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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반박

하늘감동 2015. 6. 22. 17:14

지만원의 북한 특수부대 개입 주장

2002년 이래 극우 성향의 논객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부르는 한편, 조선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했다.[73] 자유북한군인연합도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5·18 광주사태는 (북한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 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주장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은 올인코리아, 코나스넷 등의 극우단체들을 통해 선전됐다.[74][75][76]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만원, 서정갑 등 극우 성향의 인사가 대거 참석했으며, 기자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기자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케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76]

공작부대 개입설을 둘러싼 논란과 반박

  • 일부 단체는 시민군이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는 계엄군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무장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 인민군의 개입에 따른 폭동 사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이 개입했음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가 전혀 없어서 신빙성은 낮다. 증언 내용이 본인이 경험한 내용이 아니라 북한에서 들은 '전언'인데다 '잃어버린 10년' 등 일부 단체의 논리와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군 특수부대의 소행이 맞다면 전두환 정권 시절 이를 밝히지 않고 넘어갔겠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77]
  • 일부 단체는 계엄사 및 제5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5·18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광주 시민 중에 계엄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M16 소총보다 시민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카빈총에 의한 희생자가 더 많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5·18 민주화 운동 진압 후 의사·검찰 관계자·보안사 요원이 작성한 사망자 검시 자료 원본에는 M16에 의한 사망자가 카빈에 의한 사망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잘못된 주장이 나온 이유는 1980년 6월 중순 보안사 주재로 사체 검안위원회가 열려, 피해자 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공식 발표에서 카빈에 의한 사망자로 분류된 사망자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부에서는 M16 총상 사망자는 군에 대항한 것으로 인식돼 폭도로 분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검안위원회에서 최초로 폭도로 분류된 사람은 20여 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해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카빈으로 분류된 사망자가 더 많아진 것으로 1995년 국방부의 재조사에서 밝혀졌다. 1995년 국방부는 재조사 후 1980년의 조사는 잘못되었으며, 대다수의 희생자가 M16에 희생되었다고 발표했다.[78]
  • 5·18 당시 계엄군의 작전보고·전투상보에 광주 시민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국회 광주특위·검찰·국방부는 대한민국 계엄군 기록을 토대로 진상규명을 했다. 진상규명 결과 무차별 연행과 과잉진압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 광주역·전남대·전남도청에서의 집단 발포, 광주외곽봉쇄작전 과정에서 일어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광주국군통합병원 진로개척 작전, 송암동 학살 사건 등과 같은 무차별적 발포,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 중 무장 시위대에 대한 발포 등이 밝혀졌다.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군인들에게 훈장이 주어졌으며, 심지어 상부의 지시 없이 발포를 한 군인들까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이후 신군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볼 때 대한민국 계엄군에 의한 광주 시민 살해 행위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들에게 계획적인 테러를 행했다는 주장에는 실질적인 증거가 있을 수 없다.[79]
  • 일부 단체는 북한이 5·18을 기념한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5·18 민주화 운동 뿐만 아니라 4·19 혁명(남조선 인민 봉기), 6·3 항쟁(남조선 청년 학생 봉기), 6월항쟁(6월 인민 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 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고, 사건이 발발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5·18 민주화 운동 등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왜곡해서 북한 주민에게 선전한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민주화 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80] 광주에 취재를 위해 잠입했던 조갑제는 5·18 당시 많이 불리고 큰 박수를 받았던 구호가 "김일성은 오판 말라"였다면서 5·18이 반공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37]
  •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의 정수만 회장은 2006년 12월 21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중 한 명이 북한군이라고 지목을 했는데, 정수만 회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지목된 인물은 1980년 5월 22일 광주국군통합병원 앞에서 20사단 61연대의 작전 도중 사망한 고등학생 임00라고 밝혔다. 당시 사망자 검시 기록을 보면 임00이 끝까지 군을 추격하기에 계엄군이 사살했다고 한다.[81]
  • 5·18 당시 북한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 한미연합사령부와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분석에 따르면, 5월 초부터 5월 18일까지 북한의 특이 동향이 감지되지 않았다.[82] 5월 20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국에 보낸 전문을 보면, 그 시점까지 북한군의 어떤 동향도 확인되지 않았다. 5·18을 진압했던 계엄군은 부상자와 연행자 수천 명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 대공 판단서를 첨부했다. 여기에는 대공 용의점을 철저히 조사해서 대공 유무를 기록하게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이상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83]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5·18 민주화 운동을 전후해 루마니아를 방문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5·18 발발을 사전 예측했다고 보기 어렵다.
  • 1980년 5월 21일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경보 하나가 발령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 경계 태세 강화 지시가 떨어졌다. 전라남도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소속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포 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 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이와 같은 철통경계 속에서 일부 단체 주장대로 북한군 600명이 해안으로 침투해서 육로로 빠져나갈 상황이 아니었다.[84][85]
  • 자유북한군인연합은 탈북자 사이에서 5·18 북한 개입설은 상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 조선로동당 비서 황장엽 등 고위급 탈북자들은 5·18 북한 개입설을 언급한 적이 없다. 북한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심신복 회장은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주장은 현실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86] 북한군 특수부대에서 사관장 계급으로 복무했던 한 탈북자는 "특수부대 병력이 600명이나 내려왔다면 그것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전면전에 해당된다"며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거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라고 잘라말했다. 그는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증거나 확인 없이 그대로 전달하면서 거짓이 진실이 됐다"며 "주목을 끌고 싶은 일부 인사가 잘못된 발언을 해 광주 시민들에게 상처를 줬다"라고 강조했다. 20년간 국가보위부와 정찰국 장교로 복무한 한 탈북자는 "북한군이 만약 5·18 당시 개입했다가 북한에 돌아왔다 하더라도 해당 군인들이 전역할 때는 작전에 대해 비밀에 부치는 서약서를 쓴다"며 "더구나 대대급 규모의 작전이었다면 처음부터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이 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북한재향군인협회는 "상당수 회원들이 북한개입설을 허황된 발언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더 이상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라고 밝혔다.[87]
  • 1980년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개 시로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300 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북한 측에서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별다른 이익을 얻거나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과거에 군사분계선 인근 지역에 무장공비가 출몰했을 때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등에서 훨씬 적은 숫자의 병력도 주민신고에 의해 발각되거나 동선이 노출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안가도 아닌 후방 내륙 도시에 상당한 수의 병력을 별 노출 없이 침투시켰다는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 무엇보다도 광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라북도 군산에 주한 미군 공군 베이스캠프가 있는데다, 시내에서 20~30마일 거리에 위치한 광주광역시 송정동에도 주한 미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북한군이 정말 개입했다면 주한 미군 사령부나 미국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했을 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북한군 개입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 또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조차도 모르게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오히려 대한민국이 전복될 뻔한 위기를 신군부가 자초했다는 얘기가 되고, 결과적으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우익 단체가 스스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무능력과 직무유기를 증명하는 결함이 된다.


