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령님을 소멸시킬 때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라 중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본문에 제시된 주제를 다루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자 합니다.
첫째. 어떻게 성령님이 정신에 영향을 미치시는가?
둘째. 성령님의 알려진 행동 양상에서 얻는 결론은 무엇인가?
셋째. 성령님을 소멸한다는 것을 무슨 뜻인가?
넷째. 왜 성령님이 소멸되시는가?
다섯째. 성령님을 소멸한 후의 결과는 무엇인가?
어떻게 성령님이 정신에 영향을 미치시는가?
첫째, 성령님은 어떻게 정신에 영향을 미치시는가 알아보겠습니다.
성령님은 물리적인 작용이나 직접적인 물리적 힘의 간섭을 통해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의지의 작용은 그런 식으로 영향을 받지 않으며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런 주장은 매우 불합리합니다. 물리적 작용이 물리적 현상을 산출하듯이 자발적인 정신적 현상을 산출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행위의 이념과 상충됩니다. 행성을 움직이는 물리적 힘이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것은 불합리하며 타당하지 않은 주장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령님이 진리를 통해 인간 정신에 영향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사람이 진리를 보고 행동하도록 설득하십니다.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진리를 제시하여 그들에게 영향을 주듯이 말입니다. 제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정신에 진리를 제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는 양상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붓과 입술과 몸짓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말의 언어와 자연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수단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진리를 가지고 정신에 이르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가 진리를 암시하며 따라서 성령님은 큰 능력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셔서 진리에 효력을 부여하십니다.
때로는 주님이 설교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참으로 그분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든지, 목표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는 자발적인 행위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 주제에 관하여 침묵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정신의 본성으로부터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들의 본성으로부터 성령님이 물리적 영향력이 아니라 도덕적 영향력을 정신에 행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추론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사람을 회개시키고 성결케 하실 때 진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에 관하여 성경의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활동 양상에서 얻는 결론은 무엇인가?
둘째, 다음으로 우리는 이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 무엇이며 이 사실에서 무엇을 이끌어 내야 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전능하시지만, 성령님에 의하여 발휘되는 하나님의 도덕적 감화력은 저항에 부딪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님이 물리적 전능으로 사람을 움직이실 경우 그분의 영향력을 방해할 수 있는 인생이 없음을 곧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성령님의 능력은 불가항력적일 것입니다. 누가 전능에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사람이 성령님께 저항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작용의 본질이 그것을 함축하며 성경이 그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작용의 본질은 동기에 순응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빛을 따를 수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의 자발적 행위를 함축합니다. 이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데서는 도덕적 작용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능력이 어떤 시점에서 중단하든지 그 순간에 도덕적 작용도 중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가 도덕적 행위자의 것이라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우리의 도덕적 자유는 틀림없이 남아 있습니다. 이 자유는 파기될 수 없고 어떤 경우든지 무효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발적 작용을 파기하신다면, 필연적으로 우리의 도덕적이며 책임있는 행위도 동시에 종결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리적 전능으로 인간의 팔을 붙들어 살인이나 방화의 행위에 그 팔을 강제적으로 사용하신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의 도덕적이며 책임 있는 작용은 완전히 폐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똑같이 불가항력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를 사로잡아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강제적으로 행위하게 하신다면 이것 역시 똑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덕적 감화력이 불가항력적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은 의지와 도덕적 행위의 본질에 관한 완전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의 의지는 오직 진리와 그 진리가 어떤 행동의 동기가 될 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럼 감화력의 정도가 커지더라도 의지의 자유를 막지 않습니다. 깨달은 진리가 여전히 살아 있거나 마음의 동기가 어느 정도 존재할 때 의지는 굴복하거나 굴복하지 않을 동일한 능력을 갖습니다. 이 깨달은 진리에 일치해서 행동하거나 거기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강제력과 도덕적 작용은 대립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것들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철저히 배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전능하시다면 도덕적 행위자를 강제로 도덕적 행동을 하게 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이 사실은 물리적 능력이 아니라 도덕적 능력에 의하여 수행된 하나님의 어떤 일이든지 사람에 의하여 방해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저항하는 특별한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계시된 진리를 쓰셔서 일을 수행하신다면, 사람이 이 진리를 연구하고 깨닫는 일에 게으르거나 알면서도 그 진리를 순종하지 않을 아주 절박한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확실히 두려운 일은 이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그 진리의 영향력으로부터 그 마음을 막는 일을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멸은 무슨 말인가?
