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의 설교 분석
무디가 1899년 12월 22일에 천국으로 갔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설교와 저술을 그보다 먼저 살았던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은 장소에서 그리고 더 많은 사란들을 구원하는데 사용하셨다. 그는 적어도 1억 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 가운데 7만 5천 명 정도를 개인적으로 전도 상담을 했을 것이다. 그는 흔히 일주일에 대략 4만 명에서 7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전도 설교를 했으며, 때때로 한 번에 10만 명 내지 2만 명에게 설교 했다. 어느 작가는 무디가 적어도 백만 명을 지옥에서 구출해 냈다고 말했다. 설교사에 끼친 평신도 무디의 영향은 지금도 온 세계인의 가슴에 남아 있고 설교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심령을 밝히는 등불의 역할을 수행케 되었다.
1. 설교사역 시작
무디는 그의 설교사역의 시작을 이렇게 말해 준다. ‘누군가 나에게 언제 설교를 시작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했는데 점자로 아이들이 부모들을 데려왔고 그러다가 어느새 청중의 반 정도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설교사역을 시작된 기회로 뽑을 수 있는 것은 교회 설립하는 일이었다. 무디의 바램은 사역을 통해 얻은 회심자들이 적절한 교회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떤 교회도 새 신자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디 입장에서는 직접 교회 건물을 세우고 선교 활동에서 생긴 새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개척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결국 1864년 초에 건물은 완성되었고 교회의 이름은 일리노이스트교회 (Illinois Street Church)로 정해졌다. 비록 의심할 바 없이 무디가 그 교회의 지도자였지만, 그는 설교를 하지 않았다. 무디는 여전히 설교란 자신의 주제를 넘어선 일이라고 믿었다. 설교는 주로 회중교회 신학교 출신의 학생들이 맡았다. 어느 주일 저녁, 학생들이 아무도 오지 않자 존 파웰은 무디가 설교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 후로 학생들은 아침에 설교를 맡았고 무디는 저녁 설교를 담당했다. 무디는 설교 준비가 쉽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열망으로 그 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설교의 임무를 수행해 갔다.
초기에 그의 설교는 심판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고 훗날 그는 자신의 초기 설교사역을 스스로 이렇게 비평했다. 그가 ‘나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미워하시며 양날이 선 검을 들고 그들 뒤에 서 계신다고 설교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를 오기 시작했다. 그 것은 1868년 Harry Moorhouse를 만나 그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시기였다. 그 후로 무디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성경에 몰입하며 설교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꾸었다.
2. 설교 준비 법
수년 간 주일 학교 어린이들에게 5-10분 간 설교하는 일을 하던 무디는 자신이 그 이상의 설교를 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 했다. 무디는 성경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주제별 성경’(topical textbook)이라는 책 기초해서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무디는 이 방법으로 준비한 설교를 성경 강론회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다. 보통 무디는 모인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특정한 구절 하나를 읽게 시키고 나서 그가 본문을 읽는 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 그 본문의 뜻을 명확하게 설명해 줄 만한 몇 마디 말을 첨가하거나 적당한 예화를 들었다. 할 말이 다 떨어지면 다른 구절 하나를 더 읽게 한 후 마찬가지 방법으로 본문에 대한 몇 마디 해설을 가미했다. 청중이 계속 들어감에 따라 무디는 스스로 본문을 읽어야 했고 즉석에서 해설을 생각해 낼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미리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이후에 맥윌리엄스 집에서 성경을 공부 방법은 무디가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 것은 일단 한 가지 주제나 단어를 선택하여 그 다음에는 색인이나 주제별 성경을 이용해서 선택된 주제와 연관이 있는 모든 구절들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각 구절들에 강조점을 두면서 예를 들어 내용을 증명했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 획기적인 방법에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을 여기에서 나올 것 같았다.
