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믿음과 율법의 공존은 가능한가?
강 금 성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메시아닉 교회를 추구하는 한 젊은 목사가 율법 준수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주일 대신에 안식일을 지키려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도록 가르친다고 했다. 메시아닉 교회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교회 지도자들도 율법에 대해 이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무엇일까? 그 젊은 목사가 취하고 있는 태도가 옳은 것일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면, 어느 정도까지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이제 율법은 완전히 폐기된 것인가? 율법이 폐기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신앙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의문들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그 한 결과가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메시아닉 교회이다. 율법에 대한 메시아닉 교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① 율법은 완전하다(시 19:7, 약 1:25). 그러므로 새 언약 아래서도 “의식법은 폐하여졌다거나 도덕법은 유효하다.”는 식으로 고칠 수 없다. 율법은 그대로 다 지켜야 한다.
② 율법은 폐할 수 없다(롬 3:31, 마 5:18).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율법은 폐할 수 없다.
③ 율법은 영원하다(시 119:160). 그렇기 때문에 새 언약 아래서도 율법은 구약 시대처럼 계속 지켜야 한다.
이에서 보듯 메시아닉 교회는 믿음과 율법의 공존을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제사장이 지킬 법 등, 몇몇 율법은 지금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니 버리고 폐했다는 표현을 함부로 쓰지 말고 유보하라고 한다. 과연 율법에 대한 메시아닉 교회의 태도는 성경적인가? 그리고 구원은 믿음으로 얻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성경적인가? 이 글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1. 교회사를 통해 본 율법 문제
교회의 시작과 동시에 교회를 괴롭힌 것이 율법 문제였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졌지만,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시대부터 율법은 교회의 주된 논쟁 이슈였고, 5세기가 끝나면서 마무리 되었다. 당시의 율법과 관련된 논쟁을 살펴보면, 현재 대두되고 있는 율법 문제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빛을 던져 줄 것이다.
1) 유대화주의
유대화주의는 유대적 기독교로서, 사도들이 활동하던 때에 활발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할례와 도덕법 및 의식법 전체가 여전히 구속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필립 샤프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이단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통일성을 주장하되, 기독교를 유대교에 함몰시키고 복음이 율법을 개선하거나 완전하게 손질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는 노선을 취한다... 유대화주의자들은 사실상 유대교인들이었고, 오직 허울과 이름으로만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새롭고 자유롭고 보편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관해서는 아무런 개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에서 발전한 이단이 2세기의 에비온주의이다.” 사도시대에 있었던 유대화주의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다루겠다.
2) 나사렛파와 에비온주의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한 집단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도 유대교 관습을 그대로 지키면서, 4세기 말까지 나사렛파라는 이름으로 시리아 일부 교회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율법 중 의식법을 지켰으며, 예수가 메시아이며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나사렛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지는 않았지만 성장을 멈춘 그리스도인이었다. 결국 그들은 미미한 분파로 위축되었다. 성경을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한 교부 제롬(Jerome, 342-420년)은 “나사렛파는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다가 어느 하나도 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에비온주의는 나사렛파와는 구분된다. 에비온주의는 히브리어로 ‘가난한’을 의미하는 ‘에브욘’에서 온 말이다. 에비온파는 스스로를 마음이 가난한 제자들의 참된 추종자로 생각했다. 이 분파는 주로 유대인으로 구성되었지만, 때로는 이방 그리스도인도 가입했다. 그들은 현재의 팔레스타인과 그 일대, 키프로스,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에비온주의는 4세기까지 존속했으나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사도 바울에 반감을 품었고, 바울을 태생이 이교도로서, 생애 후반에 불순한 동기를 품고 유대교에 들어온 자로 간주했다. 에비온주의는 “할례를 받고 모세의 의식법을 준수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필수이다.” 또한 “바울은 배교자와 이단이며 그가 쓴 모든 서신들은 폐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서 보듯 에비온주의는 유대교 신앙을 고수하면서, 예수를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받아들인 것뿐이며, 결국 기독교를 유대교로 환원시키려했음을 알 수 있다.
1-2세기에 교회를 위협했던 유대화주의와 나사렛파, 그리고 에비온주의의 주장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모세 율법을 유대인과 이방인 구분 없이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교회는 기독교를 유대교화 하려는 자, 혹은 기독교를 유대교로 함몰시키는 자로 보았다.
② 나사렛파와 같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율법을 지키지만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는 이들을 교회는 ‘성장이 멈춘 자’로 보았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안식일과 음식에 관한 규례를 지키는 유대 그리스도인을 ‘약한 자’로 불렀다(롬 14:2, 15:1).
