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진리의 메신저 변승우목사님

[스크랩] [강순방]5 `행함이 있는 믿음이 구원의 조건인가?` 반론

하늘감동 2013. 11. 28. 00:42

이석민 목사님의 글 행함이 있는 믿음이 구원의 조건인가에 대한 반론

 

이석민 목사님의 글 "[진리수호]행함이 있는 믿음이 구원의 조건인가?'를 읽었습니다.

이석민 목사님은 변승우 목사님을 행위구원론자라고 주장하며 그 이유로, "변승우 목사나 강금성 목사나 강순방 장로는 오직 믿음외에 다른 것을 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다른 것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같은 민족으로, 같은 나라에서, 똑 같은 언어와 글을 사용하는데도 이렇게 잘못 이해할 수가 있는가? 에 또 한번 놀라게 되고 결국은 그 마음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석민 목사님은 변승우 목사님이 마치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고 행위를 통해서 구원 얻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변승우 목사님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변승우 목사님도 성경대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함 있는 산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 믿음에 순종을 더해야 참 믿음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그 안에 순종의 원리 혹은 뿌리가 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반드시 순종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순종이 나타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유발시킵니다.” (설교 금보다 귀한 믿음중에서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수정증보판 pp119-120).

 

존 웨슬리는 신생의 표적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들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명제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신조나 신구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명제에 대한 지적 동의도 아닙니다. 만약에 믿음이 그런 것이라면 마귀들도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다고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귀들도 그와 같은 믿음은 가졌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 살아 있는 기독교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며, 이는 단순한 동의 곧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마음 안에 역사하시는 내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참된 믿음은 영접기도를 따라하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명목상의 신자들처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영접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관념적인 믿음 즉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들은 불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 믿고 있다 여기고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권능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 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불법 때문인데, 그들의 삶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는 말에 드러난 대로 그들의 믿음이 행함을 산출하지 못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석민 목사님이 인용한대로 야고보서 2장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믿음 즉 구원 얻는 믿음은 행함을 반드시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이단이지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되 그 믿음은 야고보가 말하는 대로 살아 있는 믿음,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아니라면 그 믿음은 가짜고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뿐 아니라 허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변승우 목사님과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기독교 중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빈번한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복음적 순종이 칭의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빈번한 주장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존 웨슬리는 믿음으로 세워지는 율법’(웨슬리 설교전집, 대한기독교서회, 361)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적 구조의 머릿돌입니다. 우리는 칭의의 어떤 이전 조건으로서의 율법의 행위 없이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율법의 행위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행이 우리의 믿음 그리고 심지어는 모든 내적이나 외적인 성결의 결과에 따라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다 되었으니 그 어떤 성결도 필요 없다는 주장의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구실을 결코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믿음, 실로 믿음뿐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은 그 자체에 복종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그 믿음의 대상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평생에 걸친 순종으로 이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여 복종하지 않고도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여 복종하지 않으면서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분들의 일치된 주장은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거짓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이 믿음으로 다 되었으니 그 어떤 성결도 필요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날 오직 믿음을 말하면서 회개나 복음적인 순종 또는 제자가 지불해야 할 대가를 말하면 이단인 것처럼 공격하는 잘못된 행태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독교 중심>에 나오는 글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구원은 순종과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고 사람의 저주도 순종의 결핍과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저주를 받는 것은 순종의 결핍 때문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순종과 확고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순종에 달려있습니다. 순종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요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준비입니다.

