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혁과 부흥

온전한 제자도 - 부흥의 표적

하늘감동 2014. 7. 17. 15:43


온전한 제자도 - 부흥의 표적

 

 

 

 

 

 

예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교회를 통하여 그분의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다.

교회가 전하는 메세지는 왕국의 메세지여야 하며 그것은 표적과 기사, 기적과 신유, 그리고 해방이 수반되어야 한다.

초대 제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는 후대의 제자들에게도 그분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한" 것이므로 교회의 목적은 이 목적을 아울러 포함하여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제자도'의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제자됨의 표이며, 또한 질병과 악한 영의 종노릇하는 것과 같은 사탄의 일을 드러냄으로써 그분의 나라를 세워가고 주 예수님을 높이는 데 참여하게 하는 새로운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그 이상'은 때로는 '기름 부으심'이라고 불리는 성령님의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주심'을 말한다.

그 은사는 자연적 능력이나 훈련에 의한 것이 아닌, 영적이며 은혜로 주어지는 능력이다.

'그 이상' 없이는 교회의 사역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여러 사회복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상'은 하나님이 가까이 임하시는 실재요,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으시고 강림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부흥의 때와 쇠퇴의 때의 차이다.  

부흥이란 '완전한 성별', '성화', 또는 '성령 세례'등, 어떤 언어로 불리든 간에

그 이상'을 체험한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부흥의 시대는 그들이 체험하거나 교회가 체험하는, 실제로 가능하고 준비되어 있는 생명이 폭포수에 감전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류를 더 사랑하는 것,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기름부으심, 더 큰 기쁨,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주님의 더 많은 부담감, 다른 사람들의 궁핍함을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더 많은 계시, 죄에 대한 더 큰 가책, 기도의 더 큰 믿음, 더 많은 변화, 더 많은 은사, 더 많은 치유, 더 많은 놓여남, 더 많은 교회 개척, 그리고 하나님의 날에로의 더 많은 관습과 문회의 변화 같은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은혜로 임파테이션을 받은 사람들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자'가 된다.

 

그들은 개인적 역사를 바꿀 뿐 아니라 지역교회 또는 지역 사회 차원에서 그들 주변의 역사를 바꾸어간다.

강력한 임파테이션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그 이상'과 같은 이야기는 천 팔백년 전에 끝났다고 배워왔으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기적은 성경 기록의 완성과 함께 끝났다고 배워온 선입견을 버리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연구할 것을 호소한다.

이 목적에서, 나는 리전트 대학(캐나다 밴쿠버) 신학교의 존 루스븐 박사(Jon Ruthven)이 자신의 웹에 올려 놓은 글들,

"은사주의 신학은 성경적인가?"와 "기독교 전통에 나타난 그리스도: 실종된 그의 은사 강조"를 읽어볼 것을 권하다.

실제로 초기 교회에 있어 임파테이션의 행함은 초대교회 제자도의 기본적 요소였고 세례 의식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우리가 전하는 메세지는 한때 초자연적인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셨던 과거의 하나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초대교회 때의 황금시절에나 있었던 일이고 지금은 중단되어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의 메세지는 이래에 그분의 재림 때에나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전해서도 안 된다. 그 메세지는 우리가 보고 있는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장차 일어날 것의 보증이요, 표적이요, 모든 치유의 기적은 "순식간에, 눈 깜작할 사이에" 모든 믿는 우리가 받게 될 홀연히 변화된 영광의 몸의 표적이다.

 

 

과연 하나님께 무엇이 '정상'인지를 알아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종종 그분의 백성을 영광과 그분의 분명한 임재하심으로 엄습하였음을 살펴보자.

초대교회 교부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중세 암흑시대, 이성계몽 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 임마누엘 하나님의 족적이 새겨진 시간대를 볼 수 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행하셨고, 자신을 계시하였으며, 남은 자를 새롭게 하시고, 그분의 신부에게 새 힘과 생기를 볼어넣어주셨다. 

성도들의 계보를 뒤돌아보면, 오늘날 많은 정통 기독교에서 도외시하는 표적과 기적과 다른 현상들이 사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에 행하시는 것의 중요 부분이었다.

예수님께서 성령은 약속하셨을 때 예수님은 성령의 임재와 충만에 시간 제한을 두신 일이 결코 없다.

사도 바울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설명할 때도 그는 그런 은사들이 사용 시한이 있는 임시적 선물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만일 모든 인사와 하늘의 공급원이 초기 크리스천들에게 필요했다면, 마지막 추수 때의 성도들에게는 어째서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경주의 출발선에서는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무장시켰는데, 어떻게 그 다음에는 그들을 기어다니게 만들고 약하고 기진하게 만든 채, 결승점을 통과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나는 예수님께서 미적지근하고 무기력한 남은 자들, 마지막 때에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 그 믿음이 시험 받기 전에 휴거나 되기를 바라는 자들을 위하여 돌아오시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강력한 역사를 보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그분의 능력과 변함이 없으신 이의 이름으로 행한 의의 행위로 옷을 입은 찬란히 빛나는 위엄찬 신부를 위하여 돌아오신다.

 

 

오직 하늘만이 온 세계에 퍼져 나간 1900년대의 기름부으심의 열매들을 알 것이다.

만일 그 부으심에 대한 잘못된 오해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다음번에는 주류 교회들이 그 운동을 놓치지 않기를 소망한다.

주류 교회들이 과거의 부흥 운동을 통하여 바른 지식을 얻어서 부흥의 때에 일어나는 그러한 현상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부흥 운동은 많은 경우 통곡, 죄에 대한 깊은 자각, 은혜에 대한 뚜렷한 깨달음,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는 친밀함, 넘어짐, 웃음, 사회에 대한 근심, 더 많은 구원, 성결, 그리고 선교 사역의 확장 같은 것들로 그 성격이 나타나며, 그것은 부흥의 표적이다.

나의 친구 롤랜드 베이커는 "믿음이 없다는 것은 체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것이다"라고 설교했다.

그분의 품으로 달려가라. 그분의 은혜를 사용하라. 아버지의 이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라.

"내 아들딸들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너희들 것이란다."

 

 

- 랜디 클락 / <그 이상을 갈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