③ 유대교 전통을 유지하고, 히브리적 사고로 성경을 해석했던 그들은 바울을 적대시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입장을 바울서신이 반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현대의 메시아닉 교회는 에비온주의와 흡사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들은 바울이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한다. 또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골로새서 안에 있는 반 율법적인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사실은 헬라적 성경 읽기로 잘못 해석된 것이며, 히브리적 성경 읽기로 읽으면 오히려 율법을 지키라는 의미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초기에 히브리적 사고를 갖고 있던 에비온주의자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자신들의 입장에 바울이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가르침은 다른 복음이며,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저주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았다. 이로보아 현재의 메시아닉 교회가 “바울이 율법을 폐했다고 하는 것은 헬라적 성경읽기로 잘못 읽은 것이다.”고 하는 말은 억지이다.
3) 마르시온(Marcion)
마르시온(대략 85년-대략 160년)은 영지주의자들 가운데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사도 바울의 후계자로 여겼다. 그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신약성경의 하나님을 다른 분이라고 하였다. 즉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율법에 기초를 둔 공의의 하나님인데, 신약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에 바탕을 둔 선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는 ‘믿음’에 가장 높은 지위를 매겼으며, 율법적 요소가 있는 구약성경, 목회서신, 히브리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공동서신, 그리고 계시록을 배격하고, 압축된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열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했다. 교회는 이러한 입장을 가진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이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는 기독교인을 보고 개종한 교부(敎父) 터툴리안(Tertullianus, 160-220년)은 이교도와 유대교, 그리고 교회 내의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갈라디아서가 유대교에 반대한다는 마르시온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나 마르시온이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며 유대교 경전(구약)을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고 했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의 율법 폐기는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뜻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창조주가 파송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한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이 구속사의 초기에 자신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자신의 구속 계획이 성취되자 율법을 스스로 폐기하셨다.”고 했다. 교회는 터툴리안과 같은 입장에 서서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를 통해 볼 때 우리는 유대화주의나 에비온주의에 대처하면서 보여주었던 태도와 또 다른 교회의 입장을 볼 수 있다.
① 교회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했지만,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인정치 않는 태도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② 율법은 폐기되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율법이 하려는 일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4) 알렉산드리아 학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교리문답학교 교장 역할을 담당(주후 190-202년)했던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214년 사망)는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율법은 거룩하다(롬 7:12). 그러나 초등교사가 엄격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장래를 예비하는 것처럼, 율법은 가르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는 것이다(참조, 갈 3:24). 이에 반해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성취가 되시며, 성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준수하는 자를 종으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와 공동 상속자로 삼으신다(참조, 갈 3:26-4:7).”
클레멘트의 견해는 전통적으로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율법관과 일치한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성취”라고 할 때, 그 ‘성취’는 헬라어 ‘텔로스’(τέλος)로서가 아니라, ‘플레로마’(πλήρωμα)의 의미라 한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성취(텔로스)가 된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를 자자구구 완벽하게 이행하다.’는 의미이지만, 그리스도가 율법의 성취(플레로마)가 된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이다.
교부 오리겐(Origen)은 불과 열여덟 살의 나이에 클레멘트가 떠난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율법과의 관계를 논할 때 율법을 의식법과 도덕법으로 나누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식법은 폐기되었고, 도덕법은 존속되고 확대되었다고 주장했다. 교부 터툴리안과 서머나 출신으로 리옹의 주교가 된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 140-203년),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오리겐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5) 안디옥 학파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생했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재임한 위대한 설교가인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주후 345-407), 크리소스톰의 동료였던 맙수에스터의 씨어도어(Theodore of Mopsuestia, 주후 427년 사망), 그리고 씨어도어의 제자인 씨어도레트(Theodoret, 주후 393-460년) 등이 안디옥 학파를 대표한다. 안디옥학파는 알렉산드리아학파가 율법을 의식법과 도덕법으로 구분하는 것에 반대한다. 또한 복음과 율법을 분리하여 대립시키는 것을 반대하면서도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윤리 지침으로 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크리소스톰은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따라서 율법이 우리의 개인 교사이며,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있을 때, 그것은 은혜의 적이 아니라 동료이다. 하지만 만약 은혜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우리를 억누른다면 율법은 적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율법이 은혜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자들을 가두어둔다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밤에 빛을 비춰주던 양초가 낮이 되자 우리를 태양으로부터 가린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기는커녕 해가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이 우리와 보다 큰 유익들 사이에 위치해 있다면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 개인 교사가 한 청년을 떠나보낼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잡아둠에 의해 그를 놀리게 됨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계속하여 고집하는 자들은 율법의 가장 큰 비방자가 된다(갈라디아 주석 3:25-26).”
