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 정체성을 지킬 것인가? 장로교가 될 것인가?
웨슬리언-알미니언주의 VS 칼빈주의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H 교수의 `큰 믿음교회 변 목사에 대한 보고'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측 이단대책위원회가 변 목사에 대한 첫 번째 지적 사항으로 “그는 칼뱅주의자가 아니라 알미니언주의자임을 명확히 하였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웨슬리언-알미니언주의 계통인 성결교단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 최명식 목사)는 지난 3월 4일, 변 목사의 이단성에 대한 전문위원 연구결과를 받아들여 잠정적으로 ‘일단 연구를 종결’키로 결의했다. 이날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전문위원은 “이단적이지 않다”라면서 “이상하게 튀는 발언만 자제하면 문제없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다시 이를 번복하여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는 5인 연구위원회를 꾸렸고 급기야 지난 6월 16일, 변 모 목사에게 질의서를 발송하면서 6월 말까지 답변을 회신해 달라고 요구 했다. 이에 대해 많은 성결 가족이 전문위원인 H교수(서울신대)의 연구 결과 공개를 요구해와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전문을 공개한다. <편집자 주>
변 목사, 칼빈주의 교리인 ‘선택’,‘절대예정’ 의문시해
예장 백석측, 웨슬리언-알미니언주의적 신앙 이단시
상황: 큰 믿음교회와 연관된 다양한 고발들이 장로교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단을 전문으로 파악하고 그 행태를 밝히는 기관으로 알려진 현대종교에서도 그 문제점이 있다며 정죄하기 시작하였다. 그 교회의 상황을 파헤치고 일부에서는 이단으로 정죄하는 까페까지 생기는 등 논란이 지속되었다.
1) 신학적 차원에서의 논란거리들
변 목사의 설교가운데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주로 장로교회의 선택교리와 관계가 되어 있다. 절대예정을 칼뱅이 주장하면서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을 강조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변목사가 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칼뱅의 원 의도는 눈에 보이는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하고 있던(고해성사를 통하여) 가톨릭교회의 구원론에 비하여 내적으로만 자신의 구원을 확인해야 할 성도들이 끊임없이 불안해 하는 것에서부터 그들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최후의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칼뱅의 의도는 변목사가 보기에는 거짓된 믿음, 지적인 수준에서 머무르는 믿음, 온전한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지 못한 믿음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성도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잘못된 신학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점은 일정부분 웨슬리가 칼뱅의 교리를 비판하는 것과 일치한다. 즉 신학적 원의도와는 달리 그것이 교회의 praxis에서는 잘못된 확신을 줌으로써 신앙의 내적 역동성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원치않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가장 철저한 신학적 고백인 것이다.)
우리는 위와 연관된 주장들을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변승우 저)”에서 찾을 수 있다.
① 신자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
② 그렇기에 믿음만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2장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이다. 믿음에다가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변 목사는 이 회개를 청교도적으로 이해하여 회개가 바로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57) 바로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는 대목이다.
③ 믿음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지식으로 믿는 믿음이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만 구주로만 받아들이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기에 결국 죄에 지게되고 죄에 지게되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진실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믿는 믿음은 자신의 믿음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되고 그것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된다고 말한다.(3장 금보다 귀한 믿음) 그러니까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역사하시도록 하는 믿음이라고 강조한다(71). 이런 믿음을 스스로 검토할 수 있는데 확신이 필요하고, 행함이 필요하고, 사랑과 겸손이 그 표적이라고 말한다.
④ 믿음으로 얻는 칭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화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4장 믿음과 순종) 거룩함이 없이는 칭의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죄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중생이 없이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⑤ 중생을 보다 더 완벽하게 충실하게 이해할 때 그것은 “새로운 창조”이다라고 주장하고 중생을 통하여 성결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고 주장. 중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첫 번째이지만 그 중생을 기다리며 적극적으로 이를 따르려는 신앙적 자8수 필요하다는 것
⑥ 중생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변화이다. 변목사는 “ 종교개혁이후 믿음이 강조되었지만 회개가 소외되었고 칭의가 강조된 반면 중생이 소외되었다고 주장(163)한다. 거듭남이란 모든 죄에서부터 벗어나는 회개를 강조하는 것이다. 중생이 칭의보다 더 앞선다는 것이다.(171) 그러므로 이 중생이 없는 칭의를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고 비 성서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실제적인 내용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 이후의 모든 죄들이 저절로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중생못하면 지옥간다고 강조!
