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스크랩] 율법과 은혜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하늘감동 2009. 4. 13. 20:24

 

  성기호 (성결대 명예총장) 

십자가의 도(道)는 구원의 도이다. 그러나 이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론과 논쟁이 쏟아져 나와 교회를 혼란케 하고, 그 결과 이단이 생겨나고 교파가 갈라지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이번 논쟁에서는 구원에 대한  많은 주장과 주의(主義) 가운데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 두 가지 논제(論題)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즉 구원에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가 유효한 것인가? 또는 구원이 행위를 떠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거져 주어지는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다루려 한다. 율법과 은혜를 두고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던 이단에 대한 역사적 살핌과 더불어 가톨릭과 신교의 입장을 살펴보고, 뒤이어 올바른 구원관 확립에 이해를 돕기 위해 율법과 은혜에 대해 뚜렷한 학문적 정의를 내리겠다. 끝으로 구원의 양면성을 바울(믿음)과 야고보(행함)의 조화를 규명함으로써 믿음과 행위 즉 은혜와 율법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다루려 한다. 

 

1. 율법과 은혜의 대립 

십자가로 구원이 완성된(요 19:30) 다음에 일어난 구원 방법론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주의(Legalism)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할례를 받아야 이방인도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이 사도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방 기독교인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는 것을 말하므로(갈 5:3) 그리스도의 은혜와 약속을 폐하는 행위가 된다. 

이 문제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기 시작하자 고개를 들었다.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서 이미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율법준수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스스로 여기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의 결과로 이방인 교회가 설립되고 개종자가 많아지자,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율법주의자가 유대로부터 이르러 자기들의 주장을 가르침으로써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대립은 공동교회(The Catholic church)와 복음적 교회(The Evangelical church), 유대계 신자와 이방인 신자, 베드로파와 바울파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모인 회의가 예루살렘 총회로서 여기에서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결정하였다. 극단적인 유대 기독교는 그 율법주의적 요소를 더하여 에비온파(The Ebionites)로 발전하고, 극단적 이방인 기독교는 노스틱주의(Gnosticism)로 변모하게 되었다. 

 

2) 에비온파(The Ebionites) 

에비온파는 사도 바울을 유대교의 입장에서 반대하는 바리새적 단체로서 초대교회에 존재하던 율법주의적 이단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할례를 받아야하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도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서 메시야로 택함 받았다고 말하며 그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다. 에비온파는 이방교회가 왕성해짐에 따라 차츰 그 영향력을 잃어가다가 5세기경 사라진 이단이다. 

 

3) 노스틱 주의(Gnosticism) 

성경에 직접적인 인용은 없으나 디모데에 보낸 바울의 첫째 편지에서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사도 시대부터 시작된 이 그릇된 종파는 2세기 경에 전성하여 시리아로부터 골(Gaul)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어지럽히던 중요한 이단 사상이다. 

노스틱주의는 그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지식’을 중요시 하며 신적 계시(神的 啓示)와 사색을 통해 얻어지는 이 초자연적 지식에 의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원론적 사상 체계를 가지고 물질과 정신의 대립에서 죄와 고통이 유래하며, 육은 악한 것으로 보아 몸의 부활이나 그리스도의 수육(受肉.Incarnation)을 부정함으로 가현설(假現說.Docetism)을 말한다. 정신계를 지배하는 선신(善神)으로부터 파견된 최고의 aeon(신적 능력이 충만한 존재)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가 환상적 몸을 입고 땅에 왔지만 육을 취하지는 않았다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다. 

영혼이 물질[肉]적 속박을 벗어나 빛의 나라에서 영혼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이 구원인데 이는 금욕과 신비스런 의식을 통해 이어지는 초자연적 지식(Gnosis)에 의해 달성된다고 한 바울을 최고의 사도로 지지하며 케린터스(Cerinthus)와 말시온(Marcion)등 대표적 이단자를 배출했다. 

노스틱 사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올바른 교리 진술의 필요성을 느껴 신앙의 표준(Regula Fidei)을 설정하였고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을 확립하여 복음을 세계로 수출하는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유대교적 율법주의와 구별되는 바울의 기독교 사상을 강조하여 복음의 자유케 함을 반율법적 방종으로 대체시킨 극단적 거짓 이방인 기독교의 탈을 쓰게 되었다. 

 

4) 반 율법주의(antinomianism) 

율법주의와 반대되는 입장이 반 율법주의인데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무슨 행동을 해도 관계가 없다는 탈율법적 극단의 복음주의 운동이다. 

노스틱주의의 영향을 받은 말시온은 율법과 복음을 분리하여 구약의 하나님은 창조주이나 엄격한 공의의 신으로 완전치 못했고 이스라엘 민족신(民族神)에 불과하다고 본다. 신약은 복음이며 신약의 신은 선한 하나님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했으며 이 선한 신)을 믿음으로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에 서게 되며 구원의 길이 전개된다고 말한다. 말시온은 바울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 이해한 사도로 받아들이고 신약 정경을 바울의 10서신(목회서신 제외)과 누가복음으로 제한하였다. 말시온 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정경(正經)을 형성토록 자극했으며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이 결합된 창조주이며 구속주라는 사상을 파악케 했다. 

