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家系) 저주(詛呪)의 유전(遺傳) 여부與否)에 대한 성경적 고찰
가계에 흐르는 저주 (조상의 죄의 유전) 과연 성경적일까?
김경규 교수(PhD) 가계저주론 강의안
오늘날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 하면서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정립이 잘 되지 않은 사람들은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커다란 조상의 저주가 임하는 줄 알고 있다. 그래서 조상의 죄의 유전여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꾸만 조상들의 알지도 못하는 죄를 회개하며 불안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 분명한 고찰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조상들의 죄가 유전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을까? 그리고 조상들의 죄가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과연 어느 쪽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A. 가계 저주론의 기원
고대판 숙명론적 가계 저주론의 기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가 조상들의 죄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한탄과 자조가 짙게 섞인 말로 하도 원망을 많이 해서 결국 그 백성의 속담이 되고 말았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 함은 어찜이뇨” (겔18:2). 어리석은 책임 전가만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다시는 그 속담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엄금하신다.
현대판 가계 저주론의 기원:
조상의 저주를 그 후손이 운명적이고 절대적으로 대물림 바게 된다는 이론은
1972년 케니스 맥골이라는 미국의 한 정신과 의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던 것이 1986년 제아 헴프쉬라는 사람에 의해 신학적 이론의 토대가 갖추어져 발전된 것으로 그 역사가 약 30년 정도이다.
B. 가계 저주론의 주장
가계의 저주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조부나 그 이상의 선대에서 영적이나 반 인륜적인 죄를 범한 경우, 그것이 그 후손에게 조상의 저주가 되어 내려 간다. 그러므로 그러한 조상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조상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가계의 저주에서 풀려나려면 조상들의 죄를 대신 회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일지라도!
조상의 저주가 자손에게 유전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
1. 출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는 말씀과,
2. 신28장15절 18절“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라는 두 구절을 성경적 근거로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조상들의 죄를 자손이 대신해서 회개기도를 드려야만 저주의 줄을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성경적 근거를 느헤미야(느1:6)와 다니엘의 회개기도(단9:20절) 를 근거로 제시한다.
3. 느1: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4. 단9:20절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C. 과연 조상의 저주가 자손에게 유전될까? - 저주론을 반박하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
성경은 가계 저주론을 옹호하는 듯한 말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의 말씀도 있다.
다음의 신명기 24장 16절; 겔 18:19-20; 겔 18:2-4절; 말씀이다.
1. 신명기 24장 16절 하나님은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2. 겔 18:19-20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 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D. 자신의 고통을 조상들의 죄 탓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겔 18:2-4절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한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조상들의 죄 탓이라고 불평하고 있던 자들이다. 자신들이 지금 당하는 고통은 조상들의 죄 때문에 당하는 저주라고 생각하던 자들이었다. 즉, 조상들의 죄의 저주가 가계를 타고 흘러내리는 저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생각을 가진 자들을 향해 지금 엄중히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출20:5 & 신 28:15-18절 Vs 겔 18:2-4절 & 신명기 24장 16절>
역사적으로 이 두 구절은 많은 신학자들이 해석을 시도하였다.
家系 詛呪의 遺傳 與否를 다룬 學者들의 解釋 :
<맥네일>: 출20:5절에 있는 심판의 집단적 성격과 겔18장에 있는 심판의 개인적 성격
그는 후손들이 조상들의 죄의 결과 때문에 고통 당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후손들이 고통은 죄 없는 후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단지 외적인 결과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조상들의 죄의 책임이 필연적으로 후손들에게 상속된다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죄의 결과 혹은 영향과 죄의 책임을 구분하고 있다.
맥네일에게 있어서(조상의 죄와 관계된) 죄 없는 후손의 고통은 고통 자체일 뿐이지 하나님의 심판이나 저주가 결코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고통을 가치 있는 것이 되게 하실 만큼 위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맥네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는 롬8:28절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적용함으로써 사람이 겪는 고통에 관해서 심오한 성경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후손들이 그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경험이 결국엔 최대의 축복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맥네일에게 있어서 이러한 고통은 죄의 무서운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죄 많은 조상을 둔 죄 없는 후손들-조상의 특정한 죄들과 관계가 없는 후손들- 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것이다.
