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제2장 유대적 뿌리 찾기 운동은 성경적인가?(강금성 목사)

하늘감동 2011. 12. 16. 03:03

제2장 유대적 뿌리 찾기 운동은 성경적인가?

 

강 금 성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 비유’(16-24절)는 메시아닉 교회에서 그들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인용하는 성경의 핵심 구절이다. 그 중 일부이다.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감람나무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 감람나무가 접붙임이 되었고, 그 접붙임이 된 돌 감람나무 가지는 뿌리의 진액을 받아 보전된다.’는 이 감람나무 비유는 메시아닉 교회에 의해 특히 다음 두 가지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사용한다.

 

첫째,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다.” 이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구속사의 중심이 교회라고 믿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데 교회를 사용하신다.”고 하면, 무턱대고 ‘대체신학자’라고 하며 귀를 닫아버린다.

둘째, “교회는 유대적 유산을 회복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 율법을 회복하고, 안식일과 유대교의 각종 절기를 지켜야 하며, 음식에 관한 법과 정결법 등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유대적 뿌리 찾기 운동’이다.

 

대체신학에 대해서는 4장에서 논의할 것이고, 이 글에서는 유대적 뿌리 찾기 운동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하이들러(Robert D. Heidler)가 쓴 『메시아닉 교회』는 메시아닉 교회의 입문서라 할 만큼 메시아닉 교회나 유대적 뿌리찾기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애독하고 있다. 그는 이 책 1부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성공을 언급하며,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한다면 그들과 같은 성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대 부흥의 원인은 유대적 뿌리를 가진 이들(메시아닉 주)로 인한 것이라 하며,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부흥을 잃어버린 것은 교회가 유대적 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진단하고, 초대교회처럼 성경적 유대교의 뿌리에 단단히 박혀 풍부한 영양을 공급받아야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하이들러는 2부 「잃어버린 유산의 회복」에서 유대적 유산의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는데, 6장에서 ‘하나님의 가르침’, 7장은 ‘하나님의 안식 누리기’, 8장 ‘하나님의 생명 사이클’, 그리고 9장에서는 ‘언약 안에 거하기’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각 장이 추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율법(6장), 안식일(7장), 유대교의 각종 절기들(8장)을 지켜야 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부록에서는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을 지키는 방법과 향후 2020년까지 그 날과 절기들의 날짜를 안내하고 있다. 결국 그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고, 율법(토라)를 준수함을 통해 유대적 유산을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 비유는 유대적 뿌리 찾기 운동의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또 그것이 옳다면, 이 비유가 율법을 회복하고 안식일과 유대교 절기와 각종 정결법과 음식에 관한 규례를 회복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로마서는 어떤 책인가?

 

감람나무의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로마서가 어떤 책인지, 그 전체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전체 주제와 흐름 속에서 감람나무의 비유를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어떤 책인가?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교회와 개인을 향해 보낸 13개의 편지 중의 하나다. 이는 로마서가 로마 교회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서 쓴 ‘상황적 목회서신’이란 의미이다. 즉 목회자 바울이 로마 교회 내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쓴 편지들이다. 이러한 전제는 종교개혁가들이 로마서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진술하는 하나의 교리서라는 인식하에 1-11장을 교리편, 12-16장을 실천편으로 구분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지만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편지의 발신자인 바울과 수신자 로마 교회가 처한 상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1)바울의 상황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울이 쓴 로마서와 로마 교회와 관련된 다른 성경을 통해 어느 정도 재구성할 수 있다. 사실, 바울이 로마에 보낸 편지인 로마서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할지라도 편지에 언급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거나, 중요한 상황이었을지라도 로마 교회와는 관계가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다. 바울 자신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①바울은 로마 교회에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롬 1:5).

②바울은 로마를 들른 후에 서바나의 전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고, 로마 교회의 선교 지원을 바라고 있었다(롬 15:23-24).

 

2)로마 교회의 상황

①로마의 유대인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을 알고 있었다(행 28:22).

②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람페(P. Lampe)는 로마서 16장 연구에서, 바울이 문안하는 26명의 인명 중에서 단지 16%만이 유대명인 사실을 들어 로마 교회가 거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③로마 교회는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 갈등은 율법이 정하는 바 음식에 관한 규례와 정결법에 관계된 것이었는데, 바울은 그러한 규례들로부터 자유한 이방인을 강한 자라 부르고, 여전히 율법에 근거해 유대교 전통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약한 자라 부른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겼고,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했다(롬 14:1-15:13).