 

5) 갈라디아인 주의(Galatianism) 

갈라디아인 주의는 갈라디아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이었으므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구원의 시작과 보존에는 은혜와 율법이 다같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살펴본 율법주의는 율법의 준수가 구원의 요건이라고 보며, 반율법주의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행위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갈라디아인 주의는 이 두 가지를 다 주장한다. 즉 구원은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을 순종해서 지켜야 한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성령의 은혜로 율법에서 해방된 이방인 신자에게 다시 율법의 굴레를 씌우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갈 3:3).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불완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율법의 도움으로 구원은 완성된다고 주장하였다. 

 

6)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펠라기우스(Pelagius)는 360년 영국에서 태어난 수도사로서, 그는 어거스틴의 이론 즉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인 은혜로 구원받는 것에 반대하여 일어섰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 이전의 상태로 원죄 없이 태어남으로 자기의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을 행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선행에 있어서 절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적 의미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이 이론은 431년 에베소 대회에서 이단으로 확정되고 펠라기우스는 정죄되었다. 

 

7) 가톨릭의 구원관 

종교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의 일치를 위해 모였지만 마침내 신구교 최후의 회담이 된 트렌트 회의(The Council of Trent, 1545. 12~1563. 12)에서 결의한 내용은 오늘날 가톨릭의 구원에 대한 교리를 밝혀주고 있다. 루터가 말한바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받는다는 신교의 주장을 일축하고 구원은 믿음과 아울러 행위도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갈라디아인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원은 계명을 지키고 선행을 하는데서 보존되고 또한 구원을 더욱 확실히 하는 것이라고 결정함으로⒀⒁) 신교에서 주장하고 사도 시대부터 내려온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정통교리에서 떠난 또 하나의 다른 복음을 탄생시킨 것이다. 13세기 공적축적설(Treasury of Merits)에 근거한 속죄표의 판매를 인정하고 교회가 저장하고 있는 은혜는 성례집행을 통해 신도들에게 전달된다고 하며 연옥설을 받아들임으로 기독교와는 타협할 수 없는 요소들 즉 행위와 공적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다. 

 

2. 은혜와 율법의 뜻매김 

1) 율법 

① 율법의 기원 

도덕법과 재판을 위한 민법인 출애굽기 20장에서 23장까지의 율법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는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430년이 되기까지는 율법이 없었다(갈 3:17,18). 즉 아브라함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었던 것인데 범법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② 율법의 쓰임새 

-A usus politicus or civilis 

죄를 범하고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율법은 필요한데 죄를 전제로 하고 죄때문에 율법은 필요하게 된다. 

-A usus elenchticus or podagogicus 

율법은 죄를 정하고[定罪], 정죄된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는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나오게 인도하는 몽학선생(蒙學先生)의 역할을 한다. 

-A usus didacticus or normotivus 

신자생활의 규범으로서 율법은 신자들이 행할 의무가 무엇임을 지시하고 생명과 구원의 길을 지도해 나가는 일을 한다. 이 세번째 율법의 역할은 반율법주의자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다. 

③ 율법의 완성 

범법함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했으니(갈 3:19) 그 약속하신 자손인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율법은 폐하여졌는가 완성되었는가의 문제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자들의 관심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더욱 굳게 세워졌다 했으며(롬 3:31),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폐하는 대신 완전케 하려 했으니(마 5:17) 아직도 율법은 건재하고 있다. 

율법 그 자체는 죄도 아니며(롬 7:7) 오히려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라고 했다(롬 7:12). 율법 자체에는 흠이 없고 기뻐할 대상이 되지만(롬 7:22) 율법의 요구를 행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 아래 가두는 일을 하고 있으니(갈 3:10) 이 저주에서 스스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2,23). 

만일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든지 또는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나 그의 십자가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갈 2:21). 율법의 제한성 즉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는 제한성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의 저주 아래 서시고(갈 3:13)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로 죽으심으로(롬 5:8, 3:24 25)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롬 8:2). 죄는 골고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 안에서 정죄되고 율법의 요구는 성취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이룩된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갈 2:16).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완성된 것이며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나 두려움이 없게 된다. 율법의 요구는 완성되었어도 폐하여 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은 구원받은 신자가 사랑으로 완성해 갈 생활의 규칙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롬 13:8 10). 

            

..중략..

                          

바울(믿음)과 야고보(행함)의 조화 

 

① 겉보기의 부조화 

같은 사건의 해석이 서로 다를 경우, 특별히 모순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는 어느 것이 옳은가하는 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한 가지 사실을 두고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롬 3:28)고 하는 반면,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 만이 아니라(약 2:24)고 함으로써 상반되는 진리를 진술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얻는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교리에 어긋나는 선언으로 간주되어 야고보서는 정경형성의 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을 받았고 칠의서(七疑書:Antilegomena)로 분류되어 정경성(正經性)을 인정받는데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내용 때문에 종교개혁의 기수인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의 서신(eine strohene Epistel, an epistle of straw)"이라고 혹평했다. 

