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

[스크랩] Re:불신자를 위한 기도문

하늘감동 2013. 7. 31. 10:46

변승우 목사님 설교원고로 기도문을 대신 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보고 나서 여기 나온대로 매일 기도합니다. 가족과 친척들의 구원에 대한 응답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꾸준히 기도해보세요~

 

 

 

불신자를 위한 영적 전쟁
고린도후서4:3-4
아마 여러분은 브리스톨의 조지 뮬러에 대해 한두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조지 뮬러는 믿음과 기도의 사람입니다. 아울러 그는 끈덕진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인내는 다음과 같은 그의 글을 통해서 확증됩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응답이 올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63년 8개월을 기도해 오고 있다.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지만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도 기도하고 있다. "
뮬러가 63년 8개월 동안 기도해왔던 그 친구는 그가 죽기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뮬러의 관이 땅속에 묻힌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딕 이스트만은 "쉬운 길은 없다"라는 그의 책에서 조지 뮬러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뮬러의 성공은 다음과 같은 힘있는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한번 따라 합시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신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꼭 필요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와 친구와 이웃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기 위해 매양 63년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물론 뮬러도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대상자 중 상당수가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며, 더욱이 우리들 대부분은 뮬러와는 달리도 그렇게 오래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열성을 가지고 기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보다 빠른 응답을 가져올 수 있는 보다 효력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불신 영혼의 구원을 위한 보다 더 효과적인 기도가 있을까요? 정말로 감사하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롬8:26)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에도 꼭 맞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에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냥 "하나님, 제발 아무개를 구원해 주세요" 하는 교과서적인 기도만을 끝없이 되풀이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10년, 20년 똑같은 기도를 되풀이하는 동안,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채 죽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불신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보다 효과적인 것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불신부모나 형제, 혹은 자녀를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굳 뉴스가 될 이 귀중한 진리를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님께서 여러분이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영혼 위에 임하셔서 그에게 머무르시며 그를 품어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1-2)
천지 창조 때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운행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운행하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라하프'는 문자적으로 "알을 품다, 내려 덮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확대번역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운행하시고, 공중에 머물러 계시고, 내려 덮고 계시니라"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새미국표준성경에서는 난하주에 "공중에 머물러 계시고"라고 썼습니다. 따라서 '라하프'는 어떤 것 위에 머물러 있거나 내려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보건대 창세기 1장 2절에서 성령님은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태초에 온 세상을 품고 계시면서 모든 생명과 피조물들을 낳고 계셨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90편 2절에서 이것을 확증하면서 실제로 창조 시에 성령께서 하신 일이 출산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씀에서 시편 저자는 중요한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인 '얄라드'와 '후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산이 생기기(태어나기, 얄라드)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출산하시기, 후울)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비록 이 구절에서는 그렇게 번역되지 않았지만 이 단어들은 본래 산고를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두 단어는 각각 구약에서 "생기게 하다", "태어나다", "출산하다", "구로하다" 등(신32:18, 욥15:7, 39:1)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이들 개념은 모두 뭔가를 출산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 두 단어는 이사야 66장 8절에서도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온은 구로하는(후울)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얄라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을 자신의 자녀라고 부른 것은 그가 해산의 수고를 통해 그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다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갈라디아인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이미 그들의 구원(거듭남)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단순히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로써 구로함으로써 그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 잘 나타나듯이 "해산하는 수고"는 영혼 구원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사야 66장 8절에 사용된 '후울'과 '얄라드'라는 단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땅과 하늘을 "낳으셨을 때" 혹은 "출산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영적 자녀들을 낳는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사람들 주변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시어 죄를 깨닫게 하고 속박을 깨트리고 비밀을 드러내시고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오셔서 그들 안에 중생, 혹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을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해 출산하기를 원하십니다.
