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스크랩] "엘리야가 먼저 와서" 카페의 주장의 오류에 대하여!

하늘감동 2012. 9. 30. 16:37

  "엘리야가 먼저 와서"라는 카페가 있는데 저는 그 카페지기를 잘 압니다. 예수님을 믿고 크게 변화된 사람이고 저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카페의 주장은 성경을 곡해한 것이며 명백한 이단사상입니다. 이단이 한둘도 아니고 제가 이단 연구가도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경우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 카페지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미혹에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그분이 제게 보내준 주장을 존경하는 강금성 선배님에게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공정한 마음으로 읽으시고 분별하셔서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늘 그 글의 일부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 카페의 카페지기와 안타깝게도 뉴욕에 이런 이단사설에 미혹되어 있는 제가 아는 교회와 성도들이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 글을 올려드립니다. 영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강 선배님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님, 이 글을 통해서 그분들이 모두 돌이키게 하소서!

 

 

 

 

 

‘히브리 관점으로 성경 읽기’에 관하여

 

 

  강 금성 목사입니다. 일반 크리스천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최근 히브리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그 결과물로 기독교를 재평가하며, 토라의 회복 운동에 열심을 내는 이들이 교회 한 켠에서 점점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유대교와 아주 유사하여 구약에 기록된 의식법을 포함한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주장하며, 주의 재림 이전에 마지막으로 회복될 것은 토라(율법)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다른 점은 제사장의 직분, 즉 레위 계통의 제사장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예수님으로의 교체와, 속죄제물로 동물을 잡던 것을 예수님께서 단번에 이루셨으므로 더 이상 동물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 두 가지 변화일 뿐이라고 합니다.

  특히 ‘히브리 관점’의 사역자들은 기독교는 본래 히브리적인 것이었는데, 그 후 점점 헬라화가 이루어져 본래의 기독교가 크게 왜곡되었다고 진단합니다. 그 한 예로 초대 교회는 안식일을 비롯하여 유월절과 같은 구약의 히브리 절기를 지켰는데, 그 절기들을 폐하고 주일과 부활절과 같은 현대의 절기로 바뀐 것을 들고 있습니다. 그 일은 특히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극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에는 진실성이 있고, 제시하는 근거들도 사실성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도 있고, ‘히브리 관점’ 운동에 참여하는 일부 크리스천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그 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 관점 운동은 그 속에 심각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약의 기독교는 출발부터 헬라적이었다.

 

  히브리 관점의 사역자들은 기독교는 본래 히브리적이었고, 히브리적인 기독교를 헬라화시킴으로써 기독교에 심각한 왜곡을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그 한 예로, 구약에서 율법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토라’인데, 이 토라가 헬라어로는 ‘노모스’, 영어로는 'law', 그리고 우리말 ‘율법’으로 번역되면서, 본래의 토라의 의미가 왜곡되었다고 합니다. 또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를 명심하라고 하는데, 그는 가말리엘 아래서 수학한 토라 학자로 바리새파 출신이며 누구보다 바리새인의 누룩인 그들의 전통과 사람의 계명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었음을 지적합니다. 그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도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신약성경 27권 전체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언어는 그 사상 체계를 담아내는 그릇이며 수단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기독교가 헬라적 사고 위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신약 성경 27권 중 대부분은 헬라 기독교인들을 위해 쓰인 책입니다. 바울 서신 13권은 모두 헬라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보낸 서신입니다.

  셋째, 신약성경의 저자 가운데는 헬라인도 있습니다. 누가는 헬라인입니다. 그가 쓴 책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인데, 저자별로 볼 때 가장 긴 분량을 썼습니다. 특히 누가는 이 책들에서 이방인의 구원과 헬라 교회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복음(누가복음)과 역사(사도행전)의 형식으로 펼쳐냅니다.

  넷째,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 하며, 그의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버리고, 헬라식 이름인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이름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가 자신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바꾼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위의 증거들은 기독교가 출발부터 얼마나 헬라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기독교는 본래 히브리적인 것이었고, 현재의 기독교는 헬라적으로 왜곡한 것이며, 헬라적 관점은 잘못된 것이며 히브리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한 것이라야 옳다. 그래서 히브리적 관점 운동이 정당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 말 성경에 ‘율법’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의 ‘토라’를 헬라어 ‘노모스’로 번역할 때 일어난 그 의미의 왜곡보다, 히브리 관점으로 신약성경과 기독교를 이해하는 과정에 더 크고 심각한 왜곡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2. 사도행전 15장의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율법을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도행전 15장 1-35절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라는 주제로 모든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많은 토론을 거친 후 다음의 두 가지를 결의한 중요한 회의입니다. 그 둘은 첫째,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 둘째, 네 가지를 지켜야 한다. 즉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관점 사역자들은 그 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에 대해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방인들에게 시작부터 너무 큰 짐을 주지 않기 위한 결정으로 최소의 요구 조건 네 가지부터 지키도록 한 것이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글인 토라가 읽혀지고(21절) 사람들로 배우게 하였기 때문에 나머지 계명도 배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토라 안으로 인도 받았다고 여겨집니다.”