다른 우파의 주장

2007년 3월 우파 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했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 민주화 운동'이라 평가했고[89],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 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90] 이에 대해 북한 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91]

  • 광주시민 수십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 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었다.
  • 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됐다.
  • 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
  • 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쳤을리 없다.
  • 탈북자 증언은 전언에 불과하며,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 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를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5월 20일 이후일 것인데, 5월 20일부터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다.

한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2004~2006년에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는 2007년 8월에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92]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온 국민과 함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숨져간 민주 영령들"이라고 평가했다.[93]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5%C2%B718_%EA%B4%91%EC%A3%BC_%EB%AF%BC%EC%A3%BC%ED%99%94_%EC%9A%B4%EB%8F%99#cite_note-73






[주장 17]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는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증언이 있다?

 

● 북한 특수부대가 5.18에 개입했다는 임천용의 증언은 북한군의 침투인원, 침투경로, 퇴각경로,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또한 임천용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물증은 전혀 없다. 


-임천용의 인터뷰 발언 정리 표

http://i.imgur.com/5c7Kyt0.png

 

●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북한군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7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

 

 임천용은 2006년 한국논단의 인터뷰에서는 계엄령 중이라 육지가 봉쇄되어 북한군이 전부 서해안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했으나, 2013년 TV조선 인터뷰에서는 북한군이 땅굴로 내려와서 육로로 이동하여 광주까지 내려왔다면서 자신의 예전 주장을 완전히 번복했다. 2007년 뉴스한국 인터뷰에서도 철수 과정에서 침투가 불가능하다고 한 육지를 통해 이동하여 북한군 60~70명이 강원도 중부전선을 타고 넘어갔다고 말한 바 있다.

 

 침투 방법도 각각 다르다. 2006년에는 오직 배를 타고 침투했다고 했지만, 2007년부터는 잠수함 침투를 언급했고, 특히 2013년 TV조선의 남침땅굴 특집방송 때부터 땅굴 침투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8300

-2006년 기자회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TV조선 인터뷰

http://vod.tv.chosun.com/vod/index_vod_detail.cstv?prog_id=C201200117&epis_sub_cnt=233 

 

● 2006년 임천용이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한 사망자의 시체 사진을 제시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1980년 5월22일 총에 맞아 쓰러진 외삼촌 손광식을 구하러 갔다가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사망한 임정식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0125614



[주장 18] 탈북자 단체의 5.18 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는 신빙성이 있나?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5.18 당시 상황을 TV에서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증언이 이 책의 포인트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에서 5.18 당시 광주 상황을 TV를 통해 생중계로 지켜봤다고 주장하는데, 1980년 기술로 송신소, 중계소 하나없이 광주에서 수백km 떨어진 평양에 생중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 TV에서 여자만 골라 도끼,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5.18 민주화운동에서 사망한 여자는 11명에 불과하며, 모두 M16에 맞아 사망했다.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몇몇 탈북자는 북한 TV에서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면서 한 시신의 사진을 제시했는데, 5.18 사망자 검시자료에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신 사진을 가지고 왜곡한 것이다.

http://asegaew.egloos.com/3406357


● 2013년 5월15일 서울중앙지법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짜고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을 학살했다는 글을 작성한 보수논객에게 사자명예훼손 유죄를 선고하면서 "탈북자의 수기(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내용은 출처나 증언자들이 불분명하고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고 판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6&aid=0002155661

 

 

[주장 19] 5.18 광주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을 기리는 비석이 북한에 있다?

