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자녀의 초자연적인 삶
크리스 밸러턴 & 빌존슨 [요약]
거지근성은 열등한 신(god)의 자녀에게 속한 의식구조이다. 그것은 아직 자유를 얻지 못한 노예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세례의 강물 건너편에서 이미 얻은 자유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과 학대의 왕자에 의해 사로잡혀있는 사람의 속성이다. 거지근성을 지닌 사람은 마귀가 주는 착각에 의해, 여전히 자신의 삶을 가난과 고통 그리고 우울함 속에 가두어 둔다.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영원히 감추려고 한다.
제 1부. 왕의 자녀로의 부르심 (Our Royal Call)
Chapter 1. 거지근성의 위험 (The Plight of Pauperhood)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 된 것과… (잠 30:21-22a)” 세상은 종이 임금이 되는 것을 감당치 못한다. 종은 천하게 태어난다. 그리고 자라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인가를 알게 되며,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배우게 된다. 따라서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주변 사람들에게 중요한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통치 안에 있는 왕국에 거하면서도 자신을 여전히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전혀 조심하지 않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그가 이끌고 나가야 할 자신의 사람들을 파괴시켜 버리고 만다.
주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을 왕자와 공주로 생각하고 처신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왕의 아들들이요 딸들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태어났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나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노예근성을 지니지 않고 오히려 왕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면이 노예의식으로 물든 지도자는 외적으로 노예에 처한 이들을 결코 자유케 할 수가 없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늘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는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자신감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모세는 히브리 동족을 구하려고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동족을 구하기 위해 처음 시도했던 노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근성으로 말미암아 좌초하고 말았다. 동족들의 노예근성으로는 모세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세는 그들도 자기와 똑같이 취급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모세 스스로가 착각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책은 주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노예근성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자녀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그 부르심대로 생각하며 행동할 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것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모두 왕의 신분으로 부름 받았다. 그래서 영향을 미치고 다스리고 지배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는 선두주자로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Chapter 2. 성 안의 방랑자인가 아니면 궁궐의 왕자인가
(Castle Tramps or Palace Prince)
어린 나이에 버려짐과 학대를 경험한 사람들, 특히 ‘잘못’ 태어난 것처럼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라는 사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 강력한 메시지가 되어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파고든다. 이러한 거짓말들의 결과로, 우리는 사악한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특별한 행동 양식을 나름대로 개발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의 근본 뿌리가 공격을 당하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이라도 고통을 제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단순히 생존하기 위하여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12월의 어느 날, 3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고나서 여러 날 후, 기부자를 알게 되어 고맙다는 카드를 보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거액의 돈을 기부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그를 거의 완벽할 정도로 피하고 다녔다. 그를 피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 내가 왜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으며 그것이 나를 몹시도 괴롭혔다. 그리고 전에 내게 잘해주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내가 얼마나 그들과의 관계를 파괴해버렸는지가 생각났다.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좋아했지만, 결코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던 나를 알게 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주님께 기도했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의 문제는, 네가 네 자신을 3만 달러를 받기에 합당한 존재라고 인정할 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지금, 그 거액의 기부자가 너를 가까이서 자세히 알게 되기라도 하면 혹시나 너에 대하여 실망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도록 해라. 네가 그렇게 할 때, 너는 사람들이 너를 알게 되면 될수록 너를 더 사랑하기를 기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가치보다 누군가 더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긴다면 우리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사람이 우리를 더 자세히 알게 되어, 그 사람이 생각하는 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과 되도록 멀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할 때이며, 아버지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또 다른 거짓말이 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도록 훈련받고 있다면 당신은 그 현실을 피하기 위한 생존기술들을 개발시킨다. 흔히 거지가 생존기술을 사용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서로 물고 물리는’ 커다란 약육강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가난근성이 거지들의 가장 주요한 속성이다. 재정적인 가난을 겪었든지 아니면 사랑이나 감정적인 면에서 가난을 경험했든지, 모든 거지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은, 그들은 결코 충분한 만족을 누릴 수가 없을 거라는 것이다. 언제나 그들은 우물이 곧 말라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산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어떠한 영역에서도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베푸시는 엄청난 공급하심에 대한 약속들로 가득하다.