④이런 인종적 차이와 율법에 대한 태도, 그리고 로마 정부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 등에 의해 로마 교회는 단일 집회 장소를 가진 단일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3-5개의 가정 교회 형태로 나뉘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것(16:3-15)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서바나 선교를 앞두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바울에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설명함으로써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돕고,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차별이 없는 복음을 통해 교회의 일치를 회복하여, 결국 서바나 선교에 협력을 얻어내고자 로마서를 썼다는 것이 최근까지의 연구 결과이다.

박 수암 교수는 로마서 1-4장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유대인에게 이방인의 입장을 변호한 것이라면, 9-11장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입장을 변호한 것이라고 한다. 즉 9-11장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에 대해 자고하지 말라는 권고라는 것이다. 감람나무의 비유는 그런 흐름 속에서 언급되고 있다. 참 감람나무는 유대인을, 돌 감람나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바울은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꺾였고, 대신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이 접붙임이 되었지만, 결코 이방인이 자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일깨움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갈등을 치유하여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2. 복음적 치유(1-8장)

 

1)차별이 없는 복음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말하면서, 자주 유대인과 이방인(헬라인) 사이에는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없다(롬 2:9-10).

 

(롬 2:9-1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방인에 비해 유대인의 자랑은 많다. 그 중에서도 그들이 율법을 맡아 하나님의 뜻을 알며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유대인의 나음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아는 사람일지라도 악을 행하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을 맡고, 할례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이 아니요,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마음으로 믿어 순종하는 자라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선언한다.

 

(롬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둘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3:9). 이방인과는 다르게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바울 사도가 말한 바처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이방인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을 범하고 있는 것(1:18-32)을 보며 판단하던 유대인들도 같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2:1-3, 17-24).

 

(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율법을 아는 유대인들도 다 죄 아래 있었다. 이는 율법이 그 율법을 아는 자들을 의롭게 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셋째,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은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차별이 없다(롬 1:16).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율법은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을 교만하게 하며, 이방인에 대해 우월감을 갖게 함으로써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통해 율법과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의 자고함을 막음과 동시에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일치를 도모한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로마 교회를 복음으로 치유하며, 교회 일치의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2)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율법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빼놓고 의와 구원을 말할 수 없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의와 구원을 얻는 수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은 율법과 관련해 다음 질문을 낳게 한다.

 

①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와 구원을 받게 된다면, 율법은 무엇인가?

②그리스도인과 율법은 어떤 관계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으로 인해 당시 유대인들이 갖게 될 당혹감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들이 갖게 되는 당혹감, 혹은 반감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답이 로마서 7장에 진술되는데,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결별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남편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남편으로부터 벗어나며, 자유한 그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있다.’는 ‘남편 있는 아내’의 비유(7:1-3)를 통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를 ‘벗어남’(2, 6절), 혹은 ‘자유’(3절)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바울은 4-6절에서 그리스도인은 왜 율법과 결별해야 하며(이유), 어떻게 율법과 결별하게 되는지(방법)를 이렇게 말한다.

 

(7:4-6)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과 결별하지 않으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없다. 남편이 살아 있는데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듯이 율법과 결별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주관하는 자가 될 수 없다(4절). 뿐만 아니라 율법과 결별하지 않으면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6절). 따라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고, 성령과도 상관이 없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율법을 좇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어떻게 율법과 결별하는가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4절)라고 한다. 즉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우리는 죽은 자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남편 있는 아내’의 비유에서 죽음은 이전에 자신을 주관하던 자로부터 자유를 가져온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율법을 따르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다(5절). 그러한 삶은 자기의 육체 가운데 있는 죄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며, 결국 율법은 그에게 사망을 선고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것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좇음이요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이며,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죄이며, 악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율법은 거룩하며 선한 것이다(12절). 그러나 문제는 우리 육신에 선한 것이 없고, 우리 안에 죄가 거한다는 사실이다.

