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찾기

[스크랩] 순교자 손양원 목사 장녀 손동희 권사..."오빠 죽인 원수를 오빠로"

하늘감동 2013. 12. 25. 23:07




▲ 손양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77). 뉴스파워 최창민

“한 시대 역사의 진상은 어지러운 그 시대에는 잘 모른다. 많은 시간이 지난 이후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77)는 24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출범기자회견에 참석해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는다고 했을 때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손동희 권사는 광복 후 1948년 10월 21일 당시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손 권사는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오빠 둘을 잃었다. “19일에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났고 사흘 후인 21일 손동인(당시 25세, 순천사범학교 4학년), 손동신(당시 19세, 순천중학교 2학년) 두 오빠가 좌익세력에 의해 끌려가 순천경찰서 뒤뜰에서 총살로 순교를 당했다. 큰 오빠가 그때 기독학생회 회장이어서 표적이 된 것”이라며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여순반란은 딱 1주일 만에 끝났다. 1주일 동안 전남보건후생협이 밝힌 사망자 수만 3천5백여 명이었고 행방불명된 사람도 5백여 명이었다.”고 설명한 손 권사는 오빠의 순교 이후 심리적 공황 증상을 보였다고 고백했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배도 골아보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두 오빠의 죽음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며 “앉은 상태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것 같아서 일어 설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손 권사는 “두 오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두 오빠를 죽인 범인이 잡혀 사형 집행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죽인 놈을 잡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토로하고 “그때 아버지(손양원 목사) 생각은 내 생각과 전혀 달랐다. 범인 강철민(가명)을 양자로 삼겠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손 권사는 이어 “나는 설마 했다. 그런데 실제로 시행에 옮기려고 하셨고 나는 펄펄 뛰며 크게 반발했다. 그런 놈은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나를 설득시키려고 했다.”고 회상했다.

손 권사는 아버지가 “하나님의 십계명 제일, 제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서 고생을 했다. 강철민 그 학생을 안 잡았으면 모르지만 잡혔다니 이대로 모른 척 할 수는 없구나.”라며 “일, 이 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도 하나님의 명령이다. 두 계명은 지키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안 지키면 얼마나 모순이냐. 너희들도 나도 감옥에서 헛고생만 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당시 나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강철민이 없어져야 내 한이 풀릴 것 만 같았다. 나는 그때 이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며 “나를 펄펄 뛰면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 용서하면 용서했지 아들 삼는 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나에게는 오빠가 되는 것인데, 내 오빠를 죽인 원수가 어떻게 오빠가 되겠습니까. 이렇게 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라고 항변했다.”고 말했다.

이에 손양원 목사는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용서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했고 결국 그를 양자로 삼았다고 말했다.

손 동희 권사는 “손양원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볼 때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셨다. 농사꾼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돈을 벌어 야간학교를 다녔다. 결혼 후에는 나환자들과 일생을 같이하다.”며 “39세 때 신사참배 거부로 일본 경찰에 끌려간 후 다섯 번 감옥 신세를 지고 광복 후에 나왔다. 이후 1950년 9월 28일 48세 나이에 후퇴하는 공산당에 의해 총살 순교를 당했다.”고 말했다.

손 권사는 “두 오빠 죽음 이후 하나님을 거부했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왜 하필 나야’ 라고 방황했지만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그 뜻을 알게 됐다.”며 “하나님은 믿음의 표본을 만드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 두 오빠와 아버지 등 많은 순교자들은 죽은 것 같지만 죽은 게 아니다. 그 안에는 씨앗이 있었다. 무수한 영혼을 깨우치는 하나의 믿음의 모델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손 권사는 “사람은 누구나 역경을 많이 겪는다. 고난 없이는 신앙생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편안하고 안락할 때는 하나님을 잊고 기도도 안하고 기도제목도 없어진다.”며 “고난이 부딪혔을 때 고난 속에 빠지지 말고 그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야만 한다. 손 목사는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통해서만 단련된다. 감옥은 나에게 유익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번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 출범과 관련해 손 권사는 “몇 년 전부터 시도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고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며 “여러 의원들이 함께 협력해주셔서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다.”고 말했다.

최창민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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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악이라고 예사로 여기지 말고, 적은 선이라고 하여 경히 보지말라. 적은 악이 쌓여 대악이 되고 적은 선이 자라서 성현이되는 연고니라. 작은데 충성하는 자는 큰데도 충성하니이다.” (고 손양원 목사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손양원 목사 출생 110주년 기념해 사진과 옥중서신 모아

▲책 <순교자의 길> 표지 사진
오는 3일은 고 손양원 목사가 탄생한 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손양원 목사의 삶과 이 시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길을 되새겨보는 <순교자의 길>(바울서신)이 출간돼 관심을 모은다.

한센병 환자의 환부에 기꺼이 입을 대고 피고름을 빨아내는 초인적 박애를 실천한 ‘사랑의 원자탄’.

여순 반란 사건 때 배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 아들을 죽인 좌익 청년을 양자로 삼은 용서의 아버지.

6.25 전쟁 당시 피란을 거절하고 한센병 환자들과 애양원에 남았다가 북한군에 처형당했던 목회자 손양원.

<순교자의 길>은 손양원 목사의 출생에서 장례 장면까지 남아있는 사진 362장과 손 목사의 옥중서신 20편이 원문 그대로 수록됐다.

공개된 사진 중에는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과 손양원 목사의 모교인 평양신학교에서의 수업 광경, 고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 교회,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찍은 모습들이 있어 눈의 띈다.

20편의 옥중서신, 가족에 대한 애틋함과 시대정신 엿보여

이 번에 출간된 <순교자의 길>을 통해 최초로 원문으로 공개된 손 목사의 옥중서신에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참된 삶의 자세, 신도들이 마주하고 있는 가난과 삶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성경의 말씀대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 민족을 살리자. 정계에 나간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진실한 정치를 하자! 교육계에 나선 그리스도인들은 학생들에게 지식만 가르치지 말고, 지식의 근본인 여호와를 알려주자! 경제계에 나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지 말고, 정직한 상도(商道)를 세우고 만민에게 편의를 주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그의 가르침은 현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도 깊은 깨달음을 준다.
 

▲손양원 목사(왼쪽)와 백범 김구 선생(오른쪽)의 모습
또 “내가 항상 말하거니와 고난은 참으로 큰 복이외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대복이 없는 법이외다”라고 전하는 편지에서는 옥중에서도 고난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가족과 한센 환자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염려, 환자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일 본 검사 앞에서도 늘 당당했던 그였지만,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선 “밤마다 몽(夢) 중에 당신이 보였습니다. 아마 근심 걱정에 눌러 병이 된 모양입니다. 나를 위하여는 조금도 염려치 말아주소서”라며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남편의 안타까움이 살갑게 드러난다.

누구보다도 예수를 닮아가기 위해 애쓰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손 목사의 절절한 편지와 사진으로 담긴 그의 흔적들이 우리가 따라가야 할 시대정신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윤화미 ⓒ뉴스미션



출처 : 큰믿음 큰사랑 in NY
글쓴이 : Dump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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