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온유의 멍에-에이든 토저

하늘감동 2012. 10. 31. 11:00

온유의 멍에

- 에이든 토저

 

인생이 지고 가는 멍에는 무겁고 애닮다.

예수께서 말씀한 인생의 멍에는
마침내 기진하여 쓰러질 때까지 지고 가는 짐이다.

쉼이란 이 멍에를 벗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무엇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행하기를 멈춤으로서 벗게 된다.
예수의 온유가 곧 쉼이다.

우리의 멍에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심적 원인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내심에서 발하여 우리의 영과 육을 쏘는 것이다.

첫째의 멍에는 교만이다.

자기 중심이라는 짐이야말로 참으로 무거운 것이다.
그대 자신을 고요히 반성해 보라.

그러면 그대의 번민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그대를 과소 평가했다는 데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자아라는 우상을 우리 마음에 모셔 두는 한 그 우상을
모욕하기를 좋아하는 대적은 항상 우리 앞에 있다.

따라서 심령의 평안이란 바랄 수 없게 된다.
사소한 비평에도 흔들리기 쉬운 마음을 애써 제어하는 노력과,
친구와 대적들의 비방에 일일이 마음을 써가며 대비책을 세우는 것은
곤욕 중에도 큰 곤욕이다.

이런 마음의 암투(暗鬪)는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며,
그것은 점점 더 격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의 아들들은 이 멍에를 끈기있게 메고 나간다.
그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한마디 한마디에 반항하며,

사소한 비평마다 애간장을 태우며 머리를 쥐어뜯고,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잠을 못잔다.

이런 멍에는 메고 갈 필요가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이 멍에를 벗는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 방법은 곧 온유한 심령을 가지는 일이다.

온유한 사람은 누가 나보다 크냐 적으냐를 관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의 평가라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안정된 마음으로 미소를 흘리며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줄을 안다.

"오오, 자네가 무시를 당했단 말이지?
그래, 그들이 자네는 보잘 것 없는 자식이라고 수군거렸단 말인가?
허허, 그래서 자네 자신이 바로 어제 자네에 관해서 한 말을
오늘은 세상이 했다고 해서 심사가 불안하단 말이지?

그런데 자네는 바로 어제 하나님 앞에서

나는 먼지 속에 기어 다니는 벌레보다도 못한 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도 자네는 신실성이 빈약한 사람인가?
자, 겸손하세, 남의 말을 근심할 것이 무엇인가?"

온유한 사람이란 비굴한 열등감에 눌려서 남의 말을 듣고
일희일우(一喜一憂)하는 졸장부가 아니고,

사자와 같이 대담하게
삼손과 같이 힘차게 자신의 도덕적 긍지를 지켜 나가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해 줄 이는 하나님뿐임을 믿고 있으며,
자신의 교만이나 남의 평론에 의해서 경거망동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그는 자신이 극히 미약한 존재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눈에는 천사보다도 귀중한 자신임을 그는 믿는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보시듯이 세상은 자기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평가를 개의치 않는다.

자기의 진가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는 완전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마침내 만물이 각기 그 정가표를 붙이는 날이 오는 것을 그는 믿고,
초조해하지 않고 그 날을 기다린다.

그 날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그 날을 그는 흔연히 기다린다.

동시에 그는 영혼의 안식처를 구하게 된다.
온유한 걸음을 걷는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시도록 기꺼이 몸을 내어 맡긴다.
자신이 자신을 지키려던 옛 노력은 끝났다.
그러므로 그는 온유가 주는 평화를 찾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허식의 멍에를 벗을 수 있다. 허식은 위선과는 좀 다르다.
허식이란 내 내적 빈곤을 감추기 위해서 나의 제일 좋은 면만을 내세우려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말한다.

죄가 인간의 심리를 기형화한 여러 가지 부자연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간은 수치에 대하여 그릇된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남의 앞에서 소위 체면이란 것을 꾸미지 않고 자기 그대로를 나타내는
남녀를 만나 보기란 어렵다.

오늘 세상에는 자기의 정체가 폭로되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심장을 조리고 사는 사람이 허다하다.

소위 품위가 있다는 사람은 어느 때이건 자기보다 더
높은 품위의 인물을 만날 일이 두려워서 전전긍긍하며,
유식한 사람은 나보다 더 유식한 사람을 대하게 되는 은밀한 불안을 늘 면치 못한다.