무디가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은 먼저 어떤 구절을 가지고 혹은 어떤 주제에 관해 설교를 할 것인가를 결정한 후, 커다란 봉투를 꺼낸 뒤 겉에다 ‘천국’ ‘시편23편’ 등과 제목이나 참고 사항을 적는 것이다. 관련된 자료, 이야기 등을 그 속에 넣는다. 그리고 설교준비를 시작할 때, 적합한 주제가 적혀 있는 봉투를 꺼내어 그곳에 들어 있는 이야기나 생각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 사용한다. 그는 자신의 주요 생각들을 정리하고 요점을 상기시켜줄 몇 구절을 노트에 옮겨 쓰며 이 노트를 성경 사이에 끼워 둔다.
많은 사람들이 무디의 설교 준비하는 비법을 배우고 싶어했다. 그에게 설교 준비법에 대한 물어볼 때 그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내게는 아무런 비법이 없습니다. 나는 성경을 구절별로 연구하기보다는 주제별로 연구하죠. 성경을 읽다가 내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이 있는 좋은 구절을 접하게 되면 나는 그 주제의 봉투를 꺼내어 그 안에 발견한 내용을 보관합니다. 나는 늘 수첩을 갖고 다니는데, 설교를 듣다가 내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으면 죄다 수첩에 적어 놓았다가 봉투에 넣어 두죠. 새로운 설교가 필요할 때면 지금까지 모아 온 자료들을 모두 꺼내죠. 모아 놓은 자료들과 내가 스스로 연구한 내용을 합치면 충분한 설교 자료가 됩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예전에 했던 설교들을 다시 읽어 보면서 여기서 조금 빼고 저기서 조금 붙이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항상 새로운 설교를 만드는 것이죠. 나는 설교를 반복하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설교를 가졌으면 그 내용을 널리 알려야 한다. 주님께서 오늘 밤 이곳에서 그 설교에 복을 내리신다면 15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곳에서나 10년이 흐른 후에도 동일하게 복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무디는 이런 방법으로 설교를 준비하면 많은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흥적으로 말 할 수 있다. 무디에게도 분명히 수백 번 반복한 설교들이 있지만 청중들은 그의 설교를 늘 신선하다고 느꼈다. 그 비결은 무디가 다룬 주제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고 부분적으로 무디의 전달 방법이 신선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디만의 설교 준비 방법이 설교의 윤곽이 변할 수 있는 융통성을 제공해 줌으로써 결국에는 실제 설교 구성도 변하고 설교 내용과 예화도 항상 새롭게 배열되기 때문이었다.
3. 성경연구 방법
토레이는 무디의 능력의 세 번째 비결 또는 하나님이 무디를 사용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고 실제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디는 심리학이나 인류학이나 과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며 아마도 그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생물학, 철학도 공부하지 않았고 이론적으로 신학을 전공하지고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학자였다. 이 세상 모든 책들을 다 합한 것 보다 더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한 권의 책 바로 성경을 깊이 있고 실제적으로 연구한 학자였다. 그는 생을 마치는 날까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 말씀을 공부했다. 보통 성경 공부를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공부를 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
그는 집에서 가장 동떨어진 방에서 홀로 하나님과 성경을 만나곤 했다. 무디는 지칠 줄 모르는 성경 연구가였다. 무디의 개인 서재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잘 정리된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디는 좋은 생각을 얻을 수 있다면 만 리라도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무디는 개인 서재에 언제나 색인집 한 권과 함께 주제별 성경 한 권을 옆에 두었다. 무디의 성경은 그가 남긴 보물 중 가장 소중한 보물에 속한다. 무디는 스무 권이 넘는 성경책을 상용했다.
무디가 막대한 군중을 끌어 모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탁월하고도 실제적인 성경 지식 때문이었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무디의 설교를 듣고 싶어했을까요? 사람들은 그가 많은 철학이나 그 당시의 유행과 추세에 정통하지는 못했으나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장 알기 원했던 책 바로 성경을 깊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디는 비록 일반적인 과학이나 철학 또는 문학, 신학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이 세상이 정말 간절히 알기 원하는 한 책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성경을 알고 성경을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들 것이다.
성경 연구에 대한 무디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휴대용 관주 성경 한 권과 ‘크루든 색인집’, ‘주제별 성경’을 한 권씩 가지고 항상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2). 항상 주머니에 성경책 적어도 신약만이라도 갖고 다니십시오. 그리고 기차 같은 공공장소에서 성경을 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3). 성경에 표시하거나 여백에 메모하는 것을 꺼리지 마십시오.