현재 위싱턴주의 메이플 밸리에 사는 말레나 오헌이라는 여자 성도님은 남동생 케빈의 구원을 위해 12년간 기도를 계속 했습니다. 그녀는 성경에 입각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가끔씩 좌절하기도 하고, 동생에게 믿음을 강요하려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시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초, 그녀는 불신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남동생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들이 기도한 내용 중에는 "성령께서 그의 주변에 머물러 계시도록" 간구하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케빈은 약 2주 후 거듭났으며, 지금은 주님을 아주 잘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낳고자 하십니다. 다만, 이번에는 우리의 중보를 통해서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령께서 사람들 주위에 머물러 계셔서 그들 안에 영적 생명을 출산하실 수 있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더구나 성령께서 불신자의 영혼 위에 머물러 계셔서 그들 안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달라고 구하는 직접적인 기도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고 그들을 덮어주셔서 영적 생명을 출산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도를 개인을 상대로 할 뿐 아니라 더욱 확장시켜야 합니다. 성령께서 알을 품으시듯이 덮으시는 일은 개인을 상대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때로 그러한 덮으심은 교회 전체에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한 지역 전체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수많은 고전적인 부흥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집회장소와 그 지역전체에 강력하게 임하시고 역사하고 계셔서 교회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회개하게 되거나 심지어 부흥이 진행중인 지역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바로 신자들의 지속적이고 충분한 중보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그 지역 전체를 덮고 계셨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때문에 저는 기도할 때마다 개인을 위해 이 기도를 할 뿐 아니라 현대문화아파트 101동과 201동을 성령께서 덮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삼산 지역을 성령께서 덮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심지어 이런 일은 한 국가를 대상으로 확장될 수도 있습니다. 한 개인이나 교회 혹은 지역 뿐 아니라 한 나라 전체를 성령께서 덮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성령께서는 온 하늘을 덮으셨습니다. 지구 전체를 한꺼번에 품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나라 전체를 품지 못하시겠습니까? 단, 이런 일은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충분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개인이나 교회 혹은 지역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나라와 또는 다른 나라들을 위하여 충분한 중보기도를 할 때, 그때 우리는 이사야 66장 7-8절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여러분, 이 얼마나 엄청난 예언입니까? 지구상의 기독교인들이 기도의 폭을 넓혀 나라오 나라들을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할 때 성령이 한 나라 전체를 심지어는 여러 나라들을 뒤덮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현재 주의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중보기도를 통해 능력을 나타내시어 여러 도시들 뿐 아니라 여러 나라 전체를 뒤덮어 품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덮어 품으시는 능력이 지속적으로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 더욱 강력해질 때 우리는 드라마틱한 부흥을 보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께서 전도대상자의 영혼을, 큰믿음교회를, 울산광역시를, 대한민국을 품어 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품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2. 여러분이 구원받기 원하는 영혼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영적 가림을 제거하십시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에 관한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아버지께 무언가를 행하시도록 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에서 이 점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영혼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뿐 아니라 마귀에게 무엇인가를 행해야만 합니다. 즉 마귀에게 영적 권세를 행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마귀에게 영적 권세를 행사해야만 할까요? 그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참고"(고후4:3-4)
여기서 '베일'이란 말은 "숨기다, 감추다, 둘러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일에 반대어는 계시인데, 계시를 뜻하는 신약의 단어는 '아포칼룹시스'로서 문자적으로 "베일을 벗기는 것, 뚜껑을 벗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빛을 명확하게 볼 수 없게 하는 베일, 혹은 덮개가 그들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베일을 벗기는 것, 곧 계시가 필요합니다.
피터 와그너박사는 "교회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일들 중의 하나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많은 것들을 이해한다면 그 누구도 제정신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점들 중의 하나는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또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탄의 주된 임무는 복음에 베일을 덮어서 불신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피터 와그너 박사는 "기도의 배수진을 치라"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에 관해 좀더 자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사단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그들을 포로로 잡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치 못할 뿐이다.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 대하여,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 그 참된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고 무조건 불평만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에게 불빛이 비추일 때 어두움보다는 빛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빛을 볼 수가 없다... 나는 이 원리를 강조하고 싶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우리가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따르면, 그것은 사단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그들을 대신하여서 영적 전투를 벌임으로써 그 '마음의 혼미'를 제거해 주고 포로된 자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일이다."