가난의 영은 종종 거지들로 하여금 생존본능을 만들도록 한다.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은 거짓말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 거짓말이 부서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그들을 향한 무한한 공급하심을 깨달을 수가 없다. 거지들에게는 가난근성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자원들이 한계가 있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받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몫으로 돌아올 것이 다른 사람에게 갔다고 믿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축복을 받으면 곧 자신들에게 올 축복이 빼앗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 드러나면 우리의 삶에서 가난의 영이 파괴될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볼 때 질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인의 아들과 딸들이며, 우리 아버지는 넉넉히 갖고 계신 분이다! 나는 이 믿음이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미래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뜯어 고칠 것이라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은행잔고 따위)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전을 세우고 그것으로만 살아가려고 할 뿐,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논리를 초월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또한 우리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가 매일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라야 우리는 하늘 창고를 두드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 그분은 나의 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요하심에 따라 공급하는 분이시다.
거지근성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거지는 돈이나 어떤 물건을 얻었을 때 그것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진리는 이것이다.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서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그를 소유하고 있는가에 의해 판단 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집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때때로 집이 사람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왕자들은 절대로 그들의 정체성이 그들의 행위나 소유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왕자는 세상 것들을 소유하지, 절대로 그것에 의해 소유당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염려나 근심 없는 삶을 경험할 수 있으며,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필요가 채워진다.
Chapter 3. 지하 감옥과 옥졸들 (Dungeons and Dragons)
많은 이들이 그들의 전 생애를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대신에, 그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에 반대하는 데 모두 소모해 버린다.
과거는 우리를 길러준 사람들의 속박을 영속시켜 주는 감옥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 속에 있는 파괴적인 문화를 똑같이 재생한다. 과거에 자신을 속박시키는 한 가지 유형은 자신을 학대한 사람들에게 반응하는 것으로, 그들과 같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데에 많은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상담하면서 관찰한 그들에게 있는 공통적인 패턴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된다. 야곱이 라반의 양과 염소를 소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분의 양들인 우리가 어떻게 재생산을 해나가는 지를 볼 수 있다. 물구유는 묵상의 장소, 즉 무언가를 바라봄과 동시에 그것에 관해 생각에 잠기는 장소이다. 묵상은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시킨다. 만약 우리가 되기를 원치 않는 모습에 대한 생각과 마시고 싶지 않은 후회의 우물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채워버린다면, 바로 그와 똑같은 것들을 자신 안에 생산해내게 된다. 무엇을 재생산해내길 원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상상의 물구유에서 생각하고 마실 때에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 가이다. 상상력은 우리의 존재 중에서 굉장히 권능 있는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 자신들에 관해 현재 깨달아가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대부분의 삶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대응하느라 보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무언가가 되지 않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어떤 것이 되지 않으려고 나는 꼭 내 앞에 그것을 두어서 피하려 한다. 더 미치게 만드는 일은 내가 상상하는 그것을 내가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비전에 응답할 것인가. 이 감옥으로부터 우리는 탈출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비전을 묵상함으로써 가능하다. 묵상(meditation)이란 말은 약(medicine)이란 말과 관련이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묵상이란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묵상할 때 그리고 그분의 꿈을 꿀 때에 우리는 그분이 부르신 모습의 사람으로 되어간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꿈꿀 때 우리는 그분의 걸작품이 되어간다.