(4). 성경 공부와 묵상을 위해 하루에 15분 이상씩은 시간을 내십시오.
(5).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며 준행하기로 결심하십시오.
(6).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지혜의 눈을 밝히 당신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해달 라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7). 주님께 모든 의심의 짐을 맡기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구함에 있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8). 성경 말씀을 당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모든 말씀을 경외하십시오.
(9). 성경 말씀을 매일 적어도 한 구절씩 암기하십시오. 암송하고 있는 구절들은 일상생활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0). 당신은 설교자이거나 주일 학교 교사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경을 숙지하려고 노력하십시오.
(11). 성경 말씀을 정확히 인용하도록 하십시오.
(12).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성경 공부를 하십시오.
(13). 성경 각 권의 저자가 누구인지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 연구하십시오.
(14). ‘하나님과 보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동행하기’ 위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필요한 실제적인 성경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 사용법 연구하십시오.
(15). 매일 성경 한 장을 통독하는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한 구절이라도 그 구절이 지니는 의미를 연구하십시오.
4. 설교의 특징
헨리 드러먼드는 설교가로서의 친구 무디를 묘사하던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인간적인 능력의 면에서 볼 때, 무디의 설교에서 뛰어난 요소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마도 첫 번째 요소는 무디가 말씀을 전할 때 보여 주는 그 엄청난 확신이겠죠. 그 다음으로는 무디의 설교가 지니는 주안점과 방향성입니다. 무디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며 그 모든 말에 명확한 의미들을 싣거든요. 무디의 설교 내용이 교리에 어긋날 때도 있을지 모르며, 무디의 설교가 기교나 수사법, 심지어 설교에 담겨 있는 신학에서 잘못이 있다고 비평가들의 지적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비상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균형 잡힌 문장이나 연설의 점증적 발전이라는 측면이 아니라 청중에게 어느 정도로 영향을 주느냐는 측면으로 웅변력을 평가한다면, 무디의 설교는 단연 최고입니다. 청중을 완전히 설득시키는 데 있어서는 무디 선생을 필적할 사람이 없다시피 하며 그의 설교가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무디의 설교에는 일찍이 어떤 웅변가도 보여 주지 못한 감흥이 담겨 있으며, 또한 마음을 움직이는 그의 온화함은 거의 모든 경우에 그의 설교를 구제해 주는 차원을 넘어서서 장엄한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격앙시켜 주니까요. 무디의 설교가 지니는 이런저런 특징들을 충분히 담아 낼 수 있을 만한 말이 없군요.”
(1). 설교의 내용
무디가 살았던 시대는 혼란과 변화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들 대부분이 무디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으며 그의 설교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남북 재통합 이후 시대의 민족주의적 잔학 행위, 주요 산업 경영자들의 대단한 비도적적 행실, 정부의 수치스러운 타락, 서부에서의 인디언에 대한 극악한 대우, 천연 자원의 약탈 등, 이러한 문제들은 무디 설교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무디가 그 문제들을 의식하고 관심이 있지만 그는 우선적으로 자기 역할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일차적인 책임은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첫 결단을 내리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었고, 윤리적 사회적 문제가 그의 설교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성실함과 헌신이 인생을 하나님께 유용하게 해준다는 것을 그의 강조점이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올바른 삶을 요구한다고 지적하였다.
무디는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신뢰했다. 그의 일반적인 설교 내용은 성경 본문을 한 가지 요지를 향해 발전시킨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연구는 오로지 성경 연구뿐이었다. 그의 말을 보면, 그는 성경을 설명해 놓은 책을 제외하고는 다른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무종파주의적이고 비교리적으로서 아주 단순한 종후의 성서 해설이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설교를 비난하였지만 무디의 사역은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을 카리스마 방식으로 선포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 그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한 내용이 아니었다.