 

● 뉴데일리는 함경남도 청진시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 사진을 게재하면서 5.18과 관련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비석 사진에는 5.18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없지만, 뉴데일리는 김주호 박사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비석이 5.18과 관련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은 우리나라의 현충탑처럼 북한에서 시군마다 하나씩은 있는 흔한 비석이다. 

 

북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노동신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인민군영웅 렬사묘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청진시 출신 북한군을 추모하는 비석이거나,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북한군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도 높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355393

 

● 김주호는 어떤 문건과 비석의 명단에 있는 사망자 명단을 비교해서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 158명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비석과 5.18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을 공개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 국정원은 함경남도 청진에 있는 비석과 5.18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북한 정보원을 통해 현장조사를 했지만 묘비 속 이름들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연결 지을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특수부대원의 이름을 나열하고 특수임무를 공개하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0523220310255



[주장 20] 황장엽이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고 쓴 메모가 있다?

 

● 2013년 4월 김용삼 전 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 TV조선을 통해 황장엽이 남긴 메모에 '광주학생문제는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는 구절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용삼은 해당 구절이 있는 메모를 공개하지 않았고, 언론보도에서도 그 구절을 부각시킨 사진은 없었다. 확실한 물증도 없으며, 제3자를 거친 전언인 이상 황장엽의 메모에서 5.18을 언급하는 구절이 정말 존재하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 황장엽은 2007년 10월15일 자유북한방송에서 김일성은 5.18에 편승하여 북한 정권에 유리하게 만들자는 의견을 거부했다고 직접 증언했다. 황장엽은 "지금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못 일으켰습니다. 김일성도 늘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돼'라고 말입니다.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북한이 사전에 북한군을 투입할 계획을 세웠거나 사건 발생 후 긴급하게 광주로 북한군을 보냈다면 김일성이 저런 식의 반응을 보였을 리가 없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fnkradiob201&page=4&command=body&no=119

 


[주장 20] 5.18 시기 광주에 직접침투한 북한군인의 증언이 있다?


● 김명국이라는 가명을 쓰는 한 탈북자에 따르면 김명국은 1980년 5월19일 오후 평양 부근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21일 새벽에 광주 인근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광주 시민군 행세를 했으며 27일 오전 9시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하면서 남한 특전사 3명을 직접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 5월27일 상황을 기록한 계엄군 작전일지를 살펴보면 사실과 전혀 다르다. 진압부대로 투입된 육군 보병 제20사단 및 이에 배속된 공수여단의 진압작전기록에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재진입 작전을 실시해 새벽 5시 20분 전남도청을, 새벽 6시 20분 YMCA 건물을 점령하고 무장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완료했다고 적혀있다. 5월27일 계엄군 사망자는 2명이었으며, 새벽 6시 30분 이후에는 전투 기록이 전혀 없다.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30518164205737


● 김명국에 따르면, 북한 특수부대는 퇴각 과정에서 5월27일 전라남도에서 출발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문경을 거쳐 태백 산맥을 따라 5월 30일에 강원도에 위치한 휴전선에 도착했다고 한다. 계엄령이 내려져 검문, 경계가 심한 상황에서 북한 특수부대가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 한반도 남쪽을 전라남도-경상남도-경상북도(문경 세재)-강원도 순으로 돌아서 단 3일 안에 휴전선까지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http://mirror.enha.kr/wiki/5.18%20%EC%97%AD%EC%82%AC%EC%99%9C%EA%B3%A1/%EC%B1%84%EB%84%90A


 

[주장 21] 5.18 당시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북한 사람, 탈북자 사이에서 상식이다?

 

●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5.18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비판한 바 있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 북한군 특수부대에서 사관장 계급으로 복무했던 한 탈북자는 “특수부대 병력이 600명이나 내려왔다면 그것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전면전에 해당된다”며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거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증거나 확인 없이 그대로 전달하면서 거짓이 진실이 됐다”고 평가했다. 20년간 국가보위부와 정찰국 장교로 복무한 한 탈북자는 “북한군이 만약 5·18 당시 개입했다가 북한에 돌아왔다 하더라도 해당 군인들이 전역할 때는 작전에 대해 비밀에 부치는 서약서를 쓴다”며 “더구나 대대급 규모의 작전이었다면 처음부터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이 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재향군인협회는 “상당수 회원들이 북한개입설을 허황된 발언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더 이상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2117551



출처 http://blog.naver.com/rapid81/120173046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