Chapter 5. 왕궁의 도마뱀 (Lizards in the Palace)
마귀는 우리에게 이름을 준 다음 우리를 무력화시켜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법칙에 따라 우리의 삶을 허비하며 보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이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참소자이다. 종종 마귀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가짜 정체성(이름)을 부여하곤 한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하나의 예언적 선포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믿고 있는가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며, 그런 거짓말들이 결국 그들의 행동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환경에 반응하게 된다. 우리가 들은 말들이 결국 우리의 마음속에 지니게 되는 이름(name)이 되며, 이러한 이름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그리게 되는데, 그것을 통해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몽둥이와 돌멩이는 단지 우리의 뼈를 부러뜨릴 뿐이지만 잘못 붙여진 이름은 우리의 미래를 앗아간다! 나쁜 이름이 사람들을 속박하여 파멸로 이끌 듯이, 훌륭한 이름은 삶에서 능력을 나타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에 맞도록 우리의 삶을 이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억압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름에 따라 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는 세상에 의해 주어졌던 많은 거짓 이름들을 모두 깨뜨려야만 한다.
예언적 선포는 그저 단순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예언의 말은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은혜를 풀어놓기 때문이다. 성경 속의 이름들은 모두 그들의 사명에 대한 예언적 선포로서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며 그들의 부르심에 대한 특성을 풀어놓았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고 나면 우리의 행동이 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이해하는 ‘정체성’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이 주신 이름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이름이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도록 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부르심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할 것이다(계 2:17).
정체성은 교육으로부터 얻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가르쳐서 정체성을 갖게 할 수는 없다. 가장 정확한 정체성은,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이 특별히 우리를 위하여 지정해 놓으신 사람들을 통해 말씀해 주신다. 당신은 인간으로서 행동(human doing)하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란 존재(human being)가 되어야만 한다.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 실패의 또 다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서 그들의 자존감을 얻으려고 한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른 채 엉뚱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행동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표현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가 하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믿음은 영적 세계의 촉매이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의 삶에 들어온다. 우리가 어떤 것을 믿기 위해서는 먼저 믿을만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단지 하나님의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영적 세계가 믿음에 의해 움직인다. 예를 들면,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 잘못된 왕국에 믿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무언가가 잘못될 것이라고 믿을 때 원수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무장해제 시켜 버린 우리의 원수들에게 다시금 힘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성령님께 힘을 주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가져오는 천사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는 것이다.
Chapter 6. 통치훈련 (Training for Reigning)
다윗은 주님으로부터 때가 이르면 솔로몬이 다윗 왕국의 왕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것 때문에 솔로몬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으로 자란 성경 속의 보기 드문 지도자였다(고전 22:8-9). 우리가 솔로몬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 지금도 늦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위대함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모델로 따르며, 우리를 진정한 정체성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가 왕같이 행동하기 시작할 때, 우리 인생에서 산과 같던 문제들은 단지 우리의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 디뎌야 할 디딤돌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솔로몬과 에스더 같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문화를 개발시킬 사명을 부여 받았다. 그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왕으로서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만드는 사명이다. 우리는 사람이 마땅히 행할 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사람들을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살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언사역이야말로 왕국문화를 개발시키는 데 너무나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예언의 말씀이 선포되었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 준 것이다. 예언의 말씀을 통해 리더는 성령을 따라 영혼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도 역시 은사와 달란트, 그리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잠재력을 믿지 않다가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당신 안에 얼마나 많은 좋은 것들이 있는지 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닫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 교회인 우리는 예언사역을 개발하여 사람들의 진정한 목적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이 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하셨던 목적을 하나하나 이루어나가도록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개념이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저의를 깨닫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실 때, 그분은 우리가 그것을 맹종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예언에 대하여 하나님과 상호작용을 하기를 더 원하신다. 하나님이 작정해 놓으신 모든 것을 우리의 현실에 가져오게 하는 은혜는, 때때로 다름 아닌 인생을 변화시키는 한 마디의 예언의 메시지를 통하여 온다. 어떤 면에서는 교회 안에서 왕가의 문화를 개발시키는 것은, 우리 가정에 처음 스며든 문화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왕궁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여 그들의 예언적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지도하기를 원하신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예언적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개발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먼저 부모와의 교통함을 통해 온다.