무디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하여 단순한 복음주의적인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설교내용에는 성경 구절이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았다. 무디의 설교 본문은 간단하였고 가볍게 다루어졌을 뿐이었다. 그는 성경의 예화를 자료로 즐겨 사용했는데, 아마도 이로 인해 ‘성경적 설교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택한 본문을 강해하거나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뛰어나지 않았다. 그의 설교가 주는 메시지는 일반적으로 주로 무디 자신의 개인 경험에서 비롯된 일련의 ‘이야기’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무디는 이야기를 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소유하고 있었다. 재미있게 전달했고 종종 대단한 호소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야기 스타일은 훌륭하였지만 일부는 지나치게 감상적이었으나, 무디는 때때로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설교에 사용하였다.
복음 전도자로서 그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다. 복음 전도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주제로 길을 잃은 자의 운명과 회개의 필요성 같은 주제들을 갖고 설교한 적이 무디에게는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다. 무디는 사람들에게 회심의 긴급성을 강조하였지만, 놀랍게도 회개문제를 많이 다르지 않았다. 그의 '회개‘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집회소에서의 설교가 회개를 다루지 않는다는 불평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실제로 저는 회개에 관해서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회개를 가르쳤을 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가르쳤을 때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회개에 관한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로서 여러분은 더 이상 불평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회개의 필요성을 믿고 있습니다.”
무디가 예술이나 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지만 사람들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죄와 욕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받아들인 복음은 인격적인 복음, 즉 꾸밈없이 그에게 전달되어 그를 구원해준 복음이었다. 사람들의 욕구를 이해한 지식인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해석해주고자 했지만 무디는 대중에게 자신이 무엇을 발견했고 그것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의 단순하고 진지하여 알기 쉬운 메시지가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지식인들에게까지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2). 설교하는 방법
무디가 설교하는 방법에는 신비스러운 점이 하나도 없었다. 무디는 성경에서 주제를 고른 뒤 형식적인 도입부를 완전히 생략한 채 직접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디는 일찍이 영국 영어에 속하는 많은 어휘를 익혔기 때문에 단문이나 경구에 담긴 가치를 잘 감지하고 있었다. 또한 무디의 타고난 재능 중에는 언제나 세련된 유머 감각과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힘, 그리고 상상력에서 우러나는 묘사력 등이 있었다. 무디가 설교할 때 주변에는 굉장한 활력이 넘치고 있다. 그의 말은 서투르고 그의 화법과 문법은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문장 하나하나는 간단하고 직접적이며 다채로운 표현과 속어로 가득 차 있다. 때로는 고의적으로 'ain't'(간략한 표현으로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이 사용한다)를 사용했다. 그의 설교 태도는 성실하고 자연스럽다. 각 문장 다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주변에는 절박감이 맴돌고 있다.
무디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스스럼없는 말씨에 감동을 했다. 그들은 그가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서너 명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설교를 한다’고 평했다. 실제로 그의 설교는 교훈적인 강화라기보다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말을 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마치 친구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 같았고 감상적인 설교자가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 같은 모습은 결코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 한 가지 장점으로 인해서 처음에는 전해들은 것만으로 무디를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무디에게 설득을 당하였다.
무디는 음치였지만 그는 예배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했다. 1806년 그는 필립 필립(Philip Phillips)란 이름을 가진 성악가를 예배에 활용했다. 유명한 찬송가 작곡가 필립 블리스(Philip Bliss) 무디의 집회를 도왔다. 1870년부터 무디의 사역의 파트너는 찬양 사역자 아이러 생키였다. 한 사람은 감동적인 노래로, 한 사람은 열정과 확신에 찬 설교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 생키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했고, 열려진 마음속으로 무디의 설교가 파고 들어간 것이다.