 

  이 해석은 너무나 아마추어적이고 억지입니다. 이 회의의 발단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다툼 때문인데, 유대에서 내려온 어떤 이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1절)고 가르쳤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는 구원을 위해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습니다(5절).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으므로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안디옥 교회는 대표단을 예루살렘 교회에 파송하고,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이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많은 변론이 있었는데,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인해 그 변론은 끝나게 됩니다.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의 말에 의하면 할례나 모세의 율법은 ‘멍에’일 뿐이고, 구원은 ‘주 예수의 은혜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이유로 유대인이나 이방인 누구에게든지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고, 이방인들의 목에 멍에를 두는 행위입니다(10절). 그런데 왜 사도들은 네 가지 계명을 지키라고 요구하였을까요? 19-21절을 보면 그 이유가 밝히 보입니다.

 

(행 15:19-21)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이것은 야고보의 발언인데, 21절의 ‘이는’이란 단어 헬라어 ‘가르’(γαρ)는 이유를 나타내는 불변사로써 ‘왜냐하면’의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모두 ‘for'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이란 단어는 19-20절이 ‘결과절’이며, 21절은 ‘원인절’임을 말합니다. 즉 21절의 이유 때문에 19-20절의 일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읽고 있기 때문에, 네 가지 짐-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라-을 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데, 하나는 히브리 관점으로 보는 바처럼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글을 읽기 때문에 우선 네 가지만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차츰 그들로부터 율법을 배워 모든 율법을 지키도록 했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로부터 모세를 전하는 자가 각 도시마다 있으므로 그들과의 충돌을 완화시키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선교적 측면에서 네 가지를 지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적 관점의 사역자들은 후자는 헬라적 성경 읽기의 결과물로써 왜곡된 해석이고, 전자의 해석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선 네 가지 계명을 지키고 차츰 모든 율법을 지키게 한 것이다.”는 히브리 관점의 해석은 다음 구절을 통해 잘못된 해석임이 드러납니다.

 

(행 15:22-25)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25)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첫째, 모든 사도들과 장로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주장한 바, 즉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옳다고 결의했습니다. 그 증거는 사도들은 회의의 결과를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이방인들에게 전하기로 하는데, 그 역할을 바울과 바나바에게 맡긴 것이 그 증거입니다. 교회는 유다와 실라를 그 두 사람과 함께 보냄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말하는 말에 신빙성을 더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둘째,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라고 가르쳤던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24절).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사도들과 전혀 상관이 없고, 아는 바도 없으며, 사도들의 입장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때에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고, 마음을 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네 가지를 지키도록 한 이유는 구원론과 관계된 결정이 아니라 선교적 관점에서 결의한 것입니다. 즉 각 성에서 예로부터 모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복음이 그들 사회에 일으킬 급격한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네 가지 ‘짐’을 지우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짐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교적 측면에서 결의한 것을 구원론 문제로 끌어오고, 더군다나 모세의 율법 전체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마음이 깨끗해지고 사람이 변합니다. 사도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거부였지, 이방인에게 율법 준수를 한꺼번에 요구하는 것이 무거운 짐이니까 우선 네 가지만을 요구하고, 계속해서 회당에서 율법을 배워 온전히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로 볼 때, 우리는 히브리 관점 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히브리 관점 운동은 사도들이 배격했던 율법주의로의 회귀를 도모하는 시대착오적인 운동이며,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하고 교회를 혼란케 하는 것이다.

둘째, 히브리 관점 운동은 복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며,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율법주의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정의는 히브리 관점의 사역자들에게는 과도한 누명으로 여겨지겠지만, 사실입니다. 히브리 관점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복음’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3. 갈라디아서는 율법은 이미 폐하여 진 것이며, 날과 절기를 지키는 이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을 시작으로 루터나 칼빈을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혼란케 한 자들의 정체는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해왔습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정체는 ‘율법주의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갈라디아서가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침으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날과 절기를 지키려는 이들에 대한 경고’라고 해석해 왔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관점의 사역자들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폐하여진 것이라고 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이며, 갈라디아 교회가 다시 돌아가려 했던 ‘천박한 초등학문’(4:9)은 오경의 의식법이 아니라 과거에 그들이 섬겼던 ‘이방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4:10)의 ‘날과 절기’는 안식일이나 초하루나 구약의 절기가 아니라, ‘이교도의 날과 절기’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헬라적 관점으로 갈라디아서를 읽은 결과 바울이 마치 율법 전체를 폐한 것처럼 왜곡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관점의 사역자들은 갈라디아서를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믿고, 무법한 삶을 살다가 결국 불법을 저지를 수 있음에 대한 경고’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기독교와 히브리 관점 운동은 갈라디아서에 대하여 서로 다른 해석을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대한 그 둘의 쟁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폐했다(2:18)고 말하는 율법에 대하여, 전통적인 교회는 모세 오경을 포함한 구약 성경의 전체 율법이라고 하는데 반해, 히브리적 관점은 구약 성경의 율법이 아닌 ‘장로의 유전’이라고 한다.