바울은 본문 4절에서 "참고"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혼미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튀플로센'은 '눈을 멀게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혼미케 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 즉 영적인 눈을 멀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탄에 의해 불신자들은 하나같이 영적인 소경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합니다."(4) 그들은 우리가 보는 것과 똑같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게 된다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필요한 존재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의 승패는 마귀가 멀게 한 불신자들의 영적인 눈을 뜨이게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될 사도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26:16-18)
이와 같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려면 사탄이 멀게 한 눈이 다시 뜨여지는 것 즉 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에 관해 더치 쉬츠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오늘날 지식은 많으나 계시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계시가 성경을 '영이요 생명'이 되게 한다(요6:63). 계시가 성경에 생명을 부여한다... 성경적인 믿음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계시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단지 '나를 위한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가?'라고 항상 의문을 제기하는, 타락하고 이기적이며 인본주의적 이성에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지혜와 지성만을 통해 이런 사고방식에 의존하게 될 때 우리는 흔히 인본주의적인 복음('그들을 위한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을 전파하게 되고, 기껏해야 인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회심자들만을 낳게 될 뿐이다.
반면에, 우리가 회개를 비롯하여 자기생명의 포기(그리스도의 주권)와 같은 순수한 복음을 전한다면, 불신자들은 성경적인 계시를 얻지 못할 경우 틀림없이 그것을 거절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그들에게 얼토당토않은 것이거나 어리석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이와 같이 자연인은 순수한 복음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은 멀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한다고 사람들이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멀게 만든 불신자들의 영적인 눈이 뜨여져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회개와 자기부인과 주권의 양도를 요구하는 성경적인 복음에 기꺼이 반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 아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실 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으며, 귀신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엡2:5, 눅10:19). 따라서 우리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를 자각하고 믿음으로 명령하면 마귀는 우리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귀를 향하여 영적 권세를 행사하는 것을 우리는 "영적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영적 전쟁의 기초를 놓은 사람 중의 하나인 존경할만한 프랭크 해먼드 목사님은 영적 전쟁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 전쟁은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기도에 더하여 또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또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귀신을 대적할 수 있는 권세와 권능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타나시어 귀신을 쫓아내실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탄을 물리치시고, 우리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진리는 많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의 계시이며 좋은 소식이다. 수많은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할 것 같이 보이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제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달라고 하늘에 대고 소리 지르는 것을 그만 멈추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와 권능을 사용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는 또 이런 통찰력 있는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영적 전쟁을 치르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쟁은 귀신의 권능을 결박하는 반면 그 사람의 의지를 자유롭게 풀어주어 귀신들의 간섭 없이 의사를 결정하게 함을 의미한다. 이 때 귀신들은 그 사람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고, 잠시 그 권능을 결박당한 것이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지은 "믿는 자의 권세"라는 책입니다. 아직 안 읽어보신 분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그 눈이 뜨여지지 않는 한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마귀가 어둡게 한 그 눈을 뜨게 하는 일은 먼저 믿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 일을 어떻게 수행할까요? 먼저 주의할 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성을 가지고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혁신적인 기술이나 방법만 가지고서도 되지 않습니다. 또한 확실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사람들을 귀찮게 굴어도, 그들에게 쪽지를 전해주어도, 혹은 "언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할거냐?"와 같은 협박조로 그들을 꾸짖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특별히 그들이 우리에게서 압박감을 느낀다면, 우리는 대개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럴 경우 그들 안에 있는 교만의 뿌리가 '난 어느 누구도 나를 통제하거나 나에게 지시하기를 원치 않아'라고 외치며 일어나 스스로를 방어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적인 수준에서 그들의 이런 교만을 공격한다면, 그 교만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결과만 낳을 뿐입니다. 더치 쉬츠가 잘 말한 것처럼 "우리의 태도가 부정적일 때 복음 전도는 어렵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냥 불신자들의 불신앙과 고집과 교만에 우리가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눈웃음이나 치고 끝없이 그들의 비유를 맞추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불신자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이 더욱 닫히도록 할뿐입니다. 우리는 온유해야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할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온유할 뿐 아니라 여기에 덧붙여 반드시 해야만 할 그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에베소서 6장 12절 말씀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적은 사람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는 그가 비록 불신자요, 완고한 자라도 사랑과 온유로 우호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에 대해서는 단호한 자세를 취하여야 하며 그와 씨름하고 그를 제압해야 합니다.
