너의 지혜냐? 넌 대단하지. 노력하는 것도 힘쓰는 것도 아닌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런 시각과 분별력을 갖고 어떻게 결정해야 되는지를 알고 무슨 사역을 일으켜야 되는 줄 알고 뭘 해야 되는지를 알고 이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되는지를 알고 이런 전체적인 설계도 같은, 혹은 전쟁에 비유하면. 제갈공명이 가지고 있었던 전략 같은 거.” 그게 제게는 그냥 삶입니다. 노력이 아닙니다. 그냥 알아요. 그냥 아무 노력도 안 해요. 그냥 알아요. 되게 기도하고 되게 애쓰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냥 알아요. 뭐 해야 되는구나. 뭘 어떻게 결정해야 되는구나. 그냥 자연스럽게 알아요. 숨 쉬는 것처럼.
내가 그러고 나서 주변에 내가 존중하는 동역자들이나, 목회자들을 봤어요. 하나도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단 한 사람도. 그래서 내가 알았어요. 아~ 나는 부족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미련하고 멸시받고 천한 것을 쓰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기름부음을 주셨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기름부음이 내게 와있구나! 이게 진짜 사도의 기름부음이구나. 무엇을 해야 될 줄을 알고 그 일을 어떻게 성취시켜야 될 줄을 알고. 장사 시작하는 사람이 이 사람말도 들어보고 저 사람말도 들어보고 요즘 어떻게 잘되나 시장조사도 하고 어떤 사업을 해야 성공하고 돈을 잘 벌까? 막~~ 골머리 썩는 저는 이런 짓 안합니다. 그냥 저는 알아요. 그냥 알아요. 정확하게 알아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이게 아니라 정확하게 알아요. 뭘 해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뭘 어떻게 결정해야 되는지. 무슨 일을 시작해야 되는지. 그 일은 어떻게 성취하는지. 그거를 그냥 알아요. 그게 사도성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이걸 어떻게 성취하고 추친 할 수 있는지 확연하게 아는 이게 사도성입니다. 주의 은혜로 그런 지혜가 임해 있는 거. 그래서 저는 제가 사도라는 걸압니다. 누가 나보고 사도라고 예언하고. 이런 게 문제가 아니고. 여러분, 진정한 사도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바뀌고, 교계가 바뀝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바뀝니다. 사도들에 대한 왜곡된 견해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도들, 진정한 선지자들이 일어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셔가지고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한국교회 안에서 주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다음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고린도전서 9장 20~21절에 보시면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서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게 신학교 때 제가 설교했던 건데요! 신학교 때 설교대회가 열렸는데. 로고스 회라고. 신학교 축제 때 설교대회를 했어요. 저는 대회. 싫어하는데. 로고스회장이 찾아왔어요. 찾아와서. 이번에 설교대회를 좀 나와 달라고. 그래서 나는 그런데 관심 없다고. 그랬더니. 로고스회장이 설교대회에 격을 높이기 위해서 좀 나와 달라고. 날 욕하는 사람은 욕해도. 날 인정하는 사람은 되게 인정했다니까요.^^ 주최 측에서 설교대회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 꼭 나와 주셔야 된다고 뭐. 그래서 설교대회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 나가야 되겠다. 그래서 제가 나가가지고 지금 기억이 나는데. 세 가지 율법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일등을 했던 사람이 누구냐 그러면 뉴 와인의 손종태 목사님. 참 좋은 목사님인데. 손종태 목사님이 일등 했어요. 그런데. 나는 격을 높여달려고 해서 나왔는데 일등을 못했어요. 나는 그런데 맞는 사람이 아니라니깐. 왜냐하면. 심사위원이 나보다 수준이 낮기 때문에 나를 못 알아봐요. 내 설교에 가치를 못 알아봐요. 실제로 설교대회가 끝나고 난 다음에 신학생들 중에 날 찾아온 사람들이 있어요. 설교대회가 평가가 잘못됐다. 사람들이 변승우 씨의 설교의 가치를 못 알아보고 있다. 어떻게 이 설교가 일등이 안 되고 이게 일등이 되느냐. 그래서 내가 설교대회의 격은 높여줬는지 몰라도 내 격은 떨어졌어요.
