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

순교의 나라 일본 기독교사

하늘감동 2009. 5. 17. 09:44

일본의 기독교 역사 와 비젼

 

*일본 기독교의 유래 *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 온것이 1549년 프란시스코 자비에르(1506-1552)가

큐우슈 남단 가고시마에 상륙함으로써 일본에 최초의 복음이 들어오게 된것이다.

 

당시 세력가인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에 의해서 자유롭게 받아 졌는데,

그로부터 70년후 기독교가 금지 될때까지 80만명의 신자로 불어 났다.

 

당시 일본의 인구를 1500만에서 2000만으로 생각 한다면 놀라운 숫자의 크리스챤 이었다.

일본은 죠몽시대에 선조숭배라는 독특한 영혼순환개념을 형성하게 되면서

매우 독특한 민족성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전래 70년만에 80만명이나 되는 신자로

부흥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1580년 크리챤 영주 오오무라(大村)가 나가사키의 일부 영토를 예수회에 헌납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는데 당시 일본이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로는 기독교가 생소했고,

유럽과의 무역으로 당시 권력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포교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비에르선교사는 다이묘 오우치를 만나호의를 얻고 포교의 자유를 허락받아

2개월간 5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프로이스는 사비에르가 일본에 온 날부터

50년간의 선교기록사인[일본사]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상황, 불교, 조상숭배등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되어있다.또한 올칸티노는 허드슨테일러처럼 일본풍의 복장,

식사를 하였고 교토에 교회당을 건축하고 신학교를 건립하였으며 40년간 사역 후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후 전대 미문의  기독교 박해를 통하여 일본은 두번다시 일어설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가 파괴되고 말았다.

당시 기독교 박해의 이유를 여러가지로 생각할수 있지만 당시 일본 천하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87년 반텐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서양제국의 침략 두려움과 기독교가 일본의 통치 이념에 부합되지 않음,

기독교인에 의한 신사 불각의 파괴, 선교사를 포루투칼, 스페인의 일본점령의 스파이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가 들어옴으로 인해 당시 일본문화의 사상이 와해되고 국가지배 체재가 붕괴되고

나악 일본 정체성 자체가 소멸될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역사로본 일본인 *

 

이러한 기독교의 부흥은 1614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금교령이 내려짐으로

크나큰 위기를 맞는다. 선교사와 신자들이 체포, 추방, 개종을 강요당하고 순교를 당하였는데

로마의 카타콤의 순교자보다도 더 많은 20-30만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한다.

 

박해로 인한 순교자가 20~30만명 정도 나왔다는 것은 당시 크리스챤 3명중 1명이 순교를

당한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볼때 일반 크리스챤들도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수 있다는것을 알수있다.


이는 그해 뿐만이 아니고 토쿠가와의 에도 막부시대의 약 250여년간 해마다 계속되었다고 한다. 1622년에는 나가사키의 리츠야마(立山)에서 55명이 순교당하였고, 1626년 나가사키에서

후미에(踏絵)가 시작되었다.

 

후미에(踏絵)는 매해마다 예수나 마리아상을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을 색출하는 방법으로 엔도슈샤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에 후미에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1637년에는 또한 영주들의 과혹한 천주교 강압과 무거운 세금에 반항한 영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시마바라의 난이다.

일치 단결한 3만 7천여명은 16세인 아마쿠사 시로우를 총대장으로 하여

히라성에서 농성으로 격투한지 90일후, 전원이 신앙을 위하여 순교당하였다.

 

세계교회사에 그 예를  볼수없을만큼 잔인한 박해가 무려 250여년을 이어졌는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박해로 인해 일본인의 심성이 현재의 일본인 처럼 이상하게

변해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박해의 5가지 방법 *

 

(1) 테라우케(寺請) 제도 : 모든 사람을 절에 주민등록을 하게함으로써 사실상 불교를 국교화해

소속된 절에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증명을 받아야 했다.

 

(2) 종문개명 : 각 마을마다 절에서 종문조사를 하여 여행, 혼인, 이사, 취직등을 할 때 증명서를 발급 받게하여 절의 허가가 없이는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하였다.

 

(3) 후미에 (踏み絵): 매년 1회씩 예수 그리스도나 마리아의 초상을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도를

적발해 내려는 것이었다. 이 처럼 잔인한 박해가 없었다.