몇 해전 한 부인이 언니와 형부를 위해 기도한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매우 반기독교적이었으며, 동생부부를 조롱하고 영적으로는 그들에게 가장 심한 핍박자들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들을 위해 20년 동안이나 기도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부인은 이런 고백을 했는데, 우리에게 매우 교훈적입니다.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그들의 태도 때문에 전 그들에게 냉담한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교적으로 교만해져서 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잘못된 동기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인은 중보기도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 부인의 소망은 새로워졌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그 부인의 마음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어느 때에 너는 너의 가족을 위해 올바른 중보기도를 하려느냐?"
이로 인해 비로소 그 부인은 자신의 태도를 회개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였고, 언니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용서하였습니다. 그후 그 부인은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로 기도했는데, 특별히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에서 베일이 벗겨질 것"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또한 한 쪽이 다른 쪽을 핍박하지 않도록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몇 달 후 그 부인은 언니와 통화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때 다음과 같은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즉, 그날 아침 일찍 형부가 잠에서 깨어나 교회에 가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번도 교회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작은 교회를 찾아갔으며, 강단 앞으로 초청하는 시간에 두 사람 모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후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간증을 하나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프랭크 해먼드 목사님이 지은 "안방 속의 돼지떼"라는 책에 보면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남편이 줄곧 예수님을 믿는 일을 반대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남편은 몹시 화를 냈습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을 뿐 아니라 도박에도 미쳐 있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욕을 잘하고 난폭해서, 그녀와 아이들은 항상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세 자녀는 그런 남편의 영향으로 인해 겁이 많고, 불안정하며, 항상 움츠러들고, 신경질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좋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남편과 이혼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프랭크 해몬드 목사님을 찾아 왔을 때, 목사님은 그녀의 동의를 얻고서 남편의 삶을 지배하고 영적인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귀신들에 대항하여 영적 전쟁을 시작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해몬드 목사님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귀신들아.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위압하는 권세를 갖노라. 너희들은 이 가정을 파괴하려고 하지만,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허용치 않겠다. 우리들은 영적 권세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권리를 알고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결박한다. 그의 생명에서 손을 떼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의 의지를 풀어주어라."
그러자 놀랍게도 몇 주일 후, 그 부인의 남편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탄생과 함께 성령 세례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이 중에 혹시 사랑하는 부모나 남편이나 자녀 혹은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어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심지어 절망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 아무개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만 되풀이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그의 눈을 가리우고 있는 베일은 사라질지어다. 그의 영적인 눈은 뜨여질지어다. 그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악한 영은 예수의 이름으로 묶임을 받고 떠나갈지어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영적인 권세를 사용하십시오. 그래서 악한 영의 세력을 깨뜨리고 그들의 의지를 풀어놓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속한 시일 내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영혼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저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여러분께 드리고자 합니다. 더치 쉬츠는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라는 그의 추천할 만한 책에서 핵심을 찌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진정한 계시 즉 베일이 벗겨지는 것 없이 영접기도를 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영접은 하지만 대개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구원받은 사람들 중 10% 이하-내가 들은 바로는 그 수치가 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진정한 성경적 회개가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성경의 계시가 열릴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다."