제 2부. 왕가의 특징 소개 (Introducing the Attributes of Royalty)
Chapter 8. 성소 안의 슈퍼영웅들 (Superheroes in the Sanctuary)
주님은 그분의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위대함의 욕망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서 자라난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실패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구나 어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교회 안에서의 율법주의와 행위를 통해 사람들이 그런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단순히 ‘우리 자신이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분 앞에 너무나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보호하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자신이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알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요일 4:19). 우리는 처음부터 너무나 멋지게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거룩한 성품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개념에 지배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태어나기도 전에 작업을 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아셨는데, 이미 그분의 세계에는 그 모든 것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선택할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 분이 먼저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선택할지조차 알기도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다.
Chapter 9. 맨 아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All The Way Down To The Top)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되 비굴하지 않게 하며, 사람을 높이되 교만하지 않게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접 만드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여전히 거짓말이 살아있다. 그 거짓말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완전한 정체성을 회복하여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이 거짓말은 우리의 능력이나 선함에 관한 어떠한 인정도 교만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교만을 제거하는 길은 오로지 겸손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 자신의 인격과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진리는 이것이다. 우리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도 교만이 아니며, 우리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도 겸손이 아니다. 이런 거짓 겸손이 성도들로 하여금 여전히 어둠에 거하도록 하며, 결국 진정한 목적을 향하여 우리가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든다.
겸손을 배운다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위대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한 교만의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위대하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영광의 근원이심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겸손은 우리를 평가절하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겸손’은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위 신학적 노예로 팔아버리고 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는 교만을 치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는 자신감을 파괴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감의 부재가 아니라, 능력의 제한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겸손해지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겸손은 마음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연히 어쩌다가 겸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아야 하지만, 절대로 위대한 그 이상으로 우리를 높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겸손의 사람이 되어서도 여전히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자신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항상 교만으로 비쳐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진짜 문제가 있다. 내가 믿기는 거짓 겸손 뒤에는 항상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결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이 숨어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진단’ 하에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타락한 존재로만 인식한다. 그것은 또 다른 이름의 거지근성이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우리는 우리의 낮은 자존감을 마치 영적인 것인 양 고착시키려고 하는데,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에 위대한 부르심을 주셨다. 그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위대함을 찾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의 부르심을 결코 이룰 수 없다. 거지근성과 거짓된 겸손이 많은 교회들을 영향력 없는 무기력한 교회로 만들어버렸다. 세상에 대하여 당연히 가져야 할 비전과 영향력을 축소시켜버리고 말았다. 거짓 겸손은 우리의 이름을 훔쳐가고 우리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버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어둠의 세력 앞에 무력한 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거룩하지 못한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문제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크게 낙담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어떤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기 때문에, 칭찬을 받을 때 애써 그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사실 이런 마음 자세가 우리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거짓 겸손과 낮은 자존감의 늪에서 뒹굴 때 우리는 사단의 공습을 저지할 능력이 없게 된다. 사단은 ‘겸손의 교리’를 들고서 우리의 자신감을 뭉개어버리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마비시켜 버린다. 이 거짓 교리가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자신감 자체를 교만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일하도록 위임을 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다스리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며, 충만한 감사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고, 그분의 우리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경외함 안에서 성숙되어진다. 기도는 겸손의 한 행동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움의 필요성을 깨닫는 사람이며, 창조주와의 교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교만의 극치이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 아버지의 필요성을 아는 것이다. 겸손은 또한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되 비굴하지 않게 하며, 사람을 높이되 교만하지 않게 한다!”