(3).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법
회중의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그들의 호기심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좋은 얘기 거리가 있으면 시작할 때 꺼내 놓으십시오. 틀에 박힌 말을 하지 말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십시오. 첫째, 둘째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등 상투적인 어구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총체적인 진리, 본문 전체를 있는 그대로 전하되 그 내용을 철저하게 인식시키십시오.’ 그리고 ‘청중들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사람은 마음을 계속 두드리면 그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의 머리와 다리 모든 것을 그 사람 전부를 얻게 됩니다. 회중을 사로잡으려면 마음을 겨냥해야 합니다. 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표면적으로만 보았을 때는 청중을 처음으로 감동시키는 부분은 바로 무디의 통솔력, 즉 집회에 운집한 거대한 무리를 다루는 능력이었다. 무디가 회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설교자로서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 독창적인 방법은 있다. 그 것이 청중들과 한 마음이 되는 방법이다. 이 방식을 아무도 모방할 수 없다. 무디는 예배가 시작되면 깊이 있고 영적인 찬양과 기도를 드리며 중간 중간에 심령을 찌르는 짧은 말을 삽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무디는 회중 앞에 모습을 보이는 때부터 강단에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까지 회중들이 뭔가 흥미로운 일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무디의 모습에서는 언제나 큰 열정과 영혼들을 향한 깊은 관심이 드러나고 있었다.
III. 메시지의 있어서 신학의 역할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신학도 공부한 적이 없고 경건주의적인 복음주의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한 평신도 부흥사인 무디가 그의 설교에서 조직적으로 구성된 신학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가 신학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느냐? 그리고 그는 교리와 교리적 설교, 신조와 신앙 고백 그 자체를 반대하였는가? 에 대한 것이다. 누스바움(Stan Nussbaum)은 무디가 조직적이며 신학적인 진술을 반대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무디의 의하면 이 중요한 계시의 귀중함을 체계화하는 데 있어서 이성의 중요성은 극히 적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1) 기본적으로 신학은 구원에 불필요함으로 그것은 시간 낭비이다. (2) 신학은 인간 이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를 대적할 수 없다. (3) 신학은 교회의 선교를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기독교 세력을 분산시키는 경향이 있다.”
환경적인 증거를 고려해 볼 때 무디의 학생들이 무디가 신학을 반대했고 최선의 경우에도 신학에 대해 무관심했다고 결론을 짓는다. 무디의 다음과 같은 말에 의해 그런 평가로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같은 일을 24시간 이내에 분쇄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교리 또는 저러한 교리를 전하기 위해 오지 않았으며 또 누구든지를 전한다. 어떤 사람들은 왜 당신은 특별하게 선택, 성화, 세례 또는 이러한 교리나 저러한 교리를 설교하지 않느냐고 항상 나에게 묻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다. ‘왜 당신은 어서 그것들을 전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무디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의 선교적인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조나 단순히 공허한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분 자신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나 신조나 목사를 믿는다면’ 그는 실망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직접 주님에게 오지 않고 다른 의사를 찾아가는 것 즉 이러 저러한 신조를 찾아가거나 신학 박사를 찾아가는 것은 큰 어려움이다.”
그러나 이 인용문들을 보면 무디가 살아 있는 신앙을 내포하고 있지 못하는 죽은 문자와 같은 교리에 반대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는 성경을 갈보리의 빛에 비추어 읽지 않고 교리의 빛에 비추어 읽는 것을 반대하였고, 교리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분열을 반대했다. 또한 기독교의 사랑이 결핍된 교리적인 정확성에 대해 반대했다. 무디는 신조에 대한 집착이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인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만 했다. 정당한 교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상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단순히 암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무디가 신학의 역할을 바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일리노이스 스트리트 교회가 그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서명해야 할 신조를 제정했다는 사실이다. 무디는 그 생애 말년에 ‘나의 신학’에 대해 말했다.
무디의 생각에는 현재의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모순되지 않는 신조와 교리가 있었다.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관계가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바른 교리, 즉 성경의 교리를 갖는 것은 중요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단순한 신조나 교리가 아니라는 것을 주시하십시오. 교리가 제자리에 있을 때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교리를 믿음이나 구원의 자리에 둘 때 그것들은 죄가 되는 것이다...신조는 길 또는 거리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인격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는 신앙, 이 신앙은 그리스도에 관한 신조가 아니라 곧 그리스도 자체인 것입니다.’
무디가 신조나 바른 교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산 신앙 사이에 역동적 관계를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무디는 조직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복음을 이해하고 설교하였으며 또한 분명한 신학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선포의 신학(proclamation theology)이었던 것이다.