셋째로 성령님을 소멸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게 되면 그것을 즉각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이 빛을 비추어 우리의 정신을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의무에 관한 진리 속으로 이끄는 것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가령 성령님은 정신에 빛을 비추사 성경의 의미를 알게 하시고 성경이 스스로 제시하는 교훈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진리에 대해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눈을 완전히 돌리고 전혀 보지 않을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가 보이는 경우에도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하나님은 당신의 정신 앞에 이 진리를 계속 두시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개인적인 체험에 의하여, 성령님이 계시된 진리에 놀라운 빛을 비추사 이 진리가 새롭고 매우 인상적인 형태로 정신 앞에서 나타나 놀라운 힘으로 정신에 작용하게 하실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이 빛은 소멸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종의 열기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님이 일하실 때 진리가 동반되는 온기와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모셨으며 그의 영혼이 따듯하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을 모시지 않았으면 그의 마음은 냉랭합니다.
거룩한 영이 만드신 이 생명의 열기는 소멸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성령님께 저항하면, 진리가 그의 마음에 역사하는 생명의 힘이 틀림없이 소멸될 것입니다.
왜 성령님은 소멸되시는가?
넷째, 다음으로 성령님이 왜 소멸되시는가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성령님이 자기들의 정신에 제시하시는 진리에 직접 저항함으로써 성령님을 소멸하곤 합니다. 때로는 진리의 능력에 당분간 순복하지 않으려고 마음먹고 의도적으로 진리에 저항하곤 합니다. 그런 경우, 진리에 저항하는 의지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실 의지는 도덕적 문제에 언제나 저항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의지로 하여금 강제로 진리에 순복하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강력하게 정신에 밀려드는 그런 경우에는 성령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임재하셨다고 추청할 만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경우에 특별히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성령님을 소멸하는 심각한 위험에 처합니다. 그들은 제시된 진리를 미워합니다. 진리가 그들이 선택한 방종의 길을 폭로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주장에 성가시고 괴롬을 당한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주의 영께 반항하고 성령님을 소멸합니다.
틀림없이 당신은 그런 경우를 종종 보았으며, 그럴 경우 흔히 발생하는 또 다른 현저한 사실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에 저항하여 싸우는 짧은 기간이 지나 갈등이 끝나면 특정한 진리가 정신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은 진리의 능력에 둔감해집니다. 그는 쉽게 진리를 간과하고 그것을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내동댕이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이런 일이 실패하고 진리가 그의 정신 앞에 제시되지만, 그는 진리의 주장에 저항하기가 비교적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진리 때문에 성가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결국 성령님을 소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진리 때문에 성가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런 경우를 보았다면, 의심할 나위 없이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강력히 밀려들 때 그들의 마음이 반항적이고 민감해지며 화를 내며 더욱 완강해지다가 결국 갈등이 가라앉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하며, 따라서 그들에게 죽은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우 어슴푸레하게 그것을 파악할 뿐이며 거기에 신경을 전혀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 봅시다.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 정도가 이런 경험을 했습니까? 혹시 진리가 여러분의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까지 진리에 저항하진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소멸한 것으로 결론지어도 됩니다.
종종 오류를 지지하려고 애쓰는 바람에 성령님을 소멸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릇된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것을 지지하는 주장을 펼칠 만큼 어리석습니다. 그들은 확신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오류를 주장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님을 소멸하며 지혜롭지 못하게 거짓말을 옹호하고 그것을 믿는 데 빠집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릇된 것을 옹호하고 주장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영을 소멸하게 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목격해 왔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거짓말을 믿고 그 속임수에 빠져 죽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또 무자비한 판단이 성령님을 소멸시킵니다.
아마 다른 사람의 동기를 비난하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판단하는 것만큼 성령님을 소멸시키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으며, 사랑의 법에 적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런 일을 싫어하시고 그 일에 탐닉하는 자들로부터 돌이키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모질고 욕하는 말에 근심하십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을 근심시키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의 영을 근심케 하여 완전히 돌이키게 했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나쁜 기분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 혹은 공동체에게 나쁜 기분이나 마음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영은 억제되고 소멸됩니다. 그들은 종교의 부흥이 얼마나 갑자기 중단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더 이상 힘 있는 기도도 없고 회개하는 죄인도 없습니다.