Chapter 10. 공경―또 다른 기회 (Honor-The Yellow Brick Road)
고귀함은 공경의 토양 위에서 자란다. 우리가 지금 잃어버린 미덕 중의 하나는 바로 공경이다. 공경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공경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 고귀함의 특징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공경할 때, 이는 그들이 공경할만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왕국의 공경 받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왕의 부르심 안에 거할 때, 우리의 행동은 일시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공경함으로 대할 때마다, 비록 그들이 우리의 공경을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분명한 기준을 그들에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준은 우리 주변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단지 사람들이 공경할 만하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공경 받을 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공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공경심은 마음의 상태이지, 결코 좋은 환경의 부산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공경한다는 것이 반드시 우리가 그 사람과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금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가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적과 싸울 때에도 공경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들이 공경을 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공경 받을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공경할 때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들의 지위에 순복하는 것이다. 공경은 겸손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공경이 존재하는 곳에는 위임과 권위를 통한 자연스러운 질서가 세워지게 된다. 공경의 토대 위에 세워진 질서는 권한(empowerment)을 만들지만, 강제로 세워진 질서는 결국 통제만을 낳을 뿐이다.
엘리사에게 필요한 것이 엘리야의 겉옷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보다 앞서 가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야만 한다. 그들로부터 영적인 유산과 전이(impartation)를 받기 위해, 무엇보다 그들에게 믿음과 기대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그들을 공경함으로써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을 공경하는 가운데 생명이 그들로부터 우리의 마음에 흘러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무시하고 버리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제 3부.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권위와 책임
(Introducing the Authority and Responsibility of Royalty)
Chapter 14. 왕의 비밀 계획 (His Majesty's Secret Service)
우리가 부름 받은 왕의 자녀로의 부르심은 많은 권한과 책임을 동반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에 지구상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셨다. 반면에 우리는 그 권한을 사용하여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책임도 함께 갖고 있다(눅 12:48). 주님은 우리에게 온 세상을 제자 삼으라는 지상 대명령을 위임하셨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셨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그저 온 세상에서 제자를 삼는 것만으로 그분의 지상 대명령과 부르심을 축소시키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 하는 방식이 아직도 상당부분 우리 안에 있던 거지근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작고 힘이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하여, 그저 우리가 약한 상태에서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변화되기 시작할 때 성경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Chapter 15. 바통 건네주기 (Passing the Baton)
왕의 가족들은 그들 가족의 역사를 후대에 전수하는 데 굉장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각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들 조상들의 가계의 계보 맨 뒤에 자신을 위치시켜 놓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왕의 유산을 계속 이어 내려간다. 믿는 자로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의 계보에 접붙임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가 모든 세대를 통해 점점 확장되어 나가기를 계획하셨다. 이러한 확장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유산이다. 유산은 세대 간을 이어준다. 유산이란 각 세대가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말하며 또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한 세대가 “생육하고 번성”했을 때 그 다음 세대는 전 세대가 이미 시작해서 이루어 놓은 어떤 특정 지점만큼 앞서서 출발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바로 유산을 통하여 각 세대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책임을 지도록 만드는 지를 분명히 깨닫게 한다. 유산을 물려받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대가를 지불한 것을 무상으로 얻는 것이다. 유산은 각 세대로 하여금 이전 세대로부터 그것을 물려받는 데 대한 책임과 경의감을 갖도록 한다. 그리고 또한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고 확장시켜서, 다음 세대로 하여금 전세대보다 한 발 앞서 출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한 세대의 천장은 반드시 다음 세대의 밑바닥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행동이 우리 앞에 오는 세대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유산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우리는 왕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물려받는가? 그리고 또한 우리는 후대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는가? ‘계시’ 혹은 ‘드러날 어떤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유산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오는 계시가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은 그것이 없이는 멸망한다고 기록하고 있다(호 4:6). 계시는 제일 먼저 우리 안에 주님과의 신령한 만남을 가져다주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이해되고 그것이 인간의 경험을 통하여 나타날 때 우리는 계시를 통하여 주님과의 신령한 만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계시는 개인의 변화를 일으키는 어떤 돌파구를 가져오며 영적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계시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계시가 하는 두 번째 일은, 우리 믿음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는 것이다. 만약 계시가 하나님 나라의 유산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전해지기를 원하신다. 계시의 열매는 개인의 변화이며,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초자연적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유산은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냈던 영웅들이나 모델들의 유산이며 그들의 가르침이나 업적에 대한 증거들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각 세대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열망과 기억을 불일듯하게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각 세대가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자기들 세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우리는 그들을 기림으로써 그들이 알고 경험했던 하나님을 우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공경할 때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신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공경할 때 우리는 그가 살았던 삶의 영역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마 10:41). 그 영역이란 겉옷(영적 권위), 하나님의 영역, 계시, 그리고 기름부으심의 수준을 의미한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단지 공경이라고 하는 것을 통하여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경할 수 있는 기회와 또 공경해야 하는 책임을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다른 영역으로 접근했던 사람들이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킨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공경해야만 한다. 우리 주변 사람들을 공경한다는 것이 꼭 주변의 대단한 사람만을 공경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령을 좇아서 그의 몸 된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부어주신 은사와 기름부으심을 깨닫고 존중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굉장한 일이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복종하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곧 각각의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서로 공경하라는 의미이다.