<라드>는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 있어서 개인적인 책임의 원리와 집단적인 책임의 법칙과 더불어 존재했다고 말한다.
<캐런드>는 (웨스턴 침례 신학 대학원의 전 학장)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는 신24:16의 말씀을 조상들의 죄로 인한 자연적인 결과들은 조상들의 죄와 상관이 없는 후손들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고 해석하였다.
<월터 카이저>는 ‘집단적 연대/유대’ (corporate solidarity)라는 개념으로 해석했다.
다윗의 후손들은 칼로 인해 고통을 당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다윗의 죄에 대해서 책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윗과 집단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 때문에도 고통을 당한다. 사람들은 소위 가계에 대물림 되는 저주 때문이 아니라 한 그룹에 소속되어서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 때문에도 고통을 당한다. ‘집단적 유대’ 라고 부르고있다. 실로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이나 동업자들 혹은 남편과 아내나 자녀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다른 사람들의 죄와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 이러한 경우들을 말해보라!
*다윗의 인구조사:이스라엘 백성들이 염병에 걸리다.
*아이티의 정부지도자들이 부두교에 헌신-아이티의 참상
토론! 가나안 사람들의 멸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칼빈>은 출20:5절은 하나님께서 한 죄인을 집단적 책임의 원리를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겔18장은 하나님께서 한 죄인을 개인적인 책임의 원리에 따라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비록 집단적 책임의 원리를 따라 범죄한 조상의 후손을 심판하실 때에라도 범죄한 조상의 죄를 모방하지 않는 죄 없는 후손을 심판하시지 않는다고 이해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조상의 죄들을 모방하고 답습하며 되풀이 해서 같은 죄를 짓는 사람들, 즉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을 심판한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집단적 책임의 원리를 따라 심판하실 때에도 개인적인 책임의 원리를 제쳐두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가계 저주의 유전에 대한 성경의 결론
첫째, 신명기 24장 16절의 말씀을 근거로 볼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 순종 하는 조상이 받는 저주는 그들 자신에게 국한된다.
둘째,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집단적인 것(가족, 부족, 나라, 세계 등)으로 나타날 때는 그 소속 집단 전체가 범한 집단적 죄를 심판하는 것이다.
셋째, 만약 하나님의 집단적 (혹은 연대적) 심판이 임하는 그 집단 속에 집단적 죄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 죄 없는 사람들이 심판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들은 그 집단의 일부(보통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가 받는 심판의 결과나 영향력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이다. 즉, 조상의 불순종에 대해서 전혀 관련이 없거나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는 후손에게 조상이 받는 저주와 관련된 고통이나 재난이 따를 경우에는 순전히 조상이 받은 심판의 결과와 영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넷째, 불순종하는 조상과 함께 그 후손이 조상의 죄를 모방해서 함께 불순종할 때 그 조상과 후손 모두에게 저주가 임한다.
맥너트(맥네일과 다름)는 출20:5절을 해석하면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원인들을 조상들의 우상숭배나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저주(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경우)에서도 찾아낸다. 이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의 저주에 의해 저주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 형편없는 목사들이 자기 “교회를 떠나면 저주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맥너트의 주장을 믿는 아주 고약한 자들이다.
찰스 크래프트는 축복과 저주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소유물이며, 그것은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찰스 크래프트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저주의 권한이 없으며 축복의 권한만 있는데, 그것도 상대가 그 축복을 받기에 합당할 때에만 성취된다고 증거 한다. Ex 마 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맥너트나 크래프트와 달리 칼빈은 저주가 하나님께서 그의 세계를 통치하시는 한 방편으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귀속되는 권한 안에 있다고 말한다. 즉, 칼빈에 의하면, 사람을 향한 사람의 축복이나 저주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 주실 때 현실로 나타나고 축복의 말, 저주의 말에 상응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시는 한 사람을 향한 사람의 축복, 사람을 향한 사람의 저주는 무심코 내뱉는 한 마디 덕담이나 한 마디 욕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부분의 성경을 온당히 해석하고 있다.