여러분, 복음의 광채를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겨지게 해달라고 드리는 기도, 영적인 눈이 뜨여지고 그 영혼을 혼미케하는 악한 영을 결박하는 기도는 교회밖에 있는 불신자들을 위해서만 필요한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 눈에 베일이 가려진 상태로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지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지만 진지하지 않고 마치 꿈꾸는 사람들 같이 보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들이 마치 꿈에 본 형상을 잠이 깨는 즉시 잊어버리거나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받은 인상과 깨달은 진리를 쉽게 무시하고 잊어버립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말씀을 듣지만 그리고 말씀을 머리로 이해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그들의 심령을 파고들지 못하며, 그 결과 그들의 신앙 형태와 생활은 거의 혹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의 마음 눈에 마귀가 씌워놓은 베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단 이런 사람들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닌지 오래 되었지만 십일조 생활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어떻게 아까워서 저렇게 십일조를 할 수 있나?' 하고 내심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는 그 이유가 그들의 눈에 베일이 씌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 복음의 광채를 볼 수 없게 만드는 베일이 가리워져 있는 것처럼,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는 십일조의 축복을 볼 수 없게 만드는 베일이 가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베일이 걷히고 사람들이 복음의 광채를 분명히 보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베일이 걷히고 십일조의 축복을 볼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십일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며 감히 십일조를 떼어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꼭 구원이나 십일조뿐이 아닙니다. 신앙의 여러 가지 의무 중 어떤 특정의무에 사람들이 불성실한 것은 거기에 관계된 진리를 사실 그대로 보고 느끼게 만드는 것을 장애하는 베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의 영혼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형식적인 신자, 그리고 십일조를 위시하여 어떤 분야든 신자의 의무를 등한히 하는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눈이 뜨여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제 말을 듣고 혹 어떤 분은 불신자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본문에 의거해 볼 때 성경적이지만 과연 이것을 그렇게까지 확장할 수 있는 것이냐? 하는 의문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한 말씀 소개해 드리지요.
"참고"(엡1:17-19)
이와 같이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마음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뜨여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불신자나 교회 안에 있는 형식적인 신자에게만 필요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신자에게 필요한 기도입니다.

3. 여러분이 구원받기 원하는 영혼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견고한 진들을 파괴하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위해 단순히 하나님께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품어 주시므로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그들의 영적인 눈을 베일로 가리워서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악한 영들을 묶고 제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3-5)
이 말씀을 리빙 바이블(The Living Bible)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보통의 연약한 인간이지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인간의 계획과 인간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마귀의 견고한 진을 허물기 위해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를 사용한다. 이 무기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교만한 주장과 인간으로 하여금 그분을 찾을 수 없도록 쌓아 올려진 모든 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다. 이 무기들을 가지고 나는 반역자들을 사로잡아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보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여 "견고한 진"을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허물어야할 견고한 진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견고한 진"은 "소유하다, 또는 붙잡다"라는 뜻의 어근 '에코'에서 나온 '오쿠로마'라는 단어입니다. "견고한 진" 또는 "요새"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어떤 것을 "강하게 붙잡을"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 단어는 성채, 성곽, 혹은 감옥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본질적으로 사단은 불신자들을 굳게 잡을 수 있는 견고한 지점을 그들 내부에 가지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사단의 죄수들이며, 포로들인 동시에 노예들입니다. 그리스도는 "포로된 자들에게 놓임을 전파하기 위해"(눅4:18)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말하건대, 현재 그분의 선포는 교회의 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 내부에 있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해방하는 일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고 견고한 진이 지금 제가 다루고자 하는 개인적인 진들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견고한 진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게리 키너맨은 그의 책 "어둠의 세력을 극복하라"에서 견고한 진의 세 가지 형태를 훌륭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지역적 견고한 진. 이것은 어떤 국가나 사회, 심지어 어떤 가족들을 조종하거나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사단 자신으로부터 전략적으로 임무를 부여받은 어두움의 세력의 위계제도를 말합니다. 어떤 사악한 세력이, 각기 다른 지역에 특수한 종류의 악의 구조를 강화해 놓고 있습니다. 어떤 도시는 우상숭배, 어떤 곳은 관능적인 죄, 또 어떤 곳은 특수한 종류의 종교의 영이 그 지역의 견고한 진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사상적 견고한 진. 이 영역은 어떤 문화나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철학을 통해서 그곳에 속한 사람들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신론에 근거한 레닌의 공산주의 이론이나, 성경적인 창조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견고한 진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셋째, 개인적 견고한 진. 이것은 사단이 당신의 개인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으로 개인적인 죄, 생각, 느낌, 또는 태도나 생활방식입니다.
