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감 (교제)과 임재 그리고 동행

[스크랩] 경외함 그리고 친밀함

하늘감동 2011. 3. 5. 10:33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시25:14)] 


경외함이 없는 곳에는 친밀함도 없습니다. 


한때 친밀했다 하더라도, 경외함이 사라지면 이전의 친밀함은 변질됩니다. 


그것은 더이상 친밀함이 아니라,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친한 척하는 것입니다. 


실력자와 가졌던 과거의 친분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경외함의 반대는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입니다 (잠 28:14).


또한 경외함의 반대는 방자함입니다 (잠 14: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잠14:16);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을 피하나 어리석은 자는 조심없이 함부로 행동한다 (현대인의 성경).] 


이처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스스로 악을 피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마음이 완악해지고 방자해집니다.


교만하여져서 조심없이 함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점검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버젼은 잠언 14:16을 "The fool is confident (확신이 있는)"라고 표현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근거없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에게서 경외함을 인정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일찌기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비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가고, 


환상도 보고, 계시도 받고, 천사도 자주 만납니다.


주님과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심지어는 밤하늘의 별을 함께 바라보며 데이트도 합니다.


전쟁도 이기고, 살렘왕 멜기세덱의 안수기도와 축복도 받습니다. 


대단한 체험의 사람입니다.


그는 또한 대단한 믿음으로 오랫동안 인내한 끝에, 


100세가 되어서야 언약의 자식인 이삭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가 경외함을 주님에게서 직접 인정받은 것은 


그보다도 한참 후의 일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2)]



하나님은 물론 아브라함의 중심에 있는 경외함을 이미 보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경외함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을 통해 


실제로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수준으로 온 세상에 보여진 것은


그가 주님과 동행하기 시작한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떠난 삼일간의 여행... 


그리고 그가 겪었을 고뇌와 찢어지는 심장...


마침내 그가 믿음으로 칼을 들어 이삭의 가슴을 겨눈 그 순간


그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고뇌와 찢어지는 가슴을


아브라함이 자신의 삶을 통해 온전히 표현해낸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어쩌면 그 순간까지


한걸음씩 한걸음씩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를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그토록 오랫동안 아브라함을 참고 기다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친구가 됩니다. (약2:23, 사41:8)



이제 막 주님과의 동행을 시작한 병아리 신자인 저는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배우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를 먼저 배우기 원합니다. 


그것을 제대로 배우기를 원합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 (계19:16) 앞에서 


경외함을 가지고서 나의 자리를 정확히 지키기 원합니다.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 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 (에 5:2)] 


에스더는 왕을 만나기 위해 삼일간 금식하고 왕후의 예복을 차려입고 


왕의 앞에 나아갑니다.


그는 왕비이지만


왕의 보좌 옆자리로 바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에 섭니다.

 

왕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과 정결을 가지고 자기의 자리에 섭니다. 


왕의 긍휼과 인자를 기다리면서, 왕이 옆자리로 불러주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아무때나, 제멋대로, 내 마음 내키는대로


주님 옆자리로 나아가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담대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만과 방자함, 그리고 무모함입니다.



우리가 겸손정결함을 가지고


왕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상한 심령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섰을 때


그때 자비로우신 왕께서 인자긍휼을 베푸사 홀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경외하는 자에게는


인자(시 103:17)와 긍휼(시103:13)을 베푸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신 만왕의 왕께서 


주님의 정하신 합당한 기한에 맞추어


사랑스러운 신부를 당신의 품으로 


사랑스러운 왕비를 보좌 옆으로 


친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왕의 은총(favor)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나에게 머무는 순간을


고요하고 평온한 심령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본자세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우리의 베스트를 다한 경외함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이르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시119:3)]


주님은 경외하는 자들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을 


당신의 친구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시25:14)]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큰믿음 큰사랑 in NY
글쓴이 : Dump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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