우리의 말이 예수님처럼 권세가 있다면 세상은 남아 나지 못할 것이다!
F. 과연 조상들의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손들이 대신해서 죄를 회개해야 하는가
과연 느혜미야와 다니엘은 자기들의 가계에 흐르는 조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회개기도를 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적인 몇 대 조상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백성의 대표로서 백성과 동일시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련하여 탈봇 신학교 신약학 교수이자 영적 전쟁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클린턴 아놀드 박사는 동시 회개(identificational repentance)를 논하면서 동일시 회개의 가능성을 교회 안으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는 “오늘 날 믿음의 교회는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을 상징하므로 동일시 회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만 적절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야고보서 4장 8-10절 까지의 말씀에서 교회를 향한 회개를 촉구한 말씀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집단적 회개(Corporate repentance)는 다니엘과 느혜미야의 동일시 회개에 상응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클린턴은 항상 온전한 경건을 향한 끊임 없는 변화를 본질로 하는, 현재 존재하는 변화와 갱신을 동일시 회개로 지칭하고 있다.
즉, 회개는 현재 범죄하고 있는 개인 혹은 교회에게 해당되는 현재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회개의 본질적인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관점에서 과거 조상의 죄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조상의 죄 때문에 회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 어떠한 조상들의 죄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자기 자신의 죄나 면밀히 자백하라.
파인버그는 에스겔서에 나타난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섭리와 관련한 개인적인 책임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겔 18장 “5절에서 8절까지 의로운 할아버지, 경건치 않은 아들 그리고 경건한 손자에 이르는 삼대를 등장시킨다. 히스기야, 므낫세 그리고 요시야 등 세 명의 왕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한편 경건치 않은 아들의 경우에 보여 주는 바와 같이(18:10~13), 불의한 사람은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파인버그는 불의한 사람은 “그의 경건한 아버지가 금했던 모든 것들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잘 특징지어진다.
“중대한 질문은 이 사람이 아버지의 경건한 삶의 공적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가 살 수 있을까?
에스겔은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공적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경건한 손자의 세 번째 예(18:14~18) 는 또 다른 두 세대 간의 완전한 대조를 보여준다.
여기서 의로운 아들은 자신의 불의한 아버지와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즉, 에스겔의 예화에 함축된 논리는 삼, 사대에 이른다는 하나님의 심판이 절대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히스기야, 므낫세 그리고 요시야의 조상과 후손 사이에 존재하는 영향력은 강력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세대간에 존재하는 일련의 악한 영향력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에스겔서 18장 25절은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비난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력히 책망하신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집단적 원리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 우심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원리를 지지하시며 집단적인 심판의 원리를 거부 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로 우심을 옹호하신다.
출애굽기 20장 5절의 해석과 관련된 세 가지 중요한 논점
1. 출애굽기 20장 5절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증오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함으로써 하나님의 저주를 촉발시키는 책임이 개인적인 죄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 조상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들 조상의 악한 모습을 따르는 그들(후손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신다.
2.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후손들에게 미치는 악하고 강력한 영향력이나 효력 또는 파괴적인 결과를 의미
3. 출애굽기 20장 5절은 에스겔서 18장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두 말씀은 얼핏 상반된 주장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 다른 구절들을 조화시킬 때 저명한 성경 학자들은 죄의 책임과 죄의 결과 (혹은 영향)를 구분 짓는다.
출애굽기 20장 5절은 조상들의 죄가 후손들에게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에스겔서 18장은 후손들이 조상들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말씀을 한다.