종종 진리로부터 관심을 돌이키는 일에 의해서 성령님은 소멸되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진리를 통하여 일하심으로, 성령님이 우리 마음 앞에 두시는 이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으며, 만일 그런 경우가 되면 틀림없이 성령님은 소멸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주제에 과도하게 마음이 들떠서 성령님을 소멸하곤 합니다. 어떤 주제가 실제적이며 거룩한 진리와 낯선 것이라면 강한 흥분이 일어나 그 진리에서 관심을 돌이켜 진리의 능력을 거의 느낄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을 흥분시키는 주제를 보고 예민하게 느끼게 되면 그동안 구원의 중요한 일들을 대수롭게 보고 냉담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소멸됩니다.
그러나 과도한 흥분은 어떤 종교적 주제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일종의 폭팔을 보곤 했습니다. 부흥 운동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돌풍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그들은 너무 흥분되어 진리와 진리가 제공하는 도덕적 의무에 대해 건전한 견해를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적 흥분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진지한 생각을 갖게 하는 흥분도 틀림없이 존재합니다. 진리에 예리함과 힘을 줄 만큼 충분한 흥분이 틀림없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균형을 잃고 진리를 모호하고 변덕스럽게 인식하게 만드는 흥분은 언제나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편견에 빠지는 일에 의해서 성령님은 소멸되십니다. 어떤 주제를 철저하게 살피기 전에 마음이 한쪽으로 결정되면, 그 마음은 닫혀서 진리를 대적하게 되고 성령님은 소멸하게 됩니다. 큰 편견이 있을 때는 성령님이 활동하실 수 없는 듯이 보이고 따라서 성령님의 감화력은 소멸됩니다. 정신이 매우 편협하게 고정되면, 성령님의 활동이 나타나자마자 거기에 부딪힙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자기들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계속 마음을 열어 자신을 돌아보고 모든 중요한 문제를 조심스럽게 살피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도리를 포함하여 큰 문제들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합니다.
지금 나는 당신이 자신의 입장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것이 옳은 것인지 확인한 다음 자신의 입장을 굳게 견지하는 태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 자신의 입장을 예의 주시하면서, 자신이 참으로 솔직하며 모든 합당한 증거에 마음을 열어 놓는지 확인하십시오.
종종 양심을 더럽혀서 그 일로 성령님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양심을 더럽히는 것이 영혼에 비치는 하나님의 빛을 영원히 끄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어떤 주제에 관해서는 양심이 아주 예민해지다가도 다른 주제에 관해서는 전혀 양심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양심을 더럽히지 않고서도 견해의 변화로부터 행동의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경우는 양심이 죽임을 당하는 그런 것입니다. 거기서 남는 모든 것은 돌같이 굳은 듯이 보입니다.
때때로 나는 우리의 통상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의 영께서 양심과 훨씬 깊숙이 상관하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관하여 양심이 예민해져서 아주 크고 급작스러운 변화를 경험하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이 양심을 일깨워 화살처럼 예리하게 만드신다는 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양심의 질책을 받고서도 죄를 범하게 될 때, 성령님은 소멸되십니다. 양심이 모든 민감성을 상실합니다. 완전히 태도가 바뀐 사람은 죄를 금하는 양심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계속 죄를 범합니다.
때로는 특정한 죄를 범하기 직전에 정신을 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어떤 것이 그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이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 버림받게 될 것이다' 이상한 예감에 그는 단념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가 계속 덤비면, 온 정신이 두려운 충격을 받습니다. 정신의 눈이 시력을 거의 잃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덕적 인식이 이상하리만큼 교란되고 어두워집니다. 적어도 그 경우에 양심은 치명적인 침해를 당합니다. 실제로 양심에 입는 손상은 도덕적 행위의 모든 면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우에 하나님의 영은 돌이키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더이상 없다. 내가 신실하게 네게 경고해 주었으니 이제는 더이상 경고해 줄 수 없다"
이 모든 결과는 때때로 명백하게 계시된 의무를 소홀히 하는데 생깁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혹은 자기 부인을 싫어하여 의무를 알면서도 피합니다. 이와 같은 시험의 분기점에서 성령님은 그들을 의무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무관심한 상태로 이끄시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와 요구를 그들의 마음 앞에 생생하게 제시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성령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면, 영혼은 두려운 흑암 속에 방치되고 하나님의 영의 빛은 결국 영원히 소멸할 것입니다.