이와 같이 '개인적 견고한 진'은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 하나님을 믿게 하는데 장애가 되는 죄, 생각, 느낌, 또는 태도나 생활 방식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견고한 진들을 중보기도를 통해 파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혼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가지 실예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앞에서도 한 번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워싱턴 메이플 밸리 출신의 말레나 오헌은 남동생 케빈의 구원을 위해 12년동안 기도해 왔으나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주님, 동생의 삶 속에 들어오소서" 혹은 "주님 동생에게 당신을 나타내소서"와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처럼 그녀는 좀 더 구체적인 성경적 기도의 방법이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때로 좌절한 나머지, 자신의 손으로 그 일을 이루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너의 삶을 드려야 해" 또는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들을 당장 그만 두어야 해" 등과 같은 말을 하곤 했습니다. 예상대로 이런 말들로 인해 그녀는 케빈 안에서 교만과 반역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때 제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느끼곤 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말레나는 "동생은 마약, 우울증, 그리고 극단적인 분노 등의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1995년 초, 그녀는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의 원리를 가르치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말레나는 그 원리들을 남편 패트릭과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원리대로 남동생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도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를 덮고 있는 베일을 거두어 주시도록
- 성령께서 그의 위에 머물러 계셔 그를 지켜 주시도록
- 경건한 사람들이 매일 그가 가는 길에 있도록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지는 그 어떤 것도 벗어버리도록
- 드러난 모든 견고한 진들, 즉 그의 사고방식, 종교에 관한 견해, 물질주의, 두려움 등을 무너뜨리도록
- 케빈을 포로로 잡지 못하도록 사단을 결박하고, 사단이 케빈의 생각 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모든 사악한 생각들과 거짓말들을 묶도록
-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그에게 덧씌워지도록
이런 식으로 기도한 지 2주 후쯤 되었습니다. 케빈은 마약을 과다 복용하였고,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로 인한 결과를 말레나는 이렇게 흥분해서 간증합니다. "주님은 그를 생생하게 만나 주셨습니다. 베일이 확실하게 걷혔고, 그는 하나님의 계시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혼돈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케빈은 예전의 친구들과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더욱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선교사역까지 고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개인적 견고한 진은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 하나님을 믿게 하는데 장애가 되는 "죄, 생각, 느낌, 또는 태도나 생활 방식"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이나 도박 혹은 다른 죄에 빠져 있어서 예수를 믿을 엄두를 못 냅니다. 그런 죄 중 어떤 죄들은 피터 와그너가 잘 지적한대로 "후세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죄를 짓도록 만드는 불법이나 연약성을 야기하는 조상의 죄로부터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자기는 결코 변화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즉 절망감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여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 아주 좋지 못한 반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이나 어떤 취미에 깊이 빠져있어 신앙 생활을 위해 시간을 낼 엄두를 못 냅니다. 어떤 사람은 특정 종교에 연루되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교회를 나올 듯 나올 듯 하면서도 너무 결단력이 없고 우유부단하거나 주위 친구들의 꼬드김에 의해 그들의 계획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사단이 그 영혼을 꽉 잡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견고한 진들입니다. 이러한 견고한 진들이 무너지도록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와 간구와 병행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권세를 사용하여 여리고 성처럼 그 진들이 무너지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머잖아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믿는 자의 권세"라는 그의 뛰어난 책에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해긴 목사님은 여러 해 동안 형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그의 형은 소위 그 가정의 '검은 양'이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 그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금식까지 했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계속 기도했지만 형은 그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악해져만 가는 듯이 보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형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심령 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무엇인가를 하라!"