*달리 말해, 출애굽기 20장 5절은 조상들의 죄가 후손들에게 미치는 결과나 영향을 말씀한 것이고 에스겔서 18장은 후손들이 조상들의 죄의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노먼 가이슬러는 공저자 토마스 하위와 함께 쓴
<성경의 난해한 문제들 (When Critics Ask)>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에스겔은 아들들에게 결코 전가되지 않는 아버지의 죄의 책임)guilt of the father’s sin)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는 자녀들에게 전가되는 죄의 결과를 말하고 있다. 불행히도 아버지가 술 주정꾼이라면 그 자녀들은 아동학대나 가난으로 고통 당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임산부가 마약으로 인한 AIDS 환자라면 아기도 AIDS환자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죄 없는 아이들이 부모의 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 게다가 출애굽기 구절은 도덕적인 죄 (moral guilt)가 자녀들에게 다소나마 미쳐지는 것은 자녀들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임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를 미워하는 자들의 죄를 갚으실 뿐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출애굽기 20장 5절)
신명기 28장의 저주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 가능한가?
가계저주론 자인 데렉 프린스는 “축복이냐 저주냐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책에서 저주를 알리는 7가지 징후를 1.정신적이며 정서적인 쇠약, 2.반복되며 고질적인 질병들(특히 유전되는 병), 3.임신 불능, 유산하는 경항과 그에 관련된 여성들만이 갖는 문제들, 4.결혼의 와해와 가족간의 알력과 반목, 5.지속되는 재정적 부족, 6.사고가 빈번한 것, 7.자살에 관한 내력 및 비자연적이며 때 아닌 죽음 등을 포함한다.
데렉 프린스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당신 위에 임할 수 있는 모든 저주를 지시고 저주가 되심으로 당신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might be released)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과 다른 것은 단지 위치상의 문제이며, 실제로는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숙명론적인 저주로 가득찬 동일한 삶을 살고 있다고 가르치는 프린스의 해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언뜻 들으면 맞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면 성경과 대치된다.
갈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Christ redeemed us from the curse of the law by becoming a curse for us, for it is written: "Cursed is everyone who is hung on a tree."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과거에 이미 속량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눈에 나타나는 현상은 프린스의 주장이 맞는 것처럼 보이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저주가 아닌 조상들의 죄의 영향과 죄의 결과가 자손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죄의 결과에 대한 대처
그렇다면 이러한 조상들의 죄의 영향과 죄의 결과가 자손들에게 나타날 때 가만히 앉아서 “이건 운명이니까 어쩔 수 없어”하고 탄식하며 당하기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도 찾아오는 조상들의 죄의 결과와 영향력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과연 그 죄의 결과며 죄의 영향력의 실체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 안 믿던 아버지가 암으로 죽었는데 예수 믿는 자녀들이 암에 걸리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버지가 암으로 죽었으니 자식들도 죄의 영향력을 어찌 할 수 없다고 속수무책으로 손 놓고 있을 것인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물론 우리는 이것을 가계에 흐르는 질병의 저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것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온갖 종류의 악령들과 귀신들은 속이는 자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온 존재(요10:10) 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면 안 된다. 그들은 예수 믿기 전에 믿는 자 속에 들어와 여전히 나가지 않고 도사리고 있는 존재이거나 믿은 후에도 귀신에게 틈 탈 문을 열어주어 악령들이 슬며시 들어와 자리잡고 틀어 앉아 나가지 않고 믿는 자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계에 나타나는 저주스런 현상들은 결코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아니라, 어느 가계에 자리잡고 있던 귀신들이 머무를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그들을 대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쫓겨 가지 않고 당당하게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 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에 원래 거주하던 가나안 7족속들이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기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나가지 않고 버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지만 이스라엘 족속은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몰아내야만 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만히 있어도 그 땅을 차지하도록 계획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저들의 무기 삼아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하도록 하시는 것이었다.