기독교 초기에 교회에서 일어난 갈등 중 가장 큰 것이 율법 문제였다는 것은 부득이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즉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과정에서, 유대교 전통에 젖어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과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방 그리스도인 사이에 율법은 갈등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율법을 고수하던 분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거나 더 이상 저변이 확대되지 않음으로 인해 결국 소멸되고 말았다. 그런 과정을 보며 우리는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교회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분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현재 메시아닉 교회는 은사운동 다음에 일어날 것이 율법의 회복이며,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율법이 온전히 회복될 것이라고 한다.
②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율법 준수를 고집했던 분파도 바울을 적대시했으며, 바울의 서신들이 반 율법적인 것임을 알고 심지어 바울을 이단자라고 몰아붙였다. 그런데 메시아닉 교회는 바울을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다른 서신에서 이방 종교와 대항해 싸우며 모세의 율법을 회복하는 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울서신이 반 율법적인 것이라고 하면, 그를 향해 헬라적 성경읽기에 물든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린다. 현재 메시아닉 교회가 취하고 있는 히브리적 성경읽기는 근거도 없고 역사도 없다. 기독교 초창기에 유대인들이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바울서신을 읽었던 것이 지금 메시아닉 교회가 헬라적 성경읽기라고 말하는 것과 해석이 일치한다. 이는 메시아닉 교회가 성경 해석을 히브리적 성경읽기와 헬라적 성경읽기로 구분하고, 논란이 되는 본문들이 “히브리적 성경읽기로 읽으면 율법을 지키라는 의미인데, 헬라적 성경읽기로 잘못 읽기 때문에 반 율법적인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억지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③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복음,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율법의 요구를 채우고도 남는다. 따라서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빌 3:18).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즉 복음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할 필요가 있다.
④ 교회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했지만,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인정치 않는 태도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2. 신약성경을 통해 본 율법 문제
복음과 율법의 갈등은 사도 시대부터 있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는 율법에 대한 사도들의 입장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27권의 신약성경 중에서 율법 문제 자체를 다룬 책은 갈라디아서이고, 율법을 부 주제쯤으로 다룬 책이 로마서이다. 마태복음에는 율법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율법 문제로 인한 갈등이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지는 않는다. 그 외에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15장에서 묘사된 예루살렘 제1차 공의회이다. 비록 짤막한 단편으로 기록돼 있기는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율법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가장 권위 있고 중요한 본문임이 확실하다.
1)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행 15:1-35)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운동이 땅 끝 로마에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다음 세 가지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첫째, 유일 성소.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거하시는가? 혹은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자기 이름을 두시는가? 유일 성소 개념은 유대교의 삼대 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그들은 1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 유일 성소 개념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전파될수록 종교 자체에 큰 위협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유일 선민.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이스라엘 외의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이방 세계에 대한 복음 전파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셋째, 율법과 할례의 문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해야만 하는가? 이방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생소했고, 할례는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사도행전에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이 세 가지 과제가 전면에 부상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말씀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를테면 스데반 이야기(행 6-7장)는 유일 성소 개념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스데반은 이렇게 말한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행 7:48).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고넬로 이야기(행 10-11장)가 해결하고 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율법과 할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 이야기이다(행 15:1-35). 그런데 이 회의에 대한 해석에서 전통적인 교회와 메시아닉 교회의 입장은 정면충돌한다.
①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은 1-2절에 기록된 안디옥 교회의 다툼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의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이,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과 충돌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메시아닉 교회는 그 다툼은 ‘할례’를 지키는 방식 때문이라 하는데, 유대로부터 내려 온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것이, 안디옥 교회가 지금까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고 있었던 것과 충돌한 것이라 한다.
② 20절의 네 가지 짐, 즉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하라고 각 교회에 통보한 것에 대해, 전통적인 교회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그 글을 읽으므로 그들과의 급격한 충돌을 방지하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하지만 메시아닉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음부터 모든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 지나치게 부담이 되니까, 일단 네 가지 짐을 지게 한 후, 나머지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글을 읽으므로 그들에게 배워 율법을 모두 지키게 할 목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미를 전통적인 교회와 메시아닉 교회는 정반대로 해석한다. 율법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느 해석이 옳은가? 그 결과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회의는 율법 때문에 모인 회의였고, 모든 사도와 교회의 장로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결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을 조심스럽게 읽으면, 다음 두 가지 이유로 메시아닉 교회의 주장이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유대로부터 온 어떤 이들과 바울 및 바나바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것 때문이다. 1-2절을 보자.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메시아닉 교회가 주장한 대로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지 말고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면,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는 다툼이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메시아닉 교회는 틈만 나면 갈라디아에서 바울이 저주한 대상은 이방종교를 가르치는 자들이라는 것과, 바울은 이방 종교의 날과 절기가 아니라, 모세의 법에 따라 날과 절기를 지킬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과 다툰 것으로 나타나는데, 왜 율법에 대해 그들과 같은 입장을 가진 두 사도가 그들의 가르침에 맞서 다투고 변론했을까? 결론은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고 주장한 것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을 부정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어떻게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가?