야고보의 교훈은 다른 성경의 교훈 특히 바울의 사상과 모순되는 것인가를 규명해 보자. 야고보와 바울은 구약의 아브라함을 논할 때도 모순되는 듯한 기록을 보인다. 아브라함의 의인(義認 창 15:6)을 믿음의 결과라고 바울이 말할 때(롬 4:3),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약 2:21) 진술한다. 튀빙겐 학파에서는 이 사실을 들어 성경의 영감설을 부정하고 성경은 인간적 모순과 대립으로 구성되어 헤겔의 변증법 논리인 정.반.합 범주로 진행된다는 극단론을 펴는 것이다. 

 

② 저작 동기에서 표출되는 차이점 

바울과 야고보의 표면적 부조화는 저작 당시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바로잡기 위한 독립적 견해를 발표할 때 한쪽을 강조한데서 유래된다. 즉 바울은 복음이 세계로 전파될 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의 복음(롬 2:16)을 혼잡케 하는 다른 복음(갈 1:6)의 위험을 경계한다. 이미 살펴본 대로 초대교회의 이단 사상인 율법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에서 행위의 무가치성과 믿음의 효용성을 고조함이 바울의 사상 체계를 구성한다. 

 

반면 야고보는 실천적 도덕 생활이 무시되는 당시의 폐습을 시정코자 야고보서를 기록한데서 행함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당시 신자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를 강조하면서 생활할 때 도덕조차 무시하며 사랑은 입에 머물고(약 2:14) 피차 비방하며(4:11 12) 원망하였다(5:9).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는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의 폐습(롬 2:23), 즉 신앙과 행위가 유리되는 경향을 경계하기 위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격렬한 논조로 야고보서를 집필하여 기독교 윤리를 확립하려 하는 데서 오는 이른바 저작 동기에서 바울과 겉보기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③ 믿음의 조화 문제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행위에서 "여기신다(Logidzomai; reckon)"는 법정 용어로서 하나님께서 재판관의 입장에서 행하시는 선언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41회 쓰여지는 이 용어가 바울에 의해 35회 사용되는 가운데 믿음이 의로 인정받는 일에 관해 주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의로 인정하시는 믿음은 세 단계로 구별할 수 있다즉 사실의 인식,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 및 신뢰와 복종의 단계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믿음 즉 중심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에 복종하여 그와 일체되는 요소를 바울은 믿음(갈 2:16 21)으로 보고 있다. 그러기에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교리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살아있는 믿음이다(갈 5:6). 

 

한편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믿음은 넓은 의미의 믿음으로 단지 교리를 승인하고 교회에 출석하여 교인생활을 영위해 가는 외형적 믿음을 말하고 있다야고보서 2장 14절의 그 믿음은 바울의 믿음과 같지 않으니 유일신관을 고백하고도(약 2:19) 참된 행함이 없는 불신앙의 믿음이다. 고백과 의식 수준의 `그 믿음'은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살아있는 믿음과 구별된다. 여기에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믿음은 행위를 수반하는 야고보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 행함의 조화 문제 

`행함'에도 서로 다른 두 가지로 뜻을 매길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행위(롬 3:28)는 믿음에서 동떨어진 도덕적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런 류의 행위로 세속적 선은 행할 수 있을 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성경은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에서 출발된 행위이며(약 2:5, 22 24) 믿음에 기초한 행위이다(약 2:21 26). 야고보의 행함은 믿음을 입증하는 필연적 결과로서의 행위이지 바울의 뜻하는 도덕적 또는 단순한 선행으로서의 행함이 아니다. 

 

내면적 조화 

겉보기에 바울은 믿음만을, 야고보는 행위만을 강조하여 그 주장하는 점이 다르고 다른 한쪽은 무시한 것으로 오해받기 쉬우나 사실 두 사도의 견해는 원칙적으로 일치한다. 바울 사도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선한 행위가 올바른 믿음에 따라야할 것을 힘주어 교훈하고 있다(롬 2:6 10, 고후 9:8, 엡 2:10, 살전 2:12, 살후 2:17, 딤전 6:18, 딛 3:8).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도 믿음을 앞세우는 복음적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으며(약 1:18, 21; 2:1, 22 24; 4:5; 5:7) 믿음을 떠난 단순한 행위 즉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약 2:5) 

 

두 사도는 믿음과 행함에 있어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며, 행함은 믿음의 산물로서 필연적인 것이라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행함으로 믿음은 증명되고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니 이 교리를 두 사도의 입을 통해 진술케 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 2:26). 

 

출처 : 큰믿음교회
글쓴이 : 주미7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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