나는 위에서 진술한 방식으로 성령님을 소멸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번민과 낙심 중에 있는지 많이 봐 왔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이 한 젊은이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목회를 준비하는 문제로 오랫동안 시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분명하게 자기 앞에 놓여 있었는데도 그는 오랫동안 그 문제를 놓고 저울질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의무를 뿌리치고 결혼을 했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에 등을 돌려 버렸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이 그를 떠나셨습니다.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이 행한 일과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하시는 일에 관하여 마음이 완전히 강팍해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눈이 열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보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구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의 어두워지고 버림당한 영혼에는 빛이 다시 비취지 않았습니다. 목회를 준비하는 것이 더 이상 그의 의무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소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자주 지독한 번민과 신음, 자비를 구하는 외침, 그를 둘러싼 무서운 절망을 씁쓸하게 곱씹으며 여러 밤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게다가 완전히 비참해져서 양심의 질책과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예는 무수히 언급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무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처럼 거부하는 태도는 그들의 도덕적 감정과 주의 영께 치명적인 손해를 입힙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것입니다. (히10:27)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와 정념에 빠짐으로써 종종 성령님을 소멸시킵니다. 성령님이 이런 것들에 의하여 근심하시며 그래서 결국 위기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하나님의 빛을 즉시 꺼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는 정말 깜짝 놀랄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식욕에 빠져 건강을 해칩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건강을 해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파괴적인 자기 탐닉을 멀리할 것을 강력하게 재촉하시지만 계속 자기 길을 고집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단념하시고 그들은 식욕에 지배되어 영성과 영혼의 파멸에 떨어집니다. 이는 모든 형태의 관능적인 탐닉에도 해당됩니다.
부정직한 태도에 빠짐으로 종종 성령님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사업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사고 파는 일에서 속이는 일이 매우 이기적이며 이웃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거래를 추친하려는 어떤 사람이 "이게 옳은 일인가?"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저울질하다가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습니다. "내 이웃은 이 물건이 아주 필요한데 그것을 얻지 못하면 고생할 것이다. 물론 가격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내게 온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이는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행하는 것 아닌가?" 그는 자신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알지만 결국 자신의 이기심을 따르고 맙니다. 영원만이 그런 결정의 결과를 보여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오랫동안 그런 사람들에게 위험을 보여주시고 그들 앞에 진리를 두시며 마침내 좋은 기회를 잡아 그 일이 무익하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실 때, 주사위는 던져진 셈입니다. 이후로는 억제하는 것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기적인 사람은 더욱 악해져서 아마 감옥에 갈수도 있고, 지옥에는 틀림없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두려움을 던져 버리고 기도를 하지 않음으로써 성령님을 소멸하곤 합니다. 사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언제나 성령님은 소멸됩니다. 성령님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성실하게 우리를 인도하여 기도하게 하시는지를 알면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면 은밀한 기도를 드리는 날이 많을 것이며, 다른 긴급한 일에서 벗어나 마음이 편안해질 때마다 고요한 절규로 우리 마음을 계속 하나님께 쏟을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 속에서 성령님은 무엇보다 기도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억제하면 언제나 성령님을 소멸하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이런 경우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때 기도의 영을 갖고 있었으나, 이제는 전혀 없습니다. 한때는 하나님께 다가갔으나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더이상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와 죄인의 상태를 두고 신음하거나 괴로워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영이 사라졌다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애석하게도 당신은 하나님의 영을 소멸했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빛을 꺼버리고 그분의 감화력을 당신의 영혼에서 내몰았습니다.