그때 내가 설교 했던 게 세 가지 율법입니다. 로마서 2장 14~15절에 보면 마음에 새긴 율법 있잖아요. 모세의 율법이 있다. 종의 율법. 그리고 자유의 율법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야고보서 1장에 나오죠.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9장 2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율법이 나오고. 성경에 보면 율법이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마음에 새긴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들은 마음에 새긴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 그들은 자기의 양심이 자기에게 증거가 되가지고 자기의 양심이 자기의 본성이 자기 자신에게 율법이 되는데 그 아래서 산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이것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말들도 하더라고요. 이중에 양심대로 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뭐~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는 생각 안 해요. 아무튼 이 사람들은 그걸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양심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가지고 지옥을 가는데 더 심각한 지옥을 가느냐. 아랫목에 가느냐. 윗목에 가느냐. 왜냐하면 양심 갖고 구원받을 순 없는 거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 받는 거니까. 그들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도 심판이 똑같이 간다고요. 지옥에 똑같은데 가는 게 아니고. 이런 사람들은 마음에 새긴 양심대로 얼마나 철저하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좀 덜한 지옥에 가기고 하고 더 심각한 지옥에 가기도 하고 그들이 죄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요. 이게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최초로 주어진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고 로마서 2장 14~15장에 새겨진 마음에 새긴 율법이다. 인간의 본성에 하나님의 음성이 새겨진 것이다. 돌 판에 새겨지기 전에 사람을 지을 때 그 사람의 본성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세의 율법이다. 이것은 율법이 오기 전에는 마음에 새긴 율법아래 모든 인류가 있었는데 모세의 율법이 오고 난 다음에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모세의 율법아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 모세의 율법 안에는 복음도 다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율법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제사 제도라든지. 유월절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 아래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짜 제물들의 피의 능력을 믿고 자기 죄를 자복하고 제사장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의 규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고. 당연히 심판의 기준 아닙니까? 그러니까 구약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았어요. 정말 제물의 공로를 믿고 제사를 드리고 자백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다고 그랬는데 그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잘못한 거는 자백하고 제사 드리면 되는 거고. 큰 틀은 신약시대하고 크게 다를 바 없어요. 그러니깐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모세의 율법대로 완벽하게 살아야 된다. 그게 아니죠. 제사장들이 다 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이 사람들이 천국 갈지 지옥 갈지 또 상급들이 정해지고 심판을 받았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서 자유하게 됐다. 율법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바울이 실제로 그렇게 썼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율법 없는 자인 줄 알아요.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뭐라 그랬어요? 9장 20절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아요.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는데 율법 없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자도 아니지만 율법 없는 자가 아닙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나 신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이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없는 자로 착각해요.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런데 그거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라. 왜 모세의 율법만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리스도의 율법이라는 게 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다. 율법은 바꿔 말하면 법률이다. 법은 심판의 기준이다. 그래서 모세 율법이 오기 이전에 복음 전파 되었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마음에 새긴 율법인 양심과 본성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 것처럼 모세 율법의 아래 있었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율법이 기준이 되어서 심판을 받는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심판을 받는 것처럼, 우리 신약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 단순히 신앙 고백한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이 뭐냐. 이건 나는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자유 율법이랑 이것이 같은 것이라고 보는데. 신학자들은 이거를 자꾸 복음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어떻게 율법이라고 표현해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이건 신학생 때 깨달은 것인데. 그리스도의 율법은 사랑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보다 영생이 그 속에 없는 줄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리스도의 율법은 그리스도가 준 새 계명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라. 서로 사랑해라. 밥 존스 목사님이 뭐라 그랬어요. 그 당시 죽은 사람이 98%의 사람들이 지옥 가는 것을 봤는데. 2%의 사람만 천국 가는 걸 봤는데 그 2%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입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공로를 입고 예수님을 믿고 사니까 이제 네 멋대로 살아도 된다. 그거 아니죠. 기독교는 그거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구원 받은 건 사실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므로 구원받은 건 사실입니다. 예수님 피 공로로 의롭다함 받고 하나님 자녀된 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임금이 되시면 그분의 법이 있다고요. 그분이 요구하는 법이 있어요. 하늘나라의 법이 있다고요. 하늘나라는 사랑의 나라라고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저는 새 계명,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율법 아래 있는 자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법이다. 우리의 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새 계명, 법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것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고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내게서 떠나가리라” 이게 결국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불법을 행했다고 그랬는데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사랑이 식어지므로 불법이 성하리라 그랬어요. 결국 사랑의 반대가 불법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그랬는데 오늘 성경 8장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압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그렇게 말 못해요. 결국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뭐에요. 사랑하지 않은 자들을 말한 것입니다. 은사를 받았어도, 목회를 해도, 사역을 해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해야 되는데. 영혼을 사랑해서 해야 되는데. 그게 없는 것입니다. 발람처럼 돈을 위해서 하고, 자기를 위해서 하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고, 자기 왕국을 위해서 하고. 이건 회개치 않으면 지옥가요. 이건 아닙니다. 그건 불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언사역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유사역하고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언사역하고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유사역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설교하고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설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집회를 열고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집회를 열고 이게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게 설교대회의 격을 높여달라고 해서 했던 설교 내용입니다. 신학생이 이런 설교를 했으면 당연히 1등 줘야하지 않아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설교가 얼마나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씨름한데서 나왔는지 신학박사들이 몰라요. 이건 전 세계 어느 책에도 안 나옵니다. 이건 성경이 찢어지고 겉장이 다 닳도록 읽으면서 연구하면서 내가 내린 결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걸 1등 안주고 다른 사람 주고. 그래서 내가 가끔 생각해보면 참 불의한 설교대회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알아야 되요.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벗어난 자입니다. 날과 달과 해와 절기를 지켜야 되는 우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린 기억해야 되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없는 자가 되어 버렸어요. 기독교가 율법 없는 자가 되어 버렸어요. 바울은 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다~고 그랬어요. 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다 그랬어요. 우리가 나중에 어떻게 심판을 받을까요? 밥 존스 간증에 나오는 것처럼 반드시 사랑의 기준에 의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자들은 아무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지어다.” 그랬는데 저주가 천국 가는 게 저주는 아닙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바울이 말했어요. 저주를 받을지어다.
야고보서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 된 나라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가는 나라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 아비나 아들이나 딸이나 어미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가 합당치 아니하고. 그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기본적으로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라야 되고 온전히 사랑은 못해도 적어도 주님이 자기 최고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지 다른 것이 우상이 되면 안 되고. 그렇지요? 그 다음에 천국에서 상급이 다 뭐로 결정이 되겠어요. “하나님께서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가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과 이제도 사랑으로 섬긴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사랑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동기를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중심을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일을 했느냐.
평생 목회하고 원로 목사 됐다고 천국 가서 상급이 클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짱구 같은 생각입니다. 지옥 갈 사람도 많아요. 하나님 나라의 일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동기를 달아보는 것입니다. 왜 이 일을 했느냐,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았느냐, 안젤로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볼 때는 작은 일이라도 거기에 큰 사랑이 부어졌으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위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꼭 큰 교회 세우고 죽은 자를 몇 십 명씩 살리고, 엄청난 집회를 인도해야 천국에서 큰 자가 아닙니다. 가봐야 되요. 유명한 자들 중에 천국에 못 올 자들도 있고 유명한 자들 중에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도 있고, 무명한 자들 중에 천국에서 존귀한 자들도 있고, 무명한 자들 중에 천국에서 진짜 큰 자도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결국 사랑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과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고. 사람이 천사의 말과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예언하고,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자기의 모든 소유로 구제하고 자기를 불사름에 내어주는 순교할지라도. 순교 자체만을 가지고 상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는 사람, 스데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일 줄 믿습니다. 우리는 법 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만 있고 법이 없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율법 아래 있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율법 아래 있는 자인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율법 아래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목적은 분명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 형제를 사랑하는 거. 영혼을 사랑하는 거. 이웃을 사랑하는 거. 원수와 핍박자들까지도 사랑하는 거. 그게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게 우리 사는 목적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 이 진리를 분명히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 이 얘기 오래간만에 해보는 것 같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율법 아래 있는 자이므로 사랑의 동기로서 모든 일을 하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23절부터 보시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우리는 상 받기 위해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입니다.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었다고 다 상주는 거 아닙니다. 1등, 2등, 3등만 주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우리는 달리기 경주하는 자와 같은데 상을 얻도록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그런데 여러분, 그 다음 말씀 보세요. 우리는 열심히 달음질하라니깐.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설교하고 심방하고 열심히 찬양팀하고 예언 사역팀하고 열심히 신유 사역팀하고 식당봉사하고 주차봉사하고. 이런 거 생각하는데.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이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돼요. 선수들이 승리하는 것은 운동장에서 잘 달려서 승리하는 게 아닙니다. 평소에 엄청나게 절제 한 것입니다. 먹고 싶은데 못 먹고, 가고 싶은데 못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 못 만나고, 평소에 엄청나게 절제하면서 자기와 싸우면서 훈련하고 연습하고 노력한 것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달리기는 달리는데 방향 없이 달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싸우기는 싸우는데 진짜 적이 뭔지는 몰라요. 허공을 치는 것처럼 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총회장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압니다. 향방 없이 달려요. 허공을 치는 것처럼 쳐요. 나는 목사들 중에서도 너무나 그런 사람들을 많이 압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성공한 사람이고 많은 목사들이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저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저 사람은 향방 없이 달리고 있어요. 방향을 아직 잡지 못했어요. 목표 자체가 잘못됐어요. 저 사람은 적이 누군지를 몰라요. 많은 목회자들이 헛된 목회를 하고 살다가 죽습니다. 사람 앞에는 성공한 목회자고 이름이 알려질 수는 있지만, 전혀 잘못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처럼 하면 안돼요. 거꾸로 말하면 방향. 방향을 모르고 달려가면 안돼요.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처럼 치면 안돼요. 허공에다 만날 치면 뭐해요!!
그럼. 방향이 뭐에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이게 방향입니다. 운동장에서 잘 달리는 게 방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기도하고 그냥 설교하고 그냥 심방하고 그냥 목회하고 그냥 예언사역하고 그냥 치유사역하고 그냥 집회하고 그냥 봉사하고 그냥 찬양팀하고 여러분, 이런 게 방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향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 방향을 못 잡으니깐 마태복음 7장 22~23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방향을 못 잡은 사람들입니다. 방향은 사역하고 설교하고 예언 하는 게 아닙니다. 방향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게 바른 방향입니다. 이게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역하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사역의 방향은 설교 잘하는 것, 기적을 많이 일으키는 것. 이것이 방향이 아닙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게 방향입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면 시킬수록 진짜 사역을 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통로가 되고 주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처럼. 누가 진짜 적이냐는 것입니다.
아까 내가 이인규 권사 얘기 했잖아요. 정말 사악하고 거짓이지. 그래서 내가 치를 떨다가. 그런데 진짜 적이 누군가를 알았어요.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기도하다가 진짜 적이 누군가를 알았어요. 아~ 진짜 적은 이인규가 아니구나. 진짜 적은 정바울이 아니구나. 진짜 적은 이런 사람들이 아니구나! 그럼 진짜 적은 뭔가? 진짜 적은 나구나~! 나만큼 나를 해칠 수 있는 존재가 누가 있는가?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거기서 딱 하나 빠진 게 있죠. 내가 빠졌어요. 내! 우리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지는 것은 자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이지 환난 때문에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위험이나 적신이나. 그런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나 때문에 끊어지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자체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건 진짜 제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주님을 따라야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이거 끊어지는 거 당연한 겁니다. 상식 아닙니까? 왜 버림받을 수 없다고 자꾸 웃겨요? 상식 아닙니까? 본래 신앙생활 자체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그게 안 되면 예수님 제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적이 누구냐고요. 나의 적은 변승우입니다. 나의 최고의 적은 마귀도 아닙니다. 나의 최고의 적은 변승우입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적은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모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공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적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싸우는데 허공을 치는 것처럼 싸우지 말고 적이 누군지를 바로 알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공을 치는 것처럼 싸우지 말고 그 다음에 바로 나오는 말씀이 뭐에요.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함은” 이게 진짜 선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것처럼 겉사람과 속사람과의 싸움. 이 자기와의 싸움을 싸워야 허공을 치는 것처럼 싸우는 게 아니고 적이 누군지를 파악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상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을 잘 싸운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왔을 때 자기와 싸워서 얼마나 이겼느냐 입니다. 자기를 얼마나 적으로 알고 쳐서 죽였느냐!
자아를 얼마만큼 죽였느냐! 바울의 달음박질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걸로 요약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이게 바울의 달음박질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승패가 결정 나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상 받느냐. 상 받지 못하느냐 결정 나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부터는 방향을 분명하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설교 잘하는 방향으로 달려가지 말고. 예언 잘하는 방향으로 달려가지 말고, 병 잘 고치는 방향으로 달려가지 말고. 큰 교회 세우는 방향으로도 달려가지 말고, 유명한 사역자가 되는 방향으로 달려가지 말고, 무슨 장이 되는 방향으로 달려가지 말고, 방향을 바르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거. 내 푯대가 뭐냐! 나를 죽이는 거.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뭐라 그랬어요? 자기가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계속 달려간다 하면서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위해서 달려간다고 나와 있잖아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내가 예수님께 완전히 잡히는 거. 그래서 내가 예수님께 완전히 굴복하는 거, 완전히 순복하는 거, 완전히 순종하는 거, 완전히 거룩해지는 거, 완전히 주님을 닮게 되는 거, 바울이 이것을 위해서 달려갔던 것이지 다른 걸 위해 달려갔던 게 아닙니다. 이게 방향이다 이것입니다. 내 목표가 뭐냐! 내가 목회하면서 내 목표가 뭐냐! 내가 신앙생활하면서 내 목표가 뭐냐! 여러분 그 목표는 내가 죽는 거라야 되요. 그리고 내 적이 누구냐! 나를 공격하는 이단 사냥꾼들도 아니고 나를 비난하는 종교적인 목사들도 아니고 사단도 아니고 내 적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가장 미워해야 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 그렇게 말했잖아요.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이. 목숨 미워해서 목매달고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결국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고 얼마나 해로운 것이고 얼마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진짜 사역입니다. 이게 되면서 설교를 해야 진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되면서 예언을 해야 되고 이게 되면서 병을 고쳐야 되고 이게 되면서 교회를 부흥시켜야 되고 이게 되면서 총회장 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게 진짜 경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싸움이다.
여러분, 놀이하지 말고 진짜 경주를 하시라고요.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처럼 놀이하지 말고 진짜 경주를 하라고요. 전쟁에 출전한 병사처럼 전쟁놀이하지 말고 진짜 전쟁을 하라고요. 그게 자기와의 싸우는 것입니다. 다른 경기를 통해서 다른 전쟁을 통해서 상 받는 게 아닙니다. 자기와 싸우는 진짜 경주. 여기서 이겨야 진짜 상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겨야 진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이 경기를 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영적인 올림픽 경기. 영적인 전쟁. 이 경기를 하기를 바라고 이 싸움을 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중에 이 경기를 잘하고 이 싸움을 잘 싸우고 뭐라 그랬어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는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죽였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나는 이런 경주를 달려왔다. 의의 면류관이 나를 위해서 예비 되어있다. 나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여러분이 그 모든 자안에 포함되시기 바랍니다. 이 경기를 경주하므로서 이 전쟁을 싸움으로써 여러분이 그 모든 자 안에 포함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귀한 말씀으로 우리를 축복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찬송 드리고 찬양 드리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버지, 사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 말씀들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도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는 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지만 모세의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지만 모세의 율법에서 자유하게 됐지만 법 없는 자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법 없는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 율법 아래 있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저희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저희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법을 잘 배우게 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는 또한 경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달려가야 됩니다. 설교 잘하는 게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 잘 하는 게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병 잘 고치는 게 달려가는 게 아닙니다. 사역 잘 하는 게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을 잡아야 됩니다. 방향! 나를 죽이는 것이 방향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내 자신을 죽이는 것이 돼야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거룩이 돼야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 돼야 됩니다. 이것이 방향을 바로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치지 말고 적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오~ 자비로우신 주님! 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는 미워하고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고 원수 마귀도 아니고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가장 최고의 적이요. 가장 위험한 적이요. 가장 잔인한 적이요. 가장 집요한 적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울처럼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릭 조이너 환상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의 검으로 우리의 자아의 심장을 찔러 주시옵소서. 주의 검으로 우리 자아의 심장을 찔러 주셔서 우리 자아를 죽여주시옵소서. 우리 자아를 죽여주시옵소서. 우리 자아를 죽여주시옵소서. 우리 자아를 처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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