둘째, 다툼이 일어난 원인과 회의에서 결의한 사항 때문이다. 회의는 어떤 안건이 있었기 때문에 소집되는 것이고, 소집된 회의는 그 안건을 논의하고 그 결과를 결의하게 되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6-11절을 보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위 6-11절은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다툼과 변론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의 진행 상황과 결의되는 내용이 적혀 있다. 9절에는 ‘믿음으로’ 이방인의 마음을 깨끗이 하여, 이방인들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10절에는 유대인도 메지 못한 멍에를 이방인의 목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11절에는 이방인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한다. 만일 메시아닉 교회의 주장대로 ‘할례를 행하는 방식’ 때문에 회의가 소집되었다면, 할례를 받는 방식에 대한 결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할례를 받는 방식에 대한 언급은 아무 데도 없다. 메시아닉 교회의 주장대로라면 사도들은 그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 놓고 다른 엉뚱한 일만 결의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그러한가? 사도들이 결의한 것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구원은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 것이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하게 ‘믿음으로’이다. 모세의 법에 따라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행해야 구원 받는다는 주장은 거짓임을 판정한 것이다. 이는 믿음에 할례나 율법을 더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사도들은 믿음과 율법의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결의했고, 이를 모든 교회에 선포했다.
그렇다면 “일단 네 가지 짐만 지게하고, 나머지는 안식일마다 율법을 배워 모두 지키도록 했다.”는 메시아닉 교회의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사도들은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은 짐과 멍에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해치는 것으로 규정했다. 믿음과 율법의 공존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이다.
2)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 형제의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말(갈 5:1-7)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갈라디아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종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이었다(갈 2:4). 그런데 그들은 할례는 행하고 율법은 지키지 않은 자들이었다(갈 6:13). 즉 할례파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한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갈라디아서 전체를 살펴보는 것이 더욱 유익하겠지만 이 단락만으로도 우리는 믿음과 율법의 공존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판별할 수 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의 가르침을 따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2절).
② 그런데 할례를 받은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갖게 된다(3절). 왜냐하면 그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으므로, 그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다른 율법도 지켜야 한다.
③ 심각한 것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다(4절).
④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6절)고 한다. ‘믿음뿐’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의식한 말이다.
⑤ 율법을 지키려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버리고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1절).
율법을 지키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버리고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이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며,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믿음과 율법은 공존이 불가능하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율법의 회복을 통해 대 부흥을 준비해야 한다.”는 논리는 믿음과 율법의 공존을 말하는 것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며,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갈 3:2-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가지고 의의 행함이 없이 단지 믿음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믿음을 한참 오해한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그 성령으로 인해 우리는 의롭게 된다(갈 5:5).
3) 율법을 자랑하는 로마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말(롬 7:1-10)
2장 “유대적 뿌리 찾기 운동은 성경적인가?”에서, 로마서는 로마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복음을 제시했음을 말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 원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무엇인가? 율법은 유대인의 자랑 중에 으뜸이었다. 로마서 7장은 이 믿음과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 본문의 내용은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우리가 궁금해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율법의 공존은 가능한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①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남편’과 ‘다른 남자’로 비유하고, 믿음을 가진 자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음녀’에 비유했다(1-3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과 율법의 공존은 불가함을 말하는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로 율법으로부터 ‘벗어남’과 ‘죽음’을 위한 것이다(2, 4절). 따라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③ 율법에 대한 죽음은 ‘다른 남자’인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4절).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에게 속할 수 없고, 하나님을 위한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④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가 ‘육신’에 있다는 것을 뜻하고, 육신 안에 있는 죄의 정욕으로 인해 그의 삶은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을 뿐이다(5절).
⑤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다(6절).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버리는 행위이다. 즉 성령을 배제시키고, 자기 육신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이다.
⑥ 율법은 죄를 살아나게 하고, 죄에게 그리스도인에 대한 권세를 부여하게 된다(8-9절). 즉 율법을 지키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그리스도인에게서 다시 죄를 살리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율법은 자기 육체로 지키는 것이므로, 육체 안에 있는 죄가 다시 용트림을 하며 살아나도록 하고, 이로써 죄의 삯인 사망이 다시 왕 노릇하게 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심길 때 은혜가 왕 노릇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참고, 롬 5:21).