예수님께서 그에게 형의 구원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하라고 명하신 후 그는 "예수 이름으로 나의 형님에게 역사하는 마귀의 권능을 깨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그의 구원을 요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계속 말을 하거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명령을 했습니다. 왕은 명령만 내리면 그 명령이 수행될 것을 압니다. 마치 이와 같이 그는 마귀가 그의 형은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그에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형이 구원될 것을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가 구원받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가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예수 이름을 가졌고, 또 그 사람을 지배하여 역사하는 권능을 파괴하였고, 그의 구출과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휘바람을 불면서 자기의 할 일만 했습니다. 그러자 열흘도 안 되어서 그의 형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우리도 때로는 이와 같은 신속한 기도 응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기도 응답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왜 시간이 필요할까요? 바꾸어 말해서 왜 우리는 인내하면서 기도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을 움직이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렘33:2). 즉 기고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도의 또 다른 국면이 있습니다. 즉 기도는 그 자체가 역사합니다. 그 증거로 야고보서 5장 16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우헤스트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할 때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의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히 의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의인의 기도는 그 기도가 역사할 때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확대번역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간절한(진심에서 우러난, 지속적인) 기도는 엄청난 능력을 이끌어낸다(역동적으로 역사하면서)."
이러한 번역은 우리에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역사하게 함은 물론이요, 기도 그 자체에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가 있다면, 역사하는 기도의 힘이 없는 기도도 있고 또 역사하는 힘이 있기는 있으나 적은 기도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돌멩이를 드는 것과 바위를 드는 데 요구되는 힘이 다르듯이, 각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 그들의 구원에 요구되는 힘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도가 응답되려면 반드시 그 일에 필요한 만큼의 영적 능력이 기도를 통해 모여져서 그 양이 차야 합니다.
성경은 실제로 우리가 기도할 때 단번의 기도에 의해 그것이 응답되고 못 되고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제목의 기도라도 그 기도가 쌓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계8:3-5)
이 구절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기에 합당한 때나, 혹은 그 일을 행하기에 충분한 기도가 쌓여졌을 때, 그분의 능력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분은 대접을 가져다가 그것을 제단에서 나오는 불과 합하십니다. 이 불은 시내 산에 떨어진 바로 그 불이며, 엘리야가 부르짖을 때 갈멜산에 떨어진 바로 그 불이며, 오순절에 임한 바로 그 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의 대접이 찰 때 우리의 기도와 그 불을 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은 그것을 땅에 쏟으십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가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할 때 인내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더치 쉬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쩌다 하는 기도나 가끔씩 생각날 때 하는 기도로 기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능력을 뿜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당신은 시종일관 계속해서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뿜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되 계속 기도하십시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는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의 잔은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응답의 그 날을 바라보며 확신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이 설교를 끝내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려야겠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자 하는 말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마귀의 영들에 대하여는 권세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동류인 인간과 그들의 의지에 대하여서는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마귀에 대하여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서는 권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권세를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자유행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신자의 마음을 미혹하여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악한 영들의 세력을 묶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영혼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악한 영의 세력을 결박하면 그 사람은 복음진리를 제대로 직시하고 예수님을 똑바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영적 전쟁의 결과만으로도 구원받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 박사가 잘 지적한대로 영적 전쟁은 개인 전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 전쟁을 통해 사탄과 직면할 뿐 아니라 반드시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며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주고 그들을 온유하게 설득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용기를 내서 자꾸 사람들을 찾아가십시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러면 항상은 아닐지라도 꽤 자주 우리는 성령께서 그들을 먼저 심방하여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 놓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죄와 마귀와 지옥에서 구원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출처 : 큰믿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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