 

(롬 7: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런데 율법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해결하지 못하며, 우리 육체에 있는 죄의 정욕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무능한 것(약하고 천박한 것, 갈 4:9)이라고 한다. 율법이 거룩하고 선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율법은 약하고 천박한 것일 뿐이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지만 사람을 죄로부터 자유케 할 수는 없다. 대신 범죄한 이들을 정죄하여 사망에 이르게 할 뿐이다.

 

3)자유와 방종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방종의 길을 터준 것인가? 실제로 바울이 이 복음을 전파할 때 그와 같은 공격이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방종을 구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8장에서 복음이 우리를 어떻게 의롭게 하며, 성화에 이르게 하는가를 보여준다.

 

①믿음으로 살면 은혜가 왕 노릇한다.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죄가 왕 노릇하였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은혜가 왕 노릇한다.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6장과 8장에서 드러난다.

②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졌고, 이 연합을 통해 죄의 몸이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6:1-11). 사도 바울은 이를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죄가 주관치 못하고,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한다. “(6: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은혜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므로,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6:12-23).

③믿음으로 살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8: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복음을 듣고 믿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을 주신다(갈 3:2). 그 성령은 우리 육체 안에 있는 죄의 정욕을 쳐서 굴복시키고,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한다(8:1-17). 결국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영화에 이른다(8:30). 그러므로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는 믿음은 방종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함으로써(8:4), 어떤 이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운다(3:31).

 

이처럼 1-8장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차별이 없는 점을 들어, 그들 사이의 갈등을 치유하고,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 있다. 그 와중에 율법이 거론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율법은 유대인이 자랑하는 것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주셨다는 것을 환기시키며, 율법에서 벗어나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믿음은 율법이 지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완전한 것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교회는 유대적 유산을 회복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로마서의 주제와 전혀 다르며, 교회를 그리스도와 성령으로부터 떠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헌 것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범법 행위(갈 2:18)임이 분명하다.

 

3. 일치를 위한 권면들(12-16장)

 

종교개혁자들은 로마서 1-11장을 이신득의의 교리를 중심으로 교리를 설명하는 ‘교리편’으로 분류하고, 12-16장은 그 교리를 어떻게 실천할 ‘실천편’으로 이해했다. 이로 인해 두 단락 사이에 논리적 연결성이 심하게 훼손되어 왔다. 하지만 ‘교회의 일치’라는 주제로 로마서를 읽으면 두 단락 사이에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앞 단락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을 치유하려 했듯이, 이 단락도 두 그룹 사이의 치유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윤리적 권면들(12-13장), 제의적 권면들(14:1-15:13), 그리고 문안(16장)은 모두 교회의 일치를 위한 노력들이다.

 

1)교회의 일치를 위한 윤리적 권면들(12-13장)

 

먼저 교회 생활에서 사회적 윤리를 말한다(12:3-8).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다양한 지체가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질 수 있으나, 그들은 한 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12: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한다.

다음으로 바울은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권한다(12:9-21). 사랑은 일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2:9-10)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국가에 대한 권면(13:1-7)을 한 후 바울은 다시 이웃 사랑에 대해 말한다(13:8-10). “(1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리고는 재림에 대한 각성을 교훈한다(13:11-14).

그런데 13:1-7절은 국가에 대한 윤리적 교훈으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할 것과 세금을 바칠 것을 권면하는 것이 교회의 일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를 하나님 나라의 대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고, 특히 세금 납부에 대한 거부 운동도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은 이 두 문제를 당연시 하는 교회 내의 이방인(로마 시민)과 심각한 견해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하나 됨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권세들이 가진 순기능을 앞세워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고, 세금을 내도록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서로 다른 입장을 해소하여 일치를 도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2)교회 일치를 위한 제의적 권면(14:1-15:13)

 

로마서를 연구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단락이 로마 교회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이 단락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것’(14:1-4)과 ‘날을 지키는 것’(14:5-6)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받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들을 판단치 말라고 한다.