둘째, 갈라디아 교회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의해 돌아가려했던 ‘천박한 초등학문’(4:9)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교회의 입장은 율법이라고 하는데, 히브리적 관점에서는 이방 신이라고 한다.

셋째, 갈라디아 교회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의해 지켰던 ‘날과 달과 절기와 해’(4:10)에 대해, 기존 교회의 입장은 모세의 율법(오경)에 기록된 안식일을 비롯한 구약의 절기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히브리 관점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을 갖기 전에 지켰던 이방 신을 섬기던 종교의 날과 절기를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히브리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의 주장대로, 문맥 안에서 그 정확한 의미를 찾아야 하며, 시대적 상황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 위에 하나를 더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쟁점이 되는 그 용어들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도 살펴야 합니다.

 

  1)갈라디아서에서의 ‘율법’

 

  바울은 율법을 ‘헐었던 것’(2:18)이라 합니다. 분명 바울은 율법을 폐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관점의 사역자들은 사도 바울이 폐한 것은 장로들의 유전이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토라의 회복이 일어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현재의 주일이나 부활절과 성탄절 대신에 모세오경에서 명한 안식일과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폐한 율법은 장로들의 유전이 아니라, 모세오경을 포함한 구약 성경의 율법임이 갈라디아서에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2:18-19 등)과 ‘장로들의 유전’(1:14, 내 조상의 전통)이란 용어를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바울은 율법을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3:19)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폐했다고 말하는 율법은 장로들의 유전일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천사들을 통하여 준 것’은 구약 성경의 율법이지(참고, 히 2:2), 장로들의 유전이 아닙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율법 학자들의 연구 결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른 한 이유는 ‘장로들의 유전’은 중보자에 의한 것도 아닐뿐더러, ‘장로들’이란 단어가 의미하듯 그들의 수는 여럿이지 한 중보자가 아닙니다. 이 구절의 ‘한 중보자’는 모세를 일컫는 말로, 결국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은 모세오경을 의미합니다.

셋째, 갈라디아서에 언급된 율법이 모세오경의 율법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또 다른 증거는, 사도 바울이 율법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후 430년 후에 생긴 것’(3:17)이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지 430년 후,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한 중보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다섯 권의 책, 바로 오경입니다. 하지만 장로들의 유전은 그보다 훨씬 후대의 포로기 이후에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율법이란 용어가 모세오경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관점을 좇는 이들은 사도 바울이 폐한 것은 모세오경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토라(율법)의 회복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다음의 말씀들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1:6-9)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2: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2:21, 3:1-3)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4:21, 30)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5: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7-10)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2) 천박한 초등학문과 날과 절기

 

(4:8-11)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전통적으로 교회는 9절과 10절의 ‘천박한 초등학문’을 ‘율법주의’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오경에 기록된 ‘안식일,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절기, 그리고 안식년’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관점 사역자들은 전통적인 교회의 해석을 헬라화로 인한 왜곡이라 보고, 이를 ‘이방 신’과 이방 종교의 ‘날과 절기’라고 주장합니다. 다음은 그들의 주장입니다.

 

“전통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은 유대인보다 이방인이 더 많은 지역으로 바울이 메시지를 전하는 대상은 믿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며,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로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에게 종노릇하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천박한 초등학문’은 모세오경 중 의식법이 아니라, 이 이방인들이 과거 하나님을 믿기 전에 섬겼던 이방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맥을 통해 볼 때 10절의 그들이 지켰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이방인들이 과거 안식일과 여호와의 절기를 지켰을 리 없으므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제사와 고사 및 명절(절기)이 있듯 그들 역시 이교도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과 절기라고 하면 무조건 여호와의 절기라고 해석하는 것은 문맥과 시대상을 무시한 것이라고 히브리 관점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이교도의 날과 절기를 지킨 것에 대해 바울이 한탄하고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렵다고 말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얼핏 읽으면 히브리 관점을 추종하는 이들의 해석이 옳은 듯 보입니다. 그러나 문맥과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것은 오히려 ‘히브리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이들입니다. 관심의 초점은 두 가지인데, 8절의 ‘그 때’와 9절의 ‘이제’가 가리키는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과, 8절의 ‘하나님이 아닌 자들’과 9절의 ‘그들’은 동의어인데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두 가지를 알아야 ‘천박한 초등학문’과 ‘날과 달과 절기와 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해집니다. 먼저 ‘그때’와 ‘이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보겠습니다. 히브리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이들은 그때는 이방 신을 믿던 때이고,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때라고 해석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①3:23절에서, 그 때는 ‘믿음이 오기 전’이며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갇혀 있는 때’를 말하고, 이제는 ‘계시될 믿음의 때’를 의미합니다.