어떤 선교사는 고문과 박해로 말미암아 불교도가 되어버린 자들도 있었다.

(기독교인을 색출, 고문, 박해의 형태도 여러 가지로 연구해 철두철미하게 기독교 박해를 행했다. 즉 십자가나 예수나 마리아 상을 세긴 동판이나 목판 위를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후미에 제도는, 1629년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걸쳐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후미에를 거부하면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 즉각 처형되었다.

그 처형의 방법에는 처음에는 단순한 십자가형이나 화형을 행했다.

그러나 고통이 적은 급작스런 죽음을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영광으로 생각하자,

90도가 넘는 부글부글 끓는 운젠의 유황 열탕에 오랫동안 손가락을 자르고,

이마에 화인을 찍은 뒤에 거꾸로 매달아 오랫동안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거나

물을 온몸에 조금씩 부우며 배교를 유인하는 방법,

거꾸로 매달아 구멍에 머리가 들어가도록 하여 오물을 넣은 구멍 달리기 고문,

바다에 십자가를 두고 밀물 때에 목에까지 찰 정도로 메달아 몇 날 며칠을 특히 밤에

고통 중에 울부짖게 함으로써 아직도 남아 있을 지 모를 기독교인들에게 공포심을

전달하게 하는 등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고문은 당연히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나가사키와 오우라, 시마바라 지방에서

더 잔혹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끝내는 배교를 하였는데,

우리는 그들의 고뇌와 절망을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생생히

체험할 수 있다. )

 

(4) 5인조 제도 : 5가정을 한조로 (세금, 범죄예방, 기독교인 색출을 목적)조직하여 감시하여

밀고와 연대책임을 지게 하였다. 일본이느이 심성에 깊은 상처를 받는 제도였다.

일본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혼내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立て前(외면)가 다르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의 표정이 없다고 표현 되는것이 이로부터 생겨 났다고 할수있을 것이다.

 

(5) ギリ師団(기리시단)류족개명 : 만약 기리시단(크리스챤)이 발견되었을대 그의 친족들도

기리시단과 동일하게 보고 남자는 7대까지 여자는 4대까지 격리해 특별감시하에 두었다.

장례식이나 화재가 났을 경우만을 제외하고 사람들의 접근이나교제를 금지시킨 제도이다.

사회로 부터의 오나전한 따돌림과 이웃과의 교제의 단절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에

있어서 매우 가혹한 형벌이 아닐수 없다. 흔히 이지메いじめ(따돌림)라고 하는것이 바로

이 형벌에서시작되었다고 할수있다.

이 때의 영향으로 오늘까지 일본인의 심성에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1858년에 미일수호조약(1854년)후 최초로 개신교의 선교사가 방일함으로써 300여년의

기나긴 쇄국에서 일본은 문을 열기 시작했으며 1865년에 외국인거주자들(프랑스인)을 위해

건립된 오우라천주당에 우라카미의 크리스챤 10명이 성당에 뛰어들어 옮으로서

푸치잔 신부에 의해 [크리스챤 발견]이라는 뉴스가 전세계를 놀라게 한다. 

실로 250여년의 긴 박해 속에서도 신앙은 뿌리를 내리고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금교령이 효력을 발휘하던 시기 였으므로 이들은 전원 순교당하고 만다.

그리고 1866년 이 우라카미지역에 4번째로 박해가 일어난다.(첫번째는 1790년)


그러나 1868년 250여년의 에도시대(1612-1868)통치를 마치고 메이지 천황이 등극함으로써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1870년에 우라카미의 신도 3000명을 전국에 유배했고 드디어 1873년에 금교령이 해제되고  비로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일본 선교의 비젼 *

 

세계의 기독교 역사상 이처럼 박해를 당한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250여년의 기독교 박해속에서도 가꾸레 기리시단(隠れギリ師団) 이라는 숨은 크리스챤이들이

숨어 몰래 신앙을 지켜왔었던 것을 볼때 일본은 분명 복음의 씨앗과 순교의 피가 뿌려진 나라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분명 그 씨앗을 추수하는 기쁨을 우리세대에 주실것을 믿고

오늘도 희망속에서 일본선교의 가능성을 잡고 주님께 기도로 간구하며 나아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