‘연약한 자’는 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는데,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에 대한 확신이 약하여, 음식과 날에 대한 유대교의 규정을 엄격히 지켰다. 그들은 유대교의 정결법에 따라 정결한 음식만 먹었다. 특히 그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나 포도주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것일지도 모르기에 채소만 고집하였다. 또한 그들은 안식일과 그 외 유대의 절기를 지켰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었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시장에서 구입한 음식에 대해 자유 했으며, 유대의 절기에 대해서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바울은 이들을 믿음이 ‘강한 자’로 부른다. 그런데 믿음이 강한 자는 연약한 자를 업신여겼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했다. 유대교의 음식에 대한 규례와 날과 절기의 문제가 교회에 갈등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①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14:17). 율법에 근거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엄격히 구분해서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임하는 것이다(14:14-17).

②따라서 특정한 음식은 부정하고, 특정한 날은 거룩하다 하여 지키는 것은 믿음이 약한 자이며, 그것들로부터 자유한 자는 믿음이 강한 자이다(14:1-3).

③하지만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 왜냐하면 강한 자나 약한 자는 모두 주를 위해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14: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5-6)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교회 일치를 위한 바울의 제의적 권면(14:1-15:13)에서도 메시아닉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로마서의 메시지를 명백히 거스르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메시아닉 교회가 유대적 유산을 회복하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고 유대교의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14:17)는 바울의 명제에서 벗어나 있다.

②바울은 음식에 관한 규례와 날과 절기에 대해 자유한 사람을 ‘믿음이 강한 자’라 하고, 유대교의 음식 규례와 날과 절기를 지키는 이를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메시아닉 교회가 안식일과 유대 절기를 지키도록 하는 것은 믿음이 강한 상태에서 약한 상태로 퇴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3)교회 일치를 위한 문안에 대한 권면(16장)

 

문안은 바울이 쓴 다른 서신에도 거의 빠짐없이 나타난다. 그러나 로마서의 문안은 두 가지 면에서 특이한데, 첫째는 분량이 길다. 둘째는 다른 서신에서는 주로 바울 자신이 직접 문안하는데, 로마서에서는 공동체를 거론하며 그들끼리 서로 문안하라고 권면한다. 그 예를 보자.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10)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갬블(H. Gamble)은 이것은 바울이 갈라진 유대 그리스도인 교회와 이방 그리스도인 교회가 서로 문안할 것을 부탁한 것으로 본다. 이는 이 문안에 대한 권면이 단순한 문안을 넘어서 로마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문안(1-16절)이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공동체끼리 서로 문안하라는 권면(1-16절)과 바울 일행이 직접 로마 교회에게 문안하는 부분(21-23절)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멀리하라는 권면(17-20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더욱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17)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4. 로마서의 가르침과 메시아닉 교회 주장의 비교

 

로마서가 로마 교회의 문제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록했다는 관점에서 로마서를 개관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 비유는 유대적 뿌리 찾기 운동의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또 “그것이 옳다면, 이 비유가 율법을 회복하고 안식일과 유대교 절기와 각종 정결법과 음식에 관한 규례를 회복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며,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만 그리스도께로 가서 하나님을 향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메시아닉 교회는 율법을 회복해야만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이 누리는 축복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이 세우신 본래 교회의 권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전으로 우리를 몰고 가려는 것이다.

②로마 교회에서 율법은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이는 율법이 유대인의 나음 중 으뜸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음식에 관한 규례와 정결법은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업신여김과 비판을 가져왔다. 교회를 힘 있게 하고, 하나 되게 하며, 자라게 하는 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이지 율법이 아니라는 증거이다(골 2:16-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닉 교회가 율법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로마 교회에 나타난 현상에 비추어볼 때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③로마서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정결법과 안식일과 절기들에 관한 법, 그리고 음식에 관한 규례를 지키는 이들을 ‘약한 자’라 부르며, 이것들로부터 자유한 이들을 ‘강한 자’라 부른다. 하지만 메시아닉 교회는 이들 율법의 규례들의 회복이 교회의 회복과 대 부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강한 믿음을 버리고 약한 믿음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다.

 

이로써 우리는 메시아닉 교회의 주장, 특히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의 비유가 율법과 안식일과 각종 유대교 절기들을 회복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되며, 단지 유대인에 대한 이방인의 자고함을 경계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위한 말씀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성경의 어떤 구절을 해석할 때 전후 문맥을 살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해석자는 해당 성경의 전체 흐름과 메시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체 흐름과 메시지에서 벗어난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그렇게 해석된 성경구절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다. 메시아닉 교회는 이 원칙을 저버리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믿음과 율법의 공존이 가능한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