Chapter 16. 하늘의 전략적 동맹 구축하기
(Building Strategic Alliances with Heavenly Allies)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경험하는 데에 있어서 영적 덮개(spiritual covering)가 너무나 필수적이다. 권위와 권력에 의한 학대와 그에 따른 반란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종하는 문제를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 성경 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임에 틀림없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지도자, 배우자,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에 대해 복종할 것을 많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사도적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그들의 사역을 돕도록 부름 받았을 때, 우리는 그들의 권위를 갖고 함께 사역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아마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기본적인 수준의 영적 덮개이다.
영적 권위가 어떻게 역사하는가? 우리가 기도하고,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역할 때 우리는 성령님이 권위와 능력의 궁극적 원천임을 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천사들을 동원하신다. 왕의 자녀들이 그들의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임무가 실제로 나타날 수 있도록 천사들이 도와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천사들에게 임무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언을 선포하면 된다. 그러면 천사들이 주님의 말씀의 소리를 듣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권위 아래에 있다면 우리는 천사들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위에 정해놓으신 권세 아래에 우리가 복종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권위 아래에 있을 때 천사들은 우리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고 우리의 기도와 예언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시 103:20). 우리가 하늘나라의 임무에 복종할 때 우리는 천사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여 주님의 말씀을 수행하도록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세워놓으신 지도자들의 비전 아래에 우리가 들어가기 시작할 때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축복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단지 영적 은사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덮개를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할 때 강력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에게 권위를 갖고 순종하고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모든 은사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시지는 않는다. 영적 권위 아래에서 주님과 함께 동역할 내면을 갖고 주님의 훈련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그분은 권위를 부여하신다. 요셉의 개인적인 승리가 공동체의 덮개가 되었지만 전쟁 없이 승리는 없는 법이었다. 전쟁은 삶의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여 우리를 원래 계획되었던 부르심의 처소, 즉 왕궁으로 이끌도록 계획된 것이다. 감옥과 왕궁 사이에는 반드시 전쟁터가 있다. 이 전쟁터가 종종 시험과 연단이라는 단어로 더 잘 표현된다.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시험과 연단은 우리의 성품을 개발시켜 우리로 결국 왕궁에서 살아가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시킨다.
믿음과 신실함이 입증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지도할 권위를 부여하신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나아갈 때, 그들은 지도자들의 승리에 대한 전리품을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유산을 통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수고하지 않은 축복을 물려받게 된다.
Chapter 17. 이 땅을 보호하라 (Preserving The Planet)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의 빛을 비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이 어떻게 생각하며 우리의 일에 어떻게 행동하시는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빛)이며 세상을 향한 그분의 연애편지인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다시 나타내는(re-present) 사람들이다.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의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의존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그들이 만나보지 못한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빛과 생명 그리고 사랑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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