사실이 이런데 메시아닉 교회가 “은사의 회복이 있은 후, 최종적으로는 율법이 회복될 것이며, 이것이 대 부흥과 대 추수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 율법을 지키자는 것은 인간적인 열심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적인 열심은 언제나 거룩해 보이고, 경건의 외양을 갖추고 있어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을 대적하는 것이며, 은혜와 복음을 모르는 영적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3. 그리스도인과 구약성경
성경과 교회사를 검토해 본 결과, 믿음과 율법의 공존은 불가능함을 알았다. 그러나 교회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거부하면서도, 구약성경을 정경에서 제외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이는 모순이며,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차이를 아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구약성경을 받아들인 이 이중적 태도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그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미 보여주었다.
1) 구약성경을 읽고,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복음의 빛 아래서 재해석 되어야 한다.
구약성경을 포함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17절). 그러나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에는 주의를 요한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재해석되고, 복음의 빛 아래서 적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대부분이 실재(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종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은 자기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다. “(요 2:19-21)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따라서 율법(토라) 중에 출애굽기 25-40장까지의 성막에 관한 기록 대부분을 문자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한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꼴이 된다. 성막이나 성전은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육체로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다.
② 예수님은 자기 육체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다.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따라서 토라 가운데 제사를 드리는 법과 제사장에 관한 법(레 1-10장)을 문자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③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롬 14:17). 또 사람은 마음을 깨끗이 할 때 진정으로 깨끗해지며(막 7:20-23),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행 15:8-9).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막 7:20-23)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행 15:8-9)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따라서 정결에 관한 법이나 성결법을 규정해 놓은 레위기 11-27장의 대부분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난다.
토라는 흔히 모세오경을 말한다. 그 가운데 지켜야 할 계명들을 기록한 법전은 출애굽기 20장부터 민수기 10장 10절까지, 그리고 신명기의 말씀이다. 나머지는 토라에 속하지만 설화체(이야기체)로 기록된 토라이다. 이야기체로 쓰인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킬 수는 없다. 그나마 민수기 1장부터 10장 10절까지의 법들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여행하기 위한 법들이다. 따라서 그 법을 오늘의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한다면 우스꽝스럽게 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출애굽기 20-23장까지와 신명기의 말씀인데, 이 율법들도 조심해서 읽으면 오늘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율법을 회복해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 사실은 안식일과 유대 절기 등을 지키자는 주장, 즉 기독교를 유대교화하자는 주장이다.
④ 더군다나 예수님은 출애굽기 20-23장의 말씀들조차도 예수님의 권위로 재해석하셨다(마 5:21-48을 보라). “(마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진리(실재, 혹은 몸)이신 예수님이 오신 후 믿음이 나타났을 때, 율법은 자기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림자이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을 저주한 까닭은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미혹했기 때문이다.
(갈 2:4-5)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2) 하나님을 섬길 때 율법이 아닌 성령으로 섬겨야 한다.
이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이며,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메시아닉 교회는 구약과 신약이란 용어는 본래 없던 것이고, 주후 180년 전후에 멜리토(Melito)가 구약이란 용어를, 190년 전후에 이레니우스(Irenaeus, 140-203년)가 신약이란 용어를 만들어내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 용어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렘 31:31-34).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그 새 언약에 관한 내용들을 담은 책이 신약성경이다. 옛 언약 아래서는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는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였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며(갈 2:20),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며, 인도하신다(갈 5:24-25). 그러므로 옛 언약 아래서 율법으로 살던 사람에게는 죄가 왕 노릇했지만, 새 언약 아래서 성령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왕 노릇한다(롬 5:21).
3)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려는 목적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읽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역행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사역의 그림자나 모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읽을 때 그렇게만 읽어서는 올바른 성경읽기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읽기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말씀 속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말씀을 통해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한 예를 들면,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한 자니 칠일 동안 진밖에 유할지니라.”(민 19:11)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 분은 거룩하신 분이며, 우리 중에 임재하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거룩을 요구하신다.” 이렇게 읽을 때 율법은 버릴 것이 없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정경에서 제하는 것은 이단적 행위이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이단적 행위이다. 그 둘 사이에 있는 참된 성경읽기를 역사적 교회는 취해 왔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바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다음 장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을, 이후로는 교회를 사용하신다.”는 것에 대해, 메시아닉 교회는 ‘대체신학’에 물든 것이라고 공격한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열방은 이스라엘에 접붙임이 되어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풍성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구원사의 중심은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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