②3:24-26절에서, 그 때는 ‘율법이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를 인도하던 때’를, 이제는 ‘믿음이 온 후’이며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않는 때’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때’를 가리킵니다.

③4:1-2절에서 그 때는 (우리가 비록 유업을 이을 자이지만) ‘어렸을 동안’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종과 다름이 없어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때’를 말하고, 이제는 ‘그 아버지가 정한 때’가 지나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서 벗어나 모든 것의 주인 노릇을 하는 때’를 가리킵니다.

④4:3-6절에서 그 때는 ‘우리가 어렸을 때’로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하던 때’이며, 이제는 때가 차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그 아들의 영을 보내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때’를 의미합니다.

⑤4:7절에서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 유업을 받게 된 때’를 말합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4:8절의 ‘그 때’는 믿음이 나타나기 전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던 때이며, 초등교사에게 초등학문으로 인도되던 때입니다. 히브리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이들이 그 때가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이 이방신을 섬기던 때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문맥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 8절의 ‘하나님이 아닌 자들’은 이방신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유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업을 이을 ‘아들’로 비유하고,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 혹은 주인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자들’은 그 아들이 어렸을 동안 맡아 가르치고 인도하는 초등교사, 후견인, 그리고 청지기들인데, 그것은 곧 율법입니다. 이방신이 유업을 이을 자들이 어렸을 때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거나 후견인이나 청지기가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이 종노릇하던 아들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9절의 ‘천박한 초등학문’은 유업을 이을 자들이 어렸을 동안 초등교사로부터 배운 율법의 각 계명이나 유대교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히브리적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의 주장처럼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믿고, 무법한 삶을 살다가 결국 불법을 저지를 수 있음에 대한 경고’라기보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살던 이들이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할례와 유대교 절기를 지키도록 하여 교회를 유대화시키려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3)복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히브리 관점 사역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문맥과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는 히브리 관점으로 본문을 읽습니다. 듣기 좋은 말로 ‘히브리적 관점’이지 사실 그들은 유대교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히브리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위험은 사실 앞에서 언급한 것들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의 파괴력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심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그 복음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으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1:6-9).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혼돈케 했던 이들은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율법은 지키지 않았습니다(6:13).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유대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며, 다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모세오경에서 요구한 할례와 날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들의 주장대로 할례를 행하고 날과 절기를 지켜야 한다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생긴다는 것을 주지시키며(5:3),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며(2:21),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5:4).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다른 복음을 거부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6:14). 십자가가 바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고 달려 죽으신 것이며, 그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함 받아 구원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2:20, 5:24-25, 그리고 6: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24-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합니다. 또 내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으로 살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못 박히게 하여, 나로 더 이상 세상의 종노릇하지 않도록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이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이 복음에서 떠나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이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관점의 사역자들이 현대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왜곡해서 행함 없는 믿음을 가지고도 구원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잘 한 일이지만, 그것을 토라(율법)의 회복으로 처방하려 한 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 결핍에서 나온 큰 오류입니다.

 

  이 글이 ‘무엇이 진리인가?’를 밝히고자 한 것이기에 제 의도와는 다르게 논쟁적이고 상대방의 주장을 공격하는 투로 썼습니다. 그러나 저는 히브리적 관점의 사역자 중에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분들이 있음을 알고 있고, 그들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이 글이 그분들에 대해 정죄의 글이기 보다 선물이기를 원합니다. 히브리 관점에 대해서 주장하는 글을 읽으며 제가 깨달은 것은 자신의 순수함과는 다르게 ‘히브리 관점’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위험을 제대로 파악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첫째, 복음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는 것,

둘째, 그리스도의 비밀을 모르고 있는 점,

셋째, 새 언약의 영광스러움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 세 가지는 왜 유대교가 아니고 기독교인가를 말해주는 것인데, 히브리 관점의 사역자들은 이 세 가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안다 할지라도 이 세 가지를 현저히 약화시키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면 관계상 다음 글에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묵상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겸손  new

  저는 "엘리야가 먼저 와서" 카페지기가 보내 준 그분들의 주장에 대하여 읽어보고 관련 성경구절을 일일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문맥을 벗어나서 심각한 오류에 빠져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것은 단순히 해석상의 차이가 아니라 명백한 이단사설이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주의 혹은 갈라디안주의 이단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좋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의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글을 통해서 그분들이 모두 깨닫고 돌이켰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큰믿음교회
글쓴이 : 겸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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