성령님은 게으른 사귐에 의해서 소멸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악한 일이며 성령님을 확실하게 소멸하는 일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경솔과 경박한 태도로 성령님을 소멸합니다. 또한 까다롭고 성미가 급한 태도로 인해 성령님을 소멸하기도 합니다. 또 나태한 태도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은 성령님을 완전히 내쫓을 정도로 이런 태만에 빠집니다. 또 미적거리는 태도에 의해서, 그리고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을 변명하는 데서도 성령님을 소멸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멸하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이 성화의 교리와 의무에 저항함으로써 성령님을 소멸했습니다. 이 주제는 지난 몇 년 동안 폭넓게 다루었던 것입닌다. 그리고 이 교리는 또한 많은 반대를 받았습니다. 몇몇 교단은 이 교리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때때로 교인들이 개인 집에서나 강단에서 도무지 말하거나 행하지 못할 것을 말하고 행하는데 이것을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또한 많은 사역자와 몇몇 평신도가 이 교리를 대적하는 교회의 조치에 영향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그들의 영혼에 올무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가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높은 수준의 개인적 거룩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았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이 도무지 바랄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그들의 체험에 비추어 볼 때 그 수준이 너무 높아서 또 장차 그들의 취미와 습관에 맞지 않을 수준이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어떤 근거로든지 이 성화 교리와 성화의 의무를 반대하는 것만큼 성령님을 확실하거도 치명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깊숙히 자리잡는 것 중 그 백성의 성화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방해받는 것을 보는 것만큼 예수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일이 반대에 직면하여 좌절되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근심하실 일입니다. 이 나라 도처의 많은 교회에 만연된 신앙 상태를 깊이 살필 때 명백히 드러나는 이런 현실에 엄숙하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부흥이 일어나고 있으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잘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철철 넘치게 되는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일이 신속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의의 넘치는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을 만들어 내기도 전에 대답이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교회를 거룩하게 해야 할 그 진리가 퍼지는데도 성령님이 소멸되셔야 하다니! 온갖 충만한 복음의 약속이 성령님을 소멸하고 따라서 그저 마음을 강팍하게 할 뿐, 왜곡되고 저항에 부딪친다면 무엇이 구제해 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소멸하신 후의 결과
다섯번째로 나는 성령님이 소멸하신 후의 결과에 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마음의 깊은 흑암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마음은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므로 진리로부터 유익한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도 유익이나 이익을 얻지 못합니다. 성경이 그들에게는 죽은 문자가 되며 어떤 논쟁이 벌어져서 성경을 살피게 되는 경우가 아니면 그들은 대게 성경을 옆에 제쳐 둡니다. 그들에게는 성경 정독을 즐겁게 만드는 영적인 관심이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마음 상태에 있어 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영을 거부했을 때 공통적으로 생기는 그런 흑암입니다. 종종 종교에 관련하여 심각한 냉랭함과 어리석음이 생기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적인 일보다도 신령한 일에 대해서 관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세상적인 일에는 큰 관심을 가지나 신령한 종교에 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상태에 빠지곤 합니다. 세상적인 일이 현안일 때는 그들의 영혼은 완전히 깨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주제를 말하면 그들의 관심은 즉시 사라집니다. 그들을 기도회에 참석시킬 재간이 없습니다. 당신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마음은 세상적인 것에 쏠려 있습니다. 주의 영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면 그들은 무엇보다 종교적 예배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정치 모임이나 극장 전시회를 개최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의 영혼이 불길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도회나 부흥회를 연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참석하지 않습니다. 혹시 참석하더라도 그들은 그 목적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종종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적인 일에 참여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신령한 일에 그 만큼 관심을 갖는 것을 본다면 그 말을 믿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소멸할 때 그의 종교는 완전히 외형적입니다. 신령한 일에 대한 그의 생생하고 진신어린 관심은 사라집니다. 사실, 신령한 사람들은 세상적인 일을 하나님께 대한 의무로 보며 또 그것이 자신들에게는 신령한 일이므로 거기에 얼마간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지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종교에 갖가지 오류에 빠집니다.