민33: 55-56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그렇다! 그들을 쫓아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몫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미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 땅 거민을 쫓아내지 않아 그들로부터 당하는 눈의 가시와 옆구리를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령들과 귀신들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7족속을 쫓아내지 않아 당했던 그와 동일한 고통을 당해야만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군사로써 마땅히 해야 할 책무를 게을리 한 데 대한 하나님의 징계요 채찍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은 당신의 전권으로 끌어내 주셨다. 그러나 가나안 땅 만큼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싸워서 가나안 7족속 원주민을 몰아내고 쟁취하도록 계획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실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싸우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마찬가지이다.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세상(애굽) 율법의 저주와 속박으로부터는 당신께서 구원해 주셨지만,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아브라함의 축복은 당신께서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삶의 터전에 도사리고 있는 악령들과 싸워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천국은 침로하는 자의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갈 3:14에, He redeemed us in order that the blessing given to Abraham might come to the Gentiles through Christ Jesus, so that by faith we might receive the promise of the Spirit. (Might는 불확실한 미래다. 100% 보장된 것이 아니라 50%-60%의 가능성만을 의미하는 단어다). 천국의 보상은 침로하는 만큼 차지하게 되어있다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믿는 우리들도 우리 안에 내주하던 악령들과 귀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과 싸워서 우리 안에서 내어 좆아야 할 책임이 우리 믿는 자들 각자에게 있는 것이다. 천국은 침로하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 믿는다고 가만히 있어도 천국이 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을 심히 誤解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말씀하셨다. (히 11:6)
우리가 예수를 영접할 때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큰 믿음을 칭찬하셨다. 수로보게니아 여인의 믿음도 크다고 칭찬하셨다. 하나님이 나눠주신 것이라면 칭찬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다. (요 6:29)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예수님은 수 없이 믿음이 약한 자들과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요단강을 갈랐고 여리고 성을 물리쳤다. 그리고 이스라엘 각 지파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가나안 7족속을 각각 물리치고 싸워서 승리한 만큼 가나안 영토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였다. 갈렙은 믿음으로 아낙자손을 제압하였고 큰 산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각 지파들은 저들이 믿음을 발휘한 만큼 가나안 땅의 크기는 커졌다. 보라! 유대 지파는 얼마나 큰 땅을, 베냐민 지파와 단 지파는 얼마나 작은 땅을 차지하였는지를!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로 영적인 군사로 부름 받았다. 군사의 임무는 아군을 괴롭히는 적군과 전쟁을 치르고 적군을 소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출 6:26),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출 7:4),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7)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 12:41)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칭하셨을까?
구약의 육적 이스라엘만 여호와의 군대라 칭함 받은 것이 아니다.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군사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딤후 2:3-4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보라 군사의 사명을 무엇이라 하는가?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분을 믿고 의지함으로 당신의 영적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고 적군을 향해 무한 질주 하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우리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군은 다름아닌 악의 영들이라고 밝히 말하고 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싸우지 않은 군인이 어찌 땅을 차지할 수 있으리요? 마찬가지로 기도로 영적전쟁으로 침로하지 않는 자가 어찌 천국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전쟁으로 싸워서 승리를 얻은 것 만큼 저들의 기업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 천국의 보물 창고를 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천국을 얼마 마큼 차지하는가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주님을 원망하면 안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열쇠 뿐만 아니라 하늘과 당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고 이땅에 보내신 것같이 예수님도 우리에게 하늘과 당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18-19)
우리에게는 예수이름을 사용할 권세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 바라는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이 땅에서도 누리는 곳이다. 내적 치유는 치유의 한 부분이다. 육적 질병의 치유는 의사가 담당하고 영적 질병의 치료는 목사가 주로 담당한다. 내적 치유는 누가 담당하는가?
'저주는 없어야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많은 조상의 죄를 내가 회개한다고 해결할 수 있나? (0) | 2015.10.28 |
---|---|
저주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성경 말씀 (0) | 2013.01.26 |
축복을 위한 믿음 - 케네스 해긴(믿음의 계단 (0) | 2011.07.12 |
저주가 아니라 죄를 다루어야한다 (0) | 2011.05.14 |
믿음으로 말함으로 율법의 저주를 물리치기 (케네스 해긴) (0) | 2010.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