⑦ 부끄러운 구원(믿음이 있지만 행위가 완전치 못해서 받은 구원)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믿음만으로 자기의 육신을 이기는 자가 구원을 얻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위와 같은 그의 주장은 구원관이라는 다른 설교를 통해서 볼 때 대략 이해할 수 있게된다. 변 목사는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과거(이미 구원받음)-현재(이루어야 할 것)-미래(기다림)의 통전적 구조에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구원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이 이미 얻은 구원만을 회상하면서 거기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성령의 충만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웨슬리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설교에는 가장 많이 청교도주의자들의 글과 웨슬리와 같은 성결을 강조하는 이들의 글이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변 목사의 글에는 한 쪽으로만 치우치는 듯한 과제가 나타나는가? 역설적으로 변목사의 이러한 논증이 심하게 부딪히는 이유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그의 확신 때문이다. 즉,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결국은 잘못된 신앙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믿음을 역사하는 믿음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어디에서는 단지 신뢰와 지적 동의를 의미할 때도 있는 것처럼 구원이라는 사실 역시 매우 더 넓게 인정하고 이해된다. 아픈자를 고쳐주는 것이 구원이고,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 구원이고, 또한 어려움으로부터, 곤란한 지경에서 벗어남을 받는 것도 구원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성서는 역사의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그 민족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라고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변 목사의 열정을 좀 더 폭넓은 방식으로 교정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즉 구원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천국을 들어가는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초대교회의 결정적인 확신이 우리에게 빛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우리 교단이 그의 참된 회개의 운동을 그리스도의 완전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2) 신비주의적 경향들
변 목사는 자주 그의 집회에서 신비현상들을 강조하는 그런 수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몇가지 면에서 무리가 되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봐서 그의 가르침은 몇몇 사람들의 경험을 보편화시키려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몇가지 경우를 지목한다면 다음과 같다.
① 꿈이 말씀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지적한다는 것은 분명히 오류!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말씀 말씀하며 말씀만이 중요하고 꿈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합니다...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1) 꿈은 예언의 유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 꿈은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실수를 막아줍니다.
(3) 때로는 꿈과 꿈에 대한 반응에 우리의 생사가 달려 있습니다.(31)
② 변목사가 위험해 보이는 이유는 그가 아무나에게 특별한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만의 이상한 이야기를 성경의 이야기처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
“일예로 선지자 릭 조이너가 어느날 중요한 영적 꿈을 꾸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는” ...(46); ....전에 외국의 어떤 유명한 선지자가... “(47) ;
꿈을 나누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아니면 인간들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구분하기 위한 조건으로 그는 신명기 13장 1-5절 중, 특별히 ... (1) 뭔가 다른 증조가 있습니다 .. (2) 쉽게 사라지지 않고 마음에 계속 여운이 남습니다.
③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변 목사에게는 그것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지나칠 만큼 강하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설교와 생각에 일상적인 신비주의 요소가 완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방언으로 하는 기도보다 더 영적인 기도와 참되고 잘 된 기도는 없을 것이라는 과장이 생기는 것이다.
“ 우리의 영은 구원받았으나 우리의 혼과 육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방언은 혼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이 순결합니다. 어떤 목사도 그리고 아무리 대표기도를 잘하는 장로님도 방언으로 하는 기도보다 기도를 더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정욕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88-89)
④ 또 하나 변목사의 글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성경보다도 사람들이 체험한 신비체험을 더 의존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위의 구절에서 안식과 상쾌함이 어디에서 옵니까? 방언입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케네스해킨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때로 의사들은 치료를 위해 안식하기를 권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최고로 안식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방언기도를 염두에 두고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예언
예언에는 크게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언의 영입니다. 계19:19 “...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 다른 예언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32)
둘째로 예언의 은사입니다.
고전 12:10 예언의 은사는 간헐적인 것이 아니고 그 사람안에 거주합니다.
그래서 항상 예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주 빈번하게 예언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로 선지자의 직임입니다.
고전 12:28 ...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저도 선지자의 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강사 목사님이 “여기 모인 모든 목사님들에게 예수님의 겉옷이 내려와 입혀지는 것이 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적 현상들이 동반되었습니다...우리교회에 와서도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예언을 중첩해서 받을 것을 권면하는 것은 낯설은 것이다(160). “ 예언은 마치 구약성경에 두루 퍼져있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처럼 하나하나가 모여져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모자이크와도 같습니다....그러므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예언을 받으십시오.”(160)
3) 개인적인 부적절한 지적과 언사들
변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지나치리만큼 다른 생각을 하는 분들을 심각하게 비난하고 있다.그의 비판이 교단과 중요한 인물들 모두에게 적용되고 자주 교회 전반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있으며 이는 그가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변승우 목사입니다. 기성 이대위의 위촉을 받은 H 교수님이 저의 책과 설교에 대하여 연구를 하고 사실 그대로 이단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주신 것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단성이 없어도 이단성이 없다고 인정받는 것이 한국 교회 안에서 얼마나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한 일인지를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그런데 제가 교수님의 글을 읽어보니 저의 글에 대하여 오해하신 부분들이 제법 눈에 띕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이렇게 신문에서 기사로 나와서 다른 분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약간의 부연 설명을 드릴 필요를 느꼈습니다.
H. 교수님이 연구 발표한 내용 중 구원론에 관한 부분 역시 저의 주장을 제대로 간파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 이대위에 제출한 답변서에 충분히 답변했다고 생각되므로 다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답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다만 "2) '신비주의적 경향들'에 나오는 보고들이 제 글과 의도를 오해한 것들로 도배가 되어 있어서, 그것들에 대해서만 간명하게 해명하고자 합니다.