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배회하며 진리를 붙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런 사람은 이제 자신이 이전보다 종교에 관하여 훨씬 자유롭고 개명된 견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구약이 영감으로 쓰여졌다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속죄론과 사실상 성경의 모든 특징적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내게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전에는 저도 당신처럼 생각했죠. 그러나 이제는 그 주제에 관하여 좀더 자유롭고 개명된 견해를 취하게 되었어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이는 좀더 자유롭고 개명된 견해입니다. 마음이 너무 어두워서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하나님의 계시로 재가(안건을 결제하여 허가함)하셨음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이제 좀 더 자유롭게 개명된 견해를 취한다고 우쭐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영감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확언만큼 강력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 확언들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확언하는 것은 부인합니다. 참으로 대단히 자유롭고 개명된 견해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이유로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마음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 말고 무엇으로 그런 견해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도덕적 진리를 가리우고 왜곡시키는 일종의 정신적 어리석음에 떨어지게 된 사실 말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구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큼 불합리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모든 점에서 구약의 권위를 확언하며 함축합니다. 사실 구약은 하나님의 계시를 모두 담고 있지 않습니다. 더 계시되어야 할 것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많은 것을 가르치셨지만, 분명 구약의 신적 권위보다 더한 권위를 가진 것을 가르치시지는 않았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면 종종 무신앙에 이르곤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주 깊은 흑암에 떨어지게 하심으로써 무신앙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결과는 마음이 심각할 정도로 강팍해진다는 것입니다. 지성은 자신을 순종적이고 예민하게 만드는 모든 진리에 무감각해집니다. 진리 아래 있을 때 마음의 활동성은 그것의 도덕적 둔감성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우면 마치 공기처럼 유연해서 어떤 방향으로든 진리의 손길에 다라 민감히 움직입니다.
또 다른 결과는 그들의 영적 상태와 관련된 심각한 착각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의 모든 특징적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참으로 괄목할 일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때때로 성경의 거의 전부와 속죄에 의한 구원의 모든 위대한 계획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제 참된 빛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을 자기 길로 가도록 버리시고 그를 완전한 착각에 방치하셨다는 것 말고, 어떻게 그런 착각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너무나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둠을 빛으로 삼고, 빛을 어둠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완전히 그릇된 원리들이 참된 것이며 자신들의 악행을 충분히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인 양, 그런 원리들로 자신을 둘러쌉니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영을 소멸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의무가 그들에게 제시되고 재촉되는데도,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영의 사역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마음 속에 들리는 주의 음성을 알지 못하고, 진리에 대한 엄숙한 느낌이 성령님께서 그들의 지성에 사역하신 결과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의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를 취하게 될 때, 하나님이 자기들을 떠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매우 자유롭게 게다가 대단히 개명되어 이전의 오류를 버렸을 따름이라고 우쭐댑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비췸을 받고 있다고 하는 빛이 사실은 온통 흑암이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단 것을 쓴 것으로 삼는 그들은 화있을진저(사5:20) 어떤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 주제에 제공되는 실마리가 없었다면, 크게 길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방금 위에서 말한 사람이 좀 더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견해를 취하고 있다고 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나는 완전히 길을 잘못 들어선 것입니다. 적게 잡아도 수백 가지 경우에서 보았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유니테리언(삼위일체를 배격하는 기독교의 일파)과 보편구원론(모든 영혼의 구원을 믿는 자)가 되는 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와 참된 영성에 이르거나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룩함, 기도, 하나님과의 교제로 가는 길에 계속 행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심한 경우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고 공적 기도와 복음의 규례를 포기하고 은밀한 기도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포기하는 자들이라도 여전히 기도로 씨름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가까이 행하는 동안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 그의 영을 소멸하면, 차례 차례 오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리가 마음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이 진리를 분별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진실함이나 그런 특성이나 도덕적 속성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그런 다음 어둠이 아주 보편적이며 기만적인 것이 되어 사람들은 자신이 전적으로 빛 가운데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런 마음 상태는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며, 종종 절망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근심하시게 하고서 도대체 어떤 일을 행할 수 있습니까? 