영원한 축복들은 순종에 대한 상으로 주어집니다. 우리 자신의 양심 안에서 그리고 최후 심판 날에 우리의 칭의가 표명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을 상태에 있다는 합당한 증거인 순종에 달려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 영생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우리를 받아주실 때조차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일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순종을 고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마치 우리가 순종의 도덕적 탁월함을 인해 의롭다 함을 얻기라도 하는 것처럼 순종에 철저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석민 목사님의 생각에 의하면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단적인 생각을 가진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석민 목사님보다 훨씬 더 권위 있고 성경적인 분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그렇다면 왜 조나단 에드워즈는 칭의에 대해서 말하면서 순종을 이렇게 강조한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이 믿음과 순종, 믿음과 행함을 불가분의 관계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18-19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 말씀에서 믿음과 순종은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 구절은 자기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된다 하지 않으시고 순종하는 모든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것은 곧 믿는 자는 순종하는 자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고보서 2장에서 야고보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정경에서 빼려고까지 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무시하거나 마치 성경에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혹은 색안경을 끼고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합니다. 야고보의 말은 바울의 말과 충돌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했을 때 이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순종을 더해야 구원 얻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얻는데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은 믿음에서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한 것과 야고보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한 것은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하되 믿음의 필수적인 증거와 표시로서 또는 참 믿음의 증표로서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2:18)

 

그런데 변승우 목사님은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에서 이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이라는 진리를 허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믿음뿐만 아니라 순종으로도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도 야고보의 저술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믿음에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야고보의 취지였습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오직 믿음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의 논리를 볼 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행위가 우리 칭의에 필요한 것은 그것이 믿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는 행위를 말하되 믿음과 관련된 것으로서만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믿음만이 유일하고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동일하게 우리의 칭의에 관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수정증보판 p183)

 

변승우 목사님은 이처럼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면서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한 바로 그 방식으로 믿음과 함께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믿기만 하면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 얻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잠들어 있는 성도들과 교회들을 깨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석민 목사님이 2대지에 인용한 많은 목사님들의 글들은 이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구구절절이 옳은 가르침들입니다. 이것을 이단정죄의 근거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주여 주여하면서 믿노라하면서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평강하다 평강하다하면서 진정한 평강이 없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삶을 살피는 거울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석민 목사님에게 성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를 한 가지 말씀드리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고 구원받은 자가 멸망할 수 없다는 근거로 든 요한복음 1244-50절을 잘 읽어보십시오. 목사님은 이 구절에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는 부분에 강조를 해두셨습니다. 목사님은 이 구절을 믿으면 행위가 따르지 않아도 심판받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며 인용하고 있는데 문맥에 의하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뒤에서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성구는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석민 목사님이 전하시는 복음은 결단코 좁은 문, 좁은 길의 복음이 아닙니다. 존 웨슬리가 산상수훈을 설교하면서 지적한 설교에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천국 문에서 멀어지게 할 작정입니까?

 

그리고 이석민 목사님은 결론에서 “‘진짜 구원을 받는 사람도 진짜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성결교회나 감리교회 그리고 또 다른 웨슬레안 교단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무지한 말입니다. 이 글을 지금 읽고 있는 많은 예성 내 목사님들은 이런 억지에 절대 동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존 웨슬리의 고백을 직접 들어 보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파한 후에 나 자신은 버림받는 자가 되며, 나는 많은 영혼을 지옥에서 건진 다음에 나 자신은 그 지옥에 떨어지며, 많은 사람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들인 후에 나 자신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독자들이여 만일 나의 이 설교가 그대들에게 축복이 되었다면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표준 설교집 하권, kmc)

 

초대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는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께 상속권을 빼앗겨서 더 이상 그분의 자녀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주사가의 부흥을 일으켰던 윌리엄 세임모어 목사님은 구원받아도 육적 행동을 하면 구원을 잃는다고 믿었습니다. 무디도 베니 힌도 동일한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결교 신학교에서 강의했던 데일 요컴 박사, 스코틀랜드의 에버진 대학교의 하워드 마샬 박사, 그 외에도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기독교작가인 존 비비어도 동일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이런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쓰신 히브리서 강해에 보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한 번 예수 믿고 택함을 받았으니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이 쉽게 타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라도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게 될 때 그의 구원은 상실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번 예수 믿고 난 후 성령의 거룩함을 좇아 살지 아니하고 세상 정욕대로 살며 나는 한 번 구원받았으니 영원히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심지어 주안장로교회 원로목사인 나겸일 목사님과 김동호 목사님을 비롯해서 장로교회 안에서도 위와 같이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훨씬 더 성경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악한 일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속히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예성인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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