나가는 말
무디의 설교를 말할 때면 단순함, 진지함, 겸손함, 감동, 감화, 성령 충만함, 자연스러움이 언제나 손꼽힌다. 그의 설교 태도는 자연스럽고 확신했다. 이를 위해 그는 주제의 내용이 자신을 사로잡을 때까지 기도했고 예화를 준비했다. 평범한 내용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는 생명력을 발견할 수 있음은 이러한 것이 기인된 것이다. 그의 세련된 위트와 풍부한 상상력, 완벽 같은 인간 이해들은 이미 설교자 무디를 역사적 위치에 올려놓았고, 끝없는 헌신과 경건생활은 성령을 그의 설교의 모든 시간에 사용하는 놀라운 결과를 맺고 있었다. 그는 오직 남모르는 준비의 사람이었고 항상 기도하는 설교자였다.
스탠리 군드리는 이와 같이 말했다. ‘무디의 출판된 설교집조차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속기로 기록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대부분 편집되었다. 출판된 설교들에 나타난 개요들은 종종 편집자들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이 말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일 즉 무디의 설교를 분석 평가하는 일의 결과는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평가들이 그의 설교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디의 설교는 이렇다 저렇다라고 할 수도 없게 된다. 지금 설교문들이 원래 무디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상이나 수사법, 언어구사 등을 들어 수정된 설교문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를 정확하며 공평하게 평가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있다면 그것은 그의 설교 tape를 보거나 듣는 방법이다. 무디의 설교 준비법을 통해 그가 자신의 설교문을 완전히 글로 쓰지는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디가 정식적으로 신학교육을 못 받기 때문에 설교에 조직신학이나 교리에 대한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을 받았다. 근본적인 선포의 신학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음에 소개된 무디의 ‘회개’라는 제목이 있는 설교를 보면 그 설교에 기독론, 구원론, 성화에 대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개라는 설교는 원초적인 그의 설교라면 무디가 공부하지 못했지만 조식신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의 예화를 사용하면 좋지만 성경에 대한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 이야기, 인물 등 이야기 해 줄 그것의 내용과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하며 또한 계속적으로 성경예화를 사용하면 회중들을 어지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디의 생애와 그의 사역을 통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다시금 새롭게 느껴준다. 그의 업적은 계속 남을 것이며 그의 구원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그가 그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일 것이다. 그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후세대의 사람들에게 유익한 교훈을 계속적으로 남겨줄 것이다. 그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그가 다음 같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긴박한 의식을 소유자였으며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타고난 열정과 불타는 전도의 역군이었다. 그가 훌륭한 저술가가 아니지만 단순한 언어구사를 하는 데에 있어서 큰 성공을 얻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논증과 설득의 능력을 약하지만 자기의 표현 방식과 전달 방법을 확고하게 갖고 있고 자기에게만 독창적인 전달 방식이 무디에게 있었다. 무디는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자신의 약함을 극복해 낸 승리자였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함으로서 뜨거운 열정 불타는 가슴으로 복음을 전달했다. 그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기초로 선포했고 또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몸 바치게 사랑하여 연구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사람들에 대한 엄청난 사랑을 갖고 있으며 개인과 청중에게 그 사랑을 전달하고자 했으며 인간의 마음을 잘 이해했고 그 것들을 내용으로 삼고 설교하기 때문에 설교사역에서 큰 성공을 얻었다. 그가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며 세속적 체험을 설교에 잘 활용했다. 무디는 기도를 통해 끝없는 말씀의 내용을 새롭게 하려 노력했다.
무디에게 우리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이 있고 또한 배우려고 해도 잘 되지도 않는 점들도 있다. 그가 참 독특한 하나님의 나팔소리였다. 그렇지만 무디의 삶과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말할 때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 것은 기독교교육사역면에서이다. 무디에게는 교육과 기독교가 함께 병행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육의 부족은 나를 항상 불리하게 했다. 나는 살고 있는 동안 이것으로 인하여 평생 고통을 당할 것이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경험을 남에게 오지 않도록 하는 그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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