개인이나 한 민족이 성령님을 소멸할 때, 그들은 기만에 빠져 곧장 파멸에 떨어지게 될 수 있는 지극히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종교 운동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저항에 부딪칠 리가 없다고 어리석게 주장합니다. 예컨대 나는 사람들이 부흥운동을 중단하고 "이건 진정한 부흥 운동이 아니었어. 만일 진정한 부흥 운동이었다면 중단되지 않았겠지" 하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중단될 수 없다는 견해를 갖는다고 해보십시오. 그것만큼 위험천만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민족이 인간의 활동 없이 오직 하나님의 활동으로만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견해를 갖는다고 봅시다. 그러면 그것 때문에 그들은 완전한 파멸에 처할 것입니다. 그런 착각 아래서는 어떤 부흥 운동도 삼 일 동안 지속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할 것입니다. 엄중한 진실은 성령님이 지극히 쉽게 소멸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어떤 도덕적 활동이든지 저항에 부딪칠 수 있습니다. 부흥 운동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릅니다. 성령님이 저항에 부딪치실 수 있는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한 개인과 더불어 계실 때, 그 영혼을 파멸시키는 것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큰 위험이 있습니다. 이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성령님이 이 교회에서 종종 죄인들과 더불어 일하시는데, 많은 사람이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고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성령님의 활동의 성격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반항할 가능성과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빛을 소멸할 위험이 항상 존재합니다. 한때 사려 깊었는데 이제는 어리석게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매우 진지한 자세로 지난번 부흥회의 질문 시간에 참석했던 그 젊은이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애석하게도 그들은 성령님을 소멸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런 경우가 아닙니까? 자매 여러분 역시 그런 경우가 아닙니까? 당신은 성령님을 소멸하여 이제 지성이 어두워지고 비참하게도 마음이 강팍해지지 않았습니까? 머지 않아 조종이 당신에게 울리고 당신의 영혼이 지옥에 내려가지 않겠습니까? 곧 당신이 모든 진리를 놓치게 되고 성령님이 당신을 완전히 떠나시게 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그 영혼에서 하나님의 빛이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자들에게 이런 소원을 분명하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진리가 여전히 양심을 사로잡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지성에 번쩍이며 하늘의 빛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여전히 양심이 떨리는지를 발견합니까? 지난 번 그 젊은이의 경우처럼 급작스런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면, 영혼이 두려움이 사로잡힙니다. 당신에게 죽음이 언제 덮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자신이 행하는 바를 주의하도록 간청합니다. 여러분의 태양이 영원한 흑암에 떨어지지 않도록 성령님을 소멸치 마십시오. 해가 어두워지고 두렵고 불길한 천둥 구름 속에 들어갈 때처럼, 어둠에 떨어진 죄인도 그렇게 죽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죽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죽어 가면서 불과 폭풍과 어둠의 무서운 구름 속으로 가라앉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 장면은 일몰에 폭풍이 일고 구름이 몰려들고 우레가 마구 치고 번개가 갈라지는 것처럼 두려웠습니다. 서쪽에서 낮은 구름이 몰려듭니다. 폭풍의 영이 돌풍을 타고 다닙니다. 불을 내뿜는 우레는 마치 단단한 땅이라도 가를 듯이 보입니다. 그 두려운 구름 뒤로 해가 떨어집니다. 이제 온 세상이 흑암이니다. 그처럼 한 죄인이 영혼을 포기하고 윙윙거리는 폭풍과 번쩍이는 불의 세계로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온화한 여름 저녁의 일몰과 얼마나 다릅니까? 그때는 자연이 낮의 왕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면서 가장 화사한 미소를 얼굴에 띠는듯이 보입니다.
최근에 회개한 한 여인이 생각납니다. 그 여인은 병들어 죽음의 문턱으로 내려갔지만 그 영혼은 하늘로 충만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천사의 음악이었고, 그 얼굴은 빛났으며, 그 눈은 마치 하늘의 영광을 구현하는 듯이 번쩍였습니다. 마침내 인간의 자연적인 모습은 끝났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죽어 가는 손을 내뻗으며 옆에 서 있는 영혼들을 부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내가 갑니다, 내가 갑니다!" 하고 소리칩니다. 그녀는 떠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떠납니다" 하고 말하지 않고 "내가 가나이다"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정반대로, 죄인이 죽어 가는 것을 보십시오, 두려운 눈빛이 그의 얼굴에 번지는데 마치 그가 수천의 마귀를 본 듯합니다. 지는 해가 폭풍의 바다로 내려가며,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죽음으로 가득한 세계로 사라지는 듯합니다.
청년 여러분, 당신이 하나님의 영을 소멸하면 그와 같이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 그런 죽음 너머에는 무시무시한 지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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