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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 시대의 특징은 바른 복음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늘감동 2009. 2. 17. 20:16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또다시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벌어진 현상 때문이 아닙니다. 그 현상 이면에 있는 교회의 가치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 문제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생각할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 7명이나 되는 부녀자를 살해한 강00 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슬픈 소식을 접하고 모두들 힘들어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잔인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져야만 하는가? 용산 참사에 이어 터진 추악한 일은 우리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자비하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언론도 소식을 줄이고 있고 우리 역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기에 점점 잊힐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가슴을 휘저었습니다. 멍하니 기사를 읽으면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강00 씨가 오랜 시간동안 교회를 다녔으며 최근까지도 교회 생활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살인 사건을 저질렀던 바로 그 때에도 교회에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그 기사의 머리글은 “신앙도 살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였다”였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그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선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누구도 이 사람이 잔인한 살인자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철저하게 이중적인 존재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떤 곳이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무엇을 듣고 깨달았을까요?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목사님이 말하기를, 자신은 더 이상 교회에서 죄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살아가기도 힘든 세상인데 거기에 죄에 대한 질책까지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교는 교회 성장의 장애물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한 대형교회 목사는 더 이상 선지자적 설교는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한 설교는 지친 영혼에게 위안을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이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죄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양심은 죽게 되고 거룩한 삶을 위한 투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설교 없이 단지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설교로는 영혼은 멸망의 자리로 가게 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예레미야 시대의 모습인 것처럼 보입니다. 평안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교회가 분명한 자신의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평안하게 만드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복음의 선명함이 없으면, 사람들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예배하는 척은 하지만 영혼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땅에 것을 추구하는 일에 신앙을 사용할 것입니다. 광명한 천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는 사자와 같은 세력에게 우리의 영혼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변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무나 슬픈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더더욱 긴장해야 합니다. 교인 늘리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이 나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은 바른 복음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각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믿음 없음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기 않습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것은 설교자를 피폐하게 만들면 됩니다. 설교자가 바르게 서지 않으면 교회는 결코 건강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설교자를 살리는 것이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한 일은 성전을 회복하고 율법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를 통하여 이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와 함께했기에 이스라엘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여 소망이 없어 보일 때, 하나님은 루터와 칼빈을 통해 다시금 교회를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데 있어서, 교회를 세우게 하는 데 있어서도 설교자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를 바르게 세우고 지키는 것은 바로 성도인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세상 욕망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아니라 복음에 사로잡힌 설교자를 소망하려면 가슴을 쓰리게 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설교를 품어야 합니다. 비록 힘들고 아프지만 이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며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준 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설교자를 소망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배웠다는 지식층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아닌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설교도 없고, 성례도 없고, 권징도 없는 클럽들이 점점 가정 교회라는 명목으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기성 교회에서 이들이 겪은 아픔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온전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교회를 세우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세워나가는 데 더욱더 신중하고 선명해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은 분명 아픔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영적인 회심과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옷을 찢고 아파해야 합니다. 그 아픔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 하나님의 마음과 손이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 신동식 목사/ 빛과소금교회 담임, 기윤실 생활신앙실천운동본부장(뉴스미션)

출처 : 큰믿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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