부자는 어느 날이건 자기의 옷차림, 자동차, 주택이
다른 어떤 부자의 그것에 비해서 빈약하게 보일 일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식은 땀을 흘리곤 한다.

또 낮은 계급은 낮은 계급대로 역시 같은 허식의 집단들을 이루고 있다.

사소한 일이라고 해서 이를 일소하지 말라. 이 멍에는 심각한 것이며,
이 부자연한 생활 방식은 점진적으로 희생물의 목을 졸라 들어가는 괴물인 것이다.

오늘의 심리학이란 이와같은 인간의 변태심리를 기준하여 꾸며졌기 때문에
거기서는 진정한 온유라는 것은 꿈과 같은 비현실적이며
하늘의 별같이 머나먼 것으로 무시되고 있다.

이 생명을 잠식하는 악성의 질병에 신음하는 모든 인간을 향하여 예수는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마 18:2∼5).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비교하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의 가진 것을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려 하지 않고,

가진 그것에서 직접 기쁨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키가 자람에 따라서 죄가 그들의 심성을 휘저어 놓는 결과로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과 시기심이 눈을 뜨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다른 아이가 나보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가졌을 때에는
벌써 전과 같이 내가 가진 것에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이 얄궂은 멍에는
인간의 영혼을 내리누르기 시작하며, 예수께서 그것을 벗겨 주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벗지를 못한다.

또 하나의 멍에는 기교를 부리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건 뜻하지 않은 사이에 내 속마음을

친구들이나 원수들이 들여다 봄으로써 자기의 내적 공허가 폭로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한 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소위 말재주가 있다는 사람들은 혹 어쩌다가 실수를 해서
평범하거나 어리석은 말을 할까 두려워서 수시로 긴장해 있다.

견문이 넓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혹시 다니다가
자기가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본 일이 있는
쎵마르코폴로를 만날까 해서 두려워 한다.

이 모든 부자연한 현상들은 우리가 물려 받은 죄로 인한 슬픈 부산물들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의 전체 생활면에 이것은 너무나도 깊이 뿌리를 뻗고 있다.

"광고술"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인간의 이 가장하는 성향을 응용한 것이다.
나 이외의 것으로 보이려는 인간의 이 욕망에 영합(迎合)하여
무수한 책, 화장품, 의류가 팔리고 있다.

이 가장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온유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만
우리의 어깨에서 벗어져 떨어지는 저주받을 멍에다.

일단 이 멍에를 예수 앞에 풀어놓은 후 부터는,

우리 심령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를 추구하려는 생각이,

전에 사람의 눈, 귀를 두려워하던
모든 생각을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가 내 전체가 되고, "어떻게 나타날 나"는
우리의 관심권내에서 멀리 사라지고 만다.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아무 것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우리가 가장을 하려는 심성은 오직 허세를 부려보려는 악한 욕망에서 오는 것이다.

이 교만과 허식의 멍에 밑에서 이 세계는 바야흐로 쓰러져 가고 있다.
이 위경을 면하는 길이란 예수의 온유로 돌아오는 길 외에는 없다.

엄격한 도덕 생활이 극히 적은 효과를 줄 수는 있으나,
그러나 이 죄악은 비상하게 뿌리깊기 때문에 한 쪽 모를 누르면
다른 모가 튀어 나오고 만다.

예수께서는 모든 인간을 향해 부르신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가 계시하시는 평안은 온유의 평안이며,
또 그 평안은 우리의 가식을 그치고, 솔직히 나 자신을 받아들일 때에
얻어지는 즐거운 해방인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약간의 희생을 요하는 듯 하지만,
그러나 이 멍에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몸소 같이 메어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충족한 은혜 속에 묻히게 된다.
예수는 이 멍에를 우리와 어깨를 가지런히 하여 이것을 메고 가신다.

주님, 저를 어린 아이와 같게 하소서. 지위, 권력, 명예,
이익을 얻으려는 고통에서 저를 건지소서.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꾸밈없기 원합니다.
허영과 가식을 버리게 하소서.

자아 중심적인 저를 용납하고 도우사
육신을 부인하게 하시고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참 평안을 얻게 하옵소서.

주께서 이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를 원하여, 주 앞에 겸손히 엎드리나이다.
그것을 짊어짐으로써만 제가 평안을 찾을 수 있는

온유의 멍에,
주님의 "쉬운 멍에"를 제게 지워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