① 꿈이 말씀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지적한다는 것은 분명히 오류!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말씀 말씀하며 말씀만이 중요하고 꿈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합니다...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이 부분은 제 글의 의도를 오해한 보고입니다. 인용하신 제 글의 의미는 꿈이 말씀만큼 중요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말씀 말씀 하면서 꿈이나 환상이나 예언 같은 신경 쓰지 말라고 설교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 은사 중단론에 빠져 혹은 종교적이 되어 꿈과 환상과 예언을 터부시 하는 현상이 심각한 수준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 지적하는 글이지 꿈이 말씀과 같이 중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왜곡입니다.
② 변목사가 위험해 보이는 이유는 그가 아무나에게 특별한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만의 이상한 이야기를 성경의 이야기처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보고 역시 옳지 않습니다. 제가 인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국제적인 성령사역자들 중에서도 매우 탁월한 분들로 그분들의 인격과 열매과 사역의 결과로 인해 검증 된 분들입니다. 성경에서 요엘은 분명히 신약시대에 꿈과 환상과 예언이 부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욜 2:28). 따라서 무조건 믿는 것도 아니고 성경과 열매과 인격을 보고 철저하게 분별하여 그 중 옳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며 당연한 것입니다. 저는 밥 존스 목사님을 포함하여 상대가 누구든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으로 분별하고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즉 누구의 계시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기 때문에 믿고 그것들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제 책과 설교에 그런 계시적인 것을 인용하는 것이 많이 있으면서도 성경을 벗어나는 이상한 주장이 1건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③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변 목사에게는 그것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지나칠 만큼 강하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설교와 생각에 일상적인 신비주의 요소가 완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방언으로 하는 기도보다 더 영적인 기도와 참되고 잘 된 기도는 없을 것이라는 과장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구원받았으나 우리의 혼과 육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방언은 혼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이 순결합니다. 어떤 목사도 그리고 아무리 대표기도를 잘하는 장로님도 방언으로 하는 기도보다 기도를 더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정욕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88-89)
이 보고 역시 바르지 않습니다. 제가 방언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수님이 제 글을 과장하셨네요.
이것은 무조건 방언기도가 다른 모든 기도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방언이 우리의 이성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지적한대로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방언은 우리의 영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성으로 드리는 기도와 달리 하나님의 뜻에 대한 혼동이나 정욕으로 부터 자유한 기도입니다. 저는 방언 기도의 그런 장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꼭 방언기도가 아니라도 때로는 방언기도 보다 더 깊고 효과적인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누구나처럼 저 역시 자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의 글을 이렇게 곡해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④ 또 하나 변목사의 글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성경보다도 사람들이 체험한 신비체험을 더 의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완전히 사실무근입니다. 저는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하고 성경적이기 때문에 어떤 체험을 예화로 사용할 뿐이지, 어떤 개인의 계시나 체험에서 교리를 끌어내는 법이 없습니다.
교리는 성경에 근거해야지 계시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기본에 속하는 것이며 저의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네 귀 달린 보자기 환상과 천사가 나타난 고넬료의 집 방문에 나타나듯이 하나님이 계시를 사용하여 우리가 잘못알고 있었던 성경에 대한 해석이나 종교적인 생각들을 바로잡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단순히 어떤 계시가 근거가 되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계시가 성경적인 것이라는 것이 성경구절을 통해 명백하게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경우에만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그저 주관적인 독백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제가 진짜로 성경보다 사람들이 체험한 신비체험을 더 의존했다면 저와 저희 교회는 벌써 잘못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계시가 성경적인 것은 아니며 비성경적인 황당한 응답을 받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제가 진짜로 성경보다 사람들이 체험한 신비체험을 더 의존했다면 제 책의 추천서를 써주신 은인인 토마스 주남 여사님과 갈라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입신 간증들을 모은 저의 책 "하늘나라에서 온 이메일"을 스스로 절판시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계시나 체험으로 성경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모든 계시를 분별하고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절대진리이고 다른 모든 개인의 체험과 계시들은 불완전한 것으로 성경으로 분별해야만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글은 저와 무관할 뿐 아니라 참으로 무책임하고 어이 없는 글입니다.
변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지나치리만큼 다른 생각을 하는 분들을 심각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의 비판이 교단과 중요한 인물들 모두에게 적용되고 자주 교회 전반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있으며 이는 그가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말씀(특히 구원론과 견인의 교리)을 옳게 분별하여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다는 아니지만 많은 영혼들이 위험에 빠집니다. 그리고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저의 언사가 지나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자주 성도님들 앞에서 말했듯이 예언이 부분적인 것이듯 저의 말 역시 한국 교회의 어떤 부분, 목회자들의 어떤 부분, 특정인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하는 말들입니다. 부분이지 전체에 대한 지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잘 듣고 오해하지 말라는 말을 저는 성도들에게 자주 해왔습니다. 그 점을 간과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지적이 제가 귀담아 들어야 할 권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말 실수를 할 때도 있었고 오해를 살만한 발언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적을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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