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께 범하는 죄
본문: 마태복음 12:31-32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불법, 즉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밧세바와 범죄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51:4)
그런데 죄중 가장 무서운 죄는 바로 성령님께 짓는 죄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고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은 죄라도 성령님께 짓는 죄가 더 큽니다. 그런데 우리는 겁없이 성령님께 범죄할 때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성령님께 범하는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성령님께 저항하는 죄
사실 성령님께 저항을 전혀 안 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현재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도 다 한 때는 성령님께 저항하며 성령님과 줄다리기를 하다가 항복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관해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르는 분들은 '이것이 지금까지 해오던 얘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것 입니다. 그러나 상관이 있습니다.
물론 칼빈주의 교리에 물든 사람들은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이구나' 당장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가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예수님께 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 때나 내가 오고 싶다고 예수님께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 때나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만 믿어집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끄심, 즉 성령님의 구원하시려는 역사하심이 항상 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언제까지나 끝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계속 저항하면 아버지의 이끄심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이끄심이 있을 때, 즉 지금 이 시간처럼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주저말고 즉시 믿어야 합니다.
2.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죄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매우 부드러우시고 민감하십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4:30)는 특별한 명령을 내린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여기서 '근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어원을 조사해보면 "육체나 마음에 고통을 느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매우 독특한 분으로서 아주 쉽게 마음에 고통을 느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범죄할 때 분노를 느끼시지 않고 고통을 느끼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사랑의 영이시며, 우리들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죄는 성령님을 근심시킵니다. 죄된 행동은 물론이요, 죄된 말과 생각까지도 성령님을 근심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유형의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여러분들께 말조심을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4:25-31)
이와 같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는 말씀의 전후에 보면 입으로 짓는 죄를 경계하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약3:2)고 했습니다. 진실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제 자신을 돌아보고 말의 실수들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결심하고 겨우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놓았더니 어느 틈에 또 다시 원망, 불평, 비판, 부정적인 말이 나의 입술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심하지 말고 배나 더 신경을 써서 입술로 성령님을 근심케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편 성령님은 사랑이시지만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죄는 여간 두려운 죄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의 두려움을 깨닫고 항상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기 위해 힘썼던 캐더린 쿨만은 "나는 인간이나 사탄은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님을 근심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을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윙키 프래트니는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은 만 명의 친구들에게 범죄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일이 왜 그토록 두려운 일일까요?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63:10) 이 말씀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죄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에베소서 4장 3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는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이 왜 두려운 죄인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적인 편견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성령을 근심시킴에 대하여" 라는 설교에서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할 이유 세 가지를 밝혔는데, 그 세 번째 이유로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죄는 우리에게서 떠나시도록 그분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한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롬8:9)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죄는 최악의 경우 성령님을 떠나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
3. 성령님을 소멸하는 죄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 우리는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소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부스 장군(General Booth)은 사람들에게 "불은 꺼지려는 경향이 있다. 여러분의 마음 제단 위에 있는 불을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웨슬리 듀웰은 "불은 항상 꺼지려는 경향이 있다"는 부스 장군의 말을 인용하면서 "성령은 신적인 힘을 낭비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활용하지 않으면 성령도 베풀기를 중단하신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6장에서 하나님은 번제단의 불이 결코 꺼져서는 안 된다고 다섯 번이나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불을 처음에 하늘로부터 내려 주셨습니다(레9:24, 대하7:1).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불을 꺼지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함께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과 성령님을 소멸시키는 것의 차이점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요? 성령님을 근심시키면 성령님은 소멸됩니다. 그래서 이 둘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비슷비슷한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으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그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은 어떤 죄든지 아무튼 죄를 지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에 반하여 성령님을 소멸하는 것은 특별히 성령님께서 주신 감동이나 소원을 묵살할 때 일어납니다.
거듭난 이후, 성령님은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감동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소원을 우리 안에 일으켜 주십니다(빌2:13). 우리가 여기에 순종하면 성령의 불은 우리 안에서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의 불은 소멸됩니다. 그리하여 더이상 아무런 감동이나 소원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이 감동을 하시면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소원은 어떤 소원이든지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심령 속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4.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
요한은 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5:16-17)가 있다고 썼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회개가 불가능한 죄 즉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는 바로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죄입니다.
이 죄에 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막3:28-29)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곧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토론이 있었고 지금도 토론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죄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님께서 이 죄에 관해 말씀을 하신 배경과 그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방금 귀신들린 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셨고 그렇게 하심으로 귀신들린 자의 소경과 벙어리 됨을 치료하고 계셨습니다(마12:22)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이로운 반응을 보이면서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닐까?"(23)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것과 상이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24)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백성들의 지도자요,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주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악령의 능력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행위가 성령님을 훼방하는 것이며 이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만일 내가 이처럼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런 분은 안심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훼방한다는 것은 의도적인 행위이지 우연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것은 그가 몰라서 저지른 우연한 실수였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이와같이 그의 죄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있었고, 훗날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 중에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이런 분은 안심이지만, 동시에 저는 지금 이 시대야말로 성령훼방죄를 짓기 가장 쉬운 때요, 앞으로도 더욱 그 위험성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일찍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을 원하면 고정관념을 버리라" 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크나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대다수가 그저 떠돌아다니는 풍문만 듣고 부흥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 비판을 일삼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엄히 충고하고 싶다. 모든 죄 중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더욱이 요즈음처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왕성하게 활동하시고, 권능으로 역사하실 때,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가장 나타나기 쉽다. 위대한 부흥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부흥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들은 이미 성령을 모독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현재 우리가 맞고 있는 부흥 운동에 악의를 품고, 이 부흥이 다름 아니라 사단의 역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에 아주 가까이 근접해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책을 부흥이 한창이던 시기에 썼습니다. 그의 지적대로 부흥이 일어날 때 성령훼방죄가 급증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앞으로 세계적인 부흥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타까운 일이긴 하나 앞으로 성령훼방죄를 지을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특별히, 어떤 교회가 급속하게 부흥하면 시기심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을 관행처럼 해온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성령훼방죄를 지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여라도 성령훼방죄를 짓지 않도록 고정관념을 버리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며 영의 역사를 판단할 때는 항상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참 좁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할 때 좋게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언제 누구를 통해 그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갈 지 모르고 또 살다보면 그와 어떤 관계가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분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관계는 성령님과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고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 한 가지만 생각하더라도 성령님께 대하여 짓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윙키 프래트니가 말한 대로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은 만 명의 친구들에게 범죄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께 대하여 범죄하지 않도록 항상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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