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축사)

[스크랩] 종교의 영과 전투 - 릭조이너

하늘감동 2010. 4. 23. 21:56
    종교의 영과 전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계명이며 또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두 번째로 위대한 계명은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하는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두 계명을 지킴으로써 모든 율법은 충족되어진다. 그렇다. 우리가 이 두 계명을 지킨다면, 우리는 모든 율법을 지키게 될것이다. (마태복음 22:34~40,로마서 13:8을 보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소유물을 탐내거나 그들로 부터 무엇을 훔치지 않을 것이며,또한 그들을 살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가지의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하지말라"고 하는 부정적인 계명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대부분의 악을 극복할 것이며 그것은 또한 세상의 악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은 우리의 가장 높은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초점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향한 원수의 가장 기만적이고 치명적인 공격들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궁극적 추구로부터 우리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또한 원수의 전략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악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는 우리가 우리스스로 바라보고 있는 대상처럼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린도 후서 3:18을 보라). 우리가 계속해서 악을 바라보고 있는 한 악은 우리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가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있는 죄와 허물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안에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살피고 또한 우리자신을 시험하라고 명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3:5을 보라) 문제는 죄악이 발견된 후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의 지식나무를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생명나무를 의지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스스로 더 선해 지도록 노력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죄를 이기는 권능과 용서를 발견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원수의 기본적인 전략은 악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지식나무에 참여하도록 하고, 주님과 십자가의 영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술책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예배에 대한 위조품인 종교의 영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뉴에이지 운동과 모든 다른 신비종교가 결합된것보다 훨씬 많은 해악을 교회에 끼쳐왔을 것이다. 종교의 영의 본성 종교의 영은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권능을 배제하고, 종교적인 활동으로 그 자리를 대치하려고 추구하는 악령이다. 이 악령의 주요 목표는 "경건의 능력은 부인 했지만 경건의 모양은 유지하고 있는"(딤후3:5)교회들을 차지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는 말로 자신의 훈계를 끝맺고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 하셨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마태 16:6)이 바로 종교의 영이다. 주님은 친히 가르치셨던 공과를 예증하기 위해서 종종 비유를 사용 하셨다. 종교의 영은 마치 빵속에 있는 누룩처럼 영향력을 행사한다. 누룩은 빵의 내용물을 더해 주거나 영양적 가치를 높여 주지는 않고 오직 빵을 부풀어 커지게만 한다. 종교의 영도 이런식으로 역사한다. 그것은 교회에 생명과 권능을 더해 주지는 않고 그대신 처음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었으며 그이후에도 거의 모든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교만을 확장시키기만 한다. 사단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야고보서 4:6)는 사실을 심지어 교회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것처럼 보여진다. 사단은 교만으로 가득찬 어떤 사역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그런사역에 대적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의 전략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고, 선한 것들에 대해서도 조차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으며 또는 얼마나 많이 증거 했으며 얼마나 많이 가난한 자들을 먹였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은 만일 우리가 교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우리의 사역의 모조품을 생산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타락으로 향하게 할 수조차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단은 일단 누룩이 빵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을 제거 하기가 심히 어렵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교만은 본질적으로 교정하거나 제거하기가 가장 어려운 요새이다. 종교의 영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의향, 즉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과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게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한다. 이런 기만적인 속임수는 하나님은 우리와 똑같다고 믿는것의 결과이다. 이런 기만적인 속임수는 성경의 질책과 권고들,그리고 교정의 말씀들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믿게 한다. 만일 종교의 영이 당신의 삶에서 문제라면 당신은 지금 이미 당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얼마나 이 메시지를 읽어야 할 팔요가 있을만큼 나쁜가에 관해 벌써 생각하기 시작했을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바로 "자기 자신"이 이 메시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책을 지금 자신의 손에 들고 있게끔 해주셨다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모두가 이 메시지를 필요로 한다. 이 것은 어느 수준에서 싸우고 있는 대적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이 파멸적인 기만으로부터 자유케 되는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성령과 진리 가운데 주님을 경배할 수 없을것이다. 우리가 권능 가운데서 참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정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이 강력한 속임수로부터 벗어난 정도와 정확히 비례하게 된다. 종교의 영에 대한 교회의 대결양상은 마지막 시대의 웅장한 전투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이 전투에서 싸우게 될것이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것이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종교의 영으로 부터 우리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어둠으로 부터 구해내는 권위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 가공할 만한 원수로 부터 진지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빛을 비추어 주시도록 요청해야 하며, 이 빛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시도록 요청해야 한다. 처음부터 교회의 가장 맹렬한 싸움은 이 영과의 싸움이었는데 주님께서 끊임없이 바리새인들과 직면함으로써 예증되었던 그대로이다. 바리새인들의 근본적인 성품이 자신들의 잘못에는 눈이 멀어있는동안 다른사람들의 잘못에 자신들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종교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게 하려고 시도한다. 커다란 미혹 종교위 영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만적인 성품들 중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열정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열정은 악한것알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있는데 결정적인 것은 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정적인가 하는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 형제들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것이 이니라"(롬10:2) 땅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바리새인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금식하고, 더 많이 성경을 읽고, 또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더 큰 소망을 품었으며, 하나님의 것들에 대한 더 큰 열정을 가졌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큰 하나님의 대적자들이었으며 메시야가 오셨을 때 메시야의 가장 큰 대적자들이었다. 다소성 출신의 젊은 사울은 회심하기전,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을 위한 열정에 의해 움직였다. 미지근함에 사로잡혀 열정이 사라져 버린 오늘날 교회에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특성들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시록3:19)고 명하셨는데 참으로 열정적인 사람들은 가장 멈추게 하기 어려운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에 대한 원수의 전략은 그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멀리 가도록 하는것이다. 원수가 사용하는 전략의 첫단계는 그들 자신의 열정가운데 영광에 이르게 하는것이다. 가지고 있는 은사나 성품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관계없이 만일 원수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대한 자만심을 가지게 할수 있다면 원수는 우리를 자신의 올가미 안에 걸려들게 할 것이며 그 은사를 악을위해 사용하게 할것이다. 주님께서 이땅을 걸으셨던 동안 악령들과는 어떤문제도 없으셨는데 왜냐하면 악령들은 재빨리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주님께 자비를 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열성적인 종교집단은 즉시 그분의 가장 큰 대적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열정적이고 열심이던 바로 그 사람들이 말씀이신 그분이 자신들 가운데 걸어다니시기위해 오셨을 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동일한 사실이 진리이다. 모든 신비종교들과 거짓종교들을 다 더하여도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역사에 끼친 손상은 종교위 영에 의한 저항 또는 침투로 말미암은 손상보다 적다. 신비종교와 거짓 종교들은 쉽게 분별 되지만 종교의 영은 오늘날까지 아마도 거의 모든 부흥운동 또는 다른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방해 하거나 또는 그 방향을 왜곡시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교회를 통하여 영예로운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것인데(살후 2:4) 이것이 바로 종교의 영이 출현이다. 더 이상 손으로 만든것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건물에 관해 언급하는것이 아니다. 이 죄의 사람은 교회안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그가 이렇게 하도록 허용하는 교회에 있게 될것이다. 두개의 토대들 원수의 요새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종교의 영은 두개의 기본적인 토대들위에 자신의 사역을 건설하는데, 그 두개의 토대란 바로 두려움과 교만이다. 종교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하나님의 승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오는 것임을 알게 하는 대신에 그분의 승인을 얻기위해 주님을 섬기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므로 종교의 영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토대를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위에 놓기보다 개인적인 훈련위에 놓는다. 이러한 훈련이나 노력을 행하는 동기는 드려움이나 교만일 수 있으며 또한 이 두가지의 결합일 수도 있다. 두려움과 교만은 타락으로부터 말미암은 두 가지의 기본적인 결과인데 그것들로 부터 자유케 되는 데는 대개 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주님께서 심지어 이세벨에게도 "회개 할 시간"(계시록 2:20-21을 보라)을 주셨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아합왕의 아내인 이세벨은 매우 종교적인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거짓 종교에 깊이 헌신되어 잇었다.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신 이유는 이 영의 뿌리가 매우 깊이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회개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시간이 요구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주님께서 이세벨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긴 했지만 그분은 두아디라 교회가 그녀를 용납한 것에 대해 책망 하셨다.(계시록2:20) 우리는 종교의 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인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가운데 그들의 사역을 용인해서는 안된다. 만약 우리가 이 영을 신속하게 대적하지 않으면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공격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우리의 사역과 우리의 가정과 삶속에 가져 올 것이다. 죄책감의 기초 사무엘을 키웠던 엘리 제사장은 죄책가에 기초한 종교의 영안에서 사역한 사람으로서 성경에 나오는 한 예이다. 엘리는 주님을 향한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그만 의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대 제사장으로서 그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사무엘에게 주어졌던 첫번째 예언의 말씀은 성경에 나타난 가장 무서운 질책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것은 바로 엘리에 대한 예언이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 집에 대하여 맹세 하기를 엘리집의 죄악을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사무엘상3:14~14) 주님을 위한 엘리의 열정은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무책임을 보상해 줄 것으로 여겼던 희생들과 제물들위에 기초해 있었다. 죄책감은 우리를 자극하여 주님을 위한 엄청난 열심으로 우리를 몰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희생들과 제물들을 사용해서 우리의 실패를 보상 받으려고 시도하는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대한 중대하고도 심각한 모독 행위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죄책감을 말소해 줄 수 있다. 그러한 열심은 설령 우리가 영원히 희생을 드릴지라도 결코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엘리의 죄가 결코 용서받을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데 그분은 단지 희생과 제물로 자신의 죄를 보상하려는 엘리의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만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이세상에는 주님을 위한 열정이 자신의 삶의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죄나 실패 또는 무책임을 보상하기 위한 시도에 기초를 두고있는 수없이 많은 남자와 여지들이 있다. 그러나 이세상에 있는 모든 희생을 다 함할 지라도 우리가 범한 가장 조그마한 실패조차도 결코 보상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런 시도를 하는 것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모욕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유일하게 죄를 위해 아버지께 받아들여지는 희생이다. 우리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승인을 얻기위한 시도들은 종교의 영에게 문을 넓게 열어주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런예배는 예수님의 보혈에 기초해 있지않고 죄에대해 우리스스로 보상하려는 시도위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동기가 항상 주님의 기쁨을 위해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는것 이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위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는 하나님 중심적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중심적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시도는 가장 파괴적인 종류의 자기 중심성이다. 또한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엘리의 아들들의 죄악들 가운데 한 가지는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다"(삼상1:17) 는 사실이다. 그들은 주님께 가져온 희생들과 제물들을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착복했다. 이런 형태로 종교의 영에 속박된 사람들은 종종 가장 열렬하게 십자가를 전파할 것이지만 이것은 십자가를 남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그들 자신의 십자가를 더욱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다 자신들의 굴욕감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하나님앞에 의롭게 하여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한다. - 릭조이너 목사님의 마지막날들에 전개될 웅장한 영적전쟁들중에서 -
    출처 : 그리스도의 몸인 형제사